〈 228화 〉 티나(120)
* * *
그 날, 저녁이 되어서야 소피아와 젤가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어. 후우... 역시 집이 최고네."
살짝 기레스와 끈적한 시선을 교환하며 소피아는 생긋 웃었다.
'읏..'
젤가나 하일즈는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짧은 시선이지만, 이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티나가 그 음탕한 시선을 놓칠 리가 없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순히 집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것처럼만 보이지만 티나의 눈에는보름만에 기레스를 만나서 행복해 미치겠다는 기운이 눈이 따가울 정도로 아른 거리는 것이다.
'흥.. 뭐 나도 이제 오빠 공인을 받았으니까..'
이제와 소피아에게 꿀릴건 하나 없다고 생각하면서 티나는 도발어린 시선으로 소피아를 받아 쳤다.
'!?'
그런 티나의 태도에 소피아는 살짝 의아해 하면서 다시 다정하게 말을 꺼냈다.
"잘들 지내고 있었어?"
"네.. 뭐.. 그렇죠."
하일즈는 클로에와 지냈던 즐거웠던 추억과, 전날 밤 있었던 흑역사를 동시에 떠올리면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한편 집에 돌아와 행복해 죽겠다는 소피아와 달리 젤가는 어딘지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하일즈와 티나를 앉혀놓고 딱히 듣고 싶지도 않은 자신의 활약상을 나불나불 거렸을텐데 오늘의 젤가는 삐지기라도 한 것처럼 하일즈의 물음에 답하기는 해도 본인이 나서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고 있었다.
'뭐지? 출장지에서 소피아랑 무슨 일 있었나?'
"자... 그리고.. 이건 현지에서 사온 선물."
소피아는 하일즈와 티나에게 각각 준비해 온 선물을 건네 주었다.
"응? 기레스 형한테는 왜 안줘요?"
"아.. 기레스한테는 따로 준비한 선물이 있거든."
"따로요..?"
소피아의 말에 하일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포장지 때문에 자신이 받은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굳이 기레스한테 선물을 따로 전해 준다는 것에서 당연스럽게도 편애하는 것을 느낀 것이다.
'보나마나 선물을 핑계로 오빠랑 하려는 속셈이겠지.'
반면 티나는 소피아의 음탕한 속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다소 편애적인 소피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납득이 간다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냥 여기서 주면 다 같이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 기레스한테 줄 건 따로 설명을 해줘야 하는 물건이라서... 설명도 할 겸, 겸사겸사 나중에 직접 전해주려고 한건데.."
'따로 설명을 해줘야 할 물건?'
소피아의 사족에 기레스의 선물이 더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진 하일즈였다. 도대체 어떤 선물이어야 따로 설명이 필요한 물건이란 말인가?
"하일즈가 말하는 것도 일리는 있으니까 일단 주고 생각할까?"
그렇게 말하곤 소피아는 잘 포장된 무언가를 기레스에게 건네주었다.
"자, 그러면 계속 서서 말하기도 그러니까 일단 들어가자."
그 뒤, 저녁식사를 하면서 가족들은 가볍게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기레스가 사는 마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마수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기레스는 물론이고 하일즈나 티나도 상당히 신선하게 소피아와 젤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수라...'
기레스도 마수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다. 소피아와 여행을 갈 때도 상식 밖의 생물을 본 적도 있고, 학교에서도 기초상식으로 가르칠 정도로 이세계에서 마수에 대한 이야기는 평범한 것이다.
하지만 기레스의 마을은 책에서 나온 상식이 상식처럼 느껴지지 않을만큼 마수에 대해서만큼은 청정지역인지라 마수라는 것에 대해 크게 와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책에서 본 걸 생각해 보면 우리 마을 밖은 생각보다 마수가 많이 나타나는 모양이긴 하던데... 어떨런지..'
[똑똑]
그렇게 기레스가 마수에 대한 생각을 곱씹어 보는 사이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기레스 난데, 지금 시간 되니?"
무언가 기대를 머금은 듯, 달콤한 소피아의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선물 핑계를 대고 만나러 오기로 했었던가? 소피아도 참.. 그렇게 대놓고 편애하는 티를 내다니..'
하일즈나 젤가의 흙 씹은 표정을 떠올린 기레스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응"
'음? 생각한 것 보다는 다소곳한 차림인데?'
당연히 발정나 색기가 흘러 넘치는 차림을 입고 오겠거니 기대했던 기레스는 생각밖의 차림에 살짝 놀랐다
'저건 저거대로 좋지만..'
"아흐읏..잠깐 기레스."
애가 타는 달콤한 교성소리를 내면서도 소피아는 기레스를 저지했다.
"어? 왜 그래?"
"하아.. 으읏.. 왜 그래는 무슨. 지금 시작해버리면 설명을 못해주잖아."
"설명? 아.. 아까 그거 나 만나려고 둘러댄거 아니었어?"
"그것도 없는건 아니긴 한데..."
발갛게 홍조를 띠며 소피아는 기대를 머금은 시선으로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설명도 중요하단말야"
"도대체 뭐길래?"
