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221화 (221/238)

〈 221화 〉 티나(113)

* * *

"아, 오빠!"

방과 후, 티나는 하일즈를 발견하곤 해맑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오, 티나 수업은 다 끝났어?"

이른 아침, 티나는 하일즈와 클로에와의 마지막 동거 기념 파티를 위한 장을 보기로 약속했다.

"응. 장 보러 갈까?"

고개를 끄덕이고 하일즈는 사랑스러운 여동생과 함께 발걸음을 떼었다.

클로에도 클로에지만, 티나도 그 못지 않은 미인 중의 미인, 자연히 하일즈와 같이 걸으면 그림이 된다.

'그러고 보면 티나와 같이 돌아다니는 것도 꽤 오랜만이네..'

선남선녀를 향한 여러 사람들의 은근한 시선을 느끼면서 하일즈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인과 지내는 시간도 좋지만, 이렇게 동생과 보내는 정겨운 시간도 나쁘지는 않은 것이다.

"아. 오빠 날도 날이고, 엄마도 안계시니까.. 이거 사볼래?"

"응?"

활짝 웃으면서 티나가 서 있는 곳은 주류품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어? 술?"

하일즈나 티나나,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긴 했지만, 쉽사리 입에 댈 기회는 없었다. 소피아가 술이라고 하면 질색을 했기 때문이다.

"헤헤.. 우리도 이제 술 정도는 괜찮잖아."

"나도 싫은 건 아닌데.. 여기 점주도 어머니를 아실텐데 나중에 아시게 되면 뭐라 듣거나 하지 않을까?"

"들키면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한잔만 했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되잖아? 기레스 오빠를 괴롭히거나 하는 것만 아니면 엄마가 이정도 일로 크게 혼낼 일은 없을 걸?"

'기레스 오빠..? 요즘 티나 나랑 따로 있을 때도 은근히 그 병신새끼를 자꾸 오빠라고 부르는 거 같은데.. 클로에랑 지내면서 습관이 되어 버렸나? 내 앞에서는 병신이라고 욕해도 좋은데..'

하일즈의 은근히 불편해 하는 것을 알면서도 티나는 짐짓 모른 척 말을 이어 나갔다.

"심해봐야 잔소리 정도나 듣고 말겠지. 뭐. 엄마도 그정도 유도리는 있을거야. 까놓고 기레스 오빠를 괴롭혔을 때처럼 혼낼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잖아?"

티나는 기레스의 주도 하에 벌어진 이 일로 소피아에게 구박을 들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칫..'

오히려 좋아라 하면서 기레스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부릴 소피아를 떠올린 티나는 살짝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거기다.. 오늘, 마지막 날이기도 한데, 언니의 취한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우읏..."

티나의 달콤한 속삭임에 하일즈는 클로에의 알딸딸하게 취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몸을 흠칫 떨었다. 상상 속에서 취한 클로에만으로도 미치겠는데, 눈앞에서는 티나가 요망하게 귓가를 간질여대니 들뜬 마음을 진정시킬수가 없는 하일즈였다.

'확실히... 티나 말도 일리가 있어. 마지막 날 파티라면 역시.. 술이지. 거기다 클로에가 취하게 되면..'

혹시나 이 마지막의 마지막 날, 클로에와 몸을 섞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하일즈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버렸다.

"혹시 술 살 생각이 있으면 말해. 내가 한 턱 쏠게."

"어? 티나 네가 왜?"

"파티 준비에 필요한 것들은 오빠가 다 살 거 아냐? 오빠 덕에 언니랑 '소중한 추억'도 만들었는데, 나도 동생으로서 좀 거들어야 되지 않겠어?"

티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얼굴을 살짝 물들이곤 말했다.

'크으..'

실로 기특하기 짝이 없는 티나의 말에 하일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티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으...'

자신의 머릿결을 쓰다듬는 하일즈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티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기레스 오빠에 비하면 이정돈가..'

최근들어 티나는 클로에를 살살 유도하고 나면 기레스에게 애무와 함께 비단결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어지기 일쑤였다.

이제는 애무 하나 없이 상상만으로도 등골을 오싹 거리게 만드는 기레스의 쓰다듬을 떠올린 티나는 피식 조소를 머금고는 하일즈의 손을 가볍게 쳐내렸다.

[탓]

"어?"

나름 분위기도 좋았겠다. 설마하니 손을 쳐질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하일즈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하일즈에게 티나는 툴툴 거리며 말했다.

"부, 부끄럽게 뭐하는 거야.."

"아.. 아니, 너무 기특하고 고마워서.."

"됐어. 애도 아니고.."

'얼마전까지만해도 솔직하게 좋아하면서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제 티나도 다 큰건가.. 뭔가 아쉬운걸..'

"그보다도 오빠. 이거 어때?"

티나는 고사리 같이 예쁜 손으로 술병을 들어 하일즈에게 보여주었다.

"음...? 아니 이건 너무 독하지 않아?"

"오빠도 참, 언니가 어떤 인간인데? 어지간한 술 가지고 취할 것 같이 보여?"