기레스는 의아해 하면서 소피아에게 받았던 포장을 열어 보았다
'음?'
포장 속에서 나온 물건은 작은 흑요석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듯한 흑빛의 동그란 돌은 척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은 아닌 듯 보였다
"이건..?"
"마석이야"
"마석? 그 마수를 잡으면 나온다는 그거?"
마수를 잡으면 마석을 얻을수 있고 마석은 에너지원으로 쓰인다는 이야기는 이세계에서는 상식중의 상식인 이야기다
"맞기는 한데 조금 달라."
"?"
"그건 이번에 공략한 마궁의 결정체로 특제거든.."
"특제..?"
평소 젤가와는 달리 허영심이 강하지 않은 소피아가 의기양양하게 특제라고 말할 정도의 물건이라는 말을 들은 기레스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기레스의 기대하는 기색을 느낀 소피아는 요망하게 눈웃음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보통 마수를 잡아서 나오는 마석은 소모성 물건에 단순한 에너지원으로서의 가치밖에 없어."
"그렇게 배우긴 했지. 내 방에 설치되서 비춰주는 저것도 마석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학교에서도 배운 부분이긴 하지만, 생활적으로도 방안의 빛을 내는 도구를 바꾸는건 수차례나 봐온 기레스는 소피아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건.. 이건 소모성 물건이 아니라는건가?'
"기레스가 들고 있는건.. 마궁을 이루는 근간이 되는 핵으로 보통의 마석과는 다른 물건이야."
'마궁의 핵? 뭔가 엄청 거창한 물건 같은 느낌인데..'
"공략전까지 마궁을 유지하는 핵인만큼 보통의 마석과는 다르게 반영구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물건이야."
"반영구적이라니 그럼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무한히 에너지를 낸다는거야?"
"맞긴한데 조금 달라. 기레스는 무한히 에너지를 낸다고 생각하는거 같은데 그렇지는 않고일반적인 마석들처럼 방전돼서 망가지는 일 없이 자가 충전으로 계속 쓸수 있다는 쪽이 올바른 표현일거야"
"음. 확실히 대단하긴 한데 나한테 이걸 선물로 줘봐야 사용을 못하니 의미가 없지 않나?"
"기레스 그거 한번 쥐어볼래?"
소피아의 말에 기레스는 흑요석을 꾹 쥐어보았다.
"우오...!"
가이아스를 사용할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힘이 넘치는 감각에 기레스는 흠칫 놀랐다
가이아스를 사용할 때는 지치지 않는, 기운이 넘치는 느낌이었다면 흑요석을 쥔 지금은 평소와는 다른 힘이 넘치는 느낌이 든 것이다
"어때?"
소피아는 놀라하는 기레스를 사랑스럽게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뭐야 이거.."
"이런 마궁의 핵은 특수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 단적인 예로는 불이라던가 바람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이번 던젼의 경우는 특수한 성질은 없지만 신체 전반적인 능력에 관한 부분이었던거 같아."
"와하하..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닌데"
유례없이 텐션이 높아져서 신나하는 기레스를 보고 소피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반적인 마석들은 에너지원에 불과하니까 한계 이상의 힘을 내게 하는건 무리지만 마궁의 핵은 기본적으로 소유자의 한계 이상의 힘을 내는것도 가능하거든. 어때? 마음에 들어?"
"최고야.. 이정도 힘이면 하일즈보다 센거 아냐?"
"기레스 답지 않게 엄청 헛바람 드네? 하일즈는 지금의 기레스여도 단순 신체능력으로는 배는 강할걸?"
"진짜? 이렇게 강해졌는데도 그만큼이나 차이가 나는거야?"
"강해졌다해도 4~50퍼 쯤이니까.."
'4~50퍼? 체감상으로는 몇배는 강해진 느낌이었는데'
"잠깐만 4~50퍼? 이거 하일즈나 티나가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기레스는 은근히 예리하다니까... 하일즈나 티나 뿐 아니라.. 젤가나 내가 사용해도 한시적으로는 그정도의 효과는 나오는 물건이야"
"뭐? 그럼 이거 내가 사용하는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잖아.. 아.. 그래서.. 젤가가.. 그렇게 저기압이었던건가.."
이제야 젤가의 똥 씹은 표정이 무엇인지 납득이 되는 기레스였다.
젤가나 소피아가 사용하면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도 가지 않는 보물중의 보물, 비단 젤가나 소피아가 아니어도 하일즈나 티나가 사용해도 클로에조차 가볍게 뛰어넘을 만큼 압도적일 물건을 가뜩이나 원수같은 자신한테 주겠다는데 젤가가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응. 그거 기레스한테 주려고 한다고 했더니 젤가가 상당히 반대해 왔거든~"
그런 말을 하면서 소피아는 잔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젤가가 얼마나 휘둘렸을지 보는것만으로 오싹해지는 미소였다.
"근데 이거 매력적인 물건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한테는 좀 아깝지 않나 싶은데 차라리 소피아 네가 가지는 건 어때?"
"어라? 아직 이야기 다 안 끝났는데 그렇게 쉽게 나한테 줘버려도 되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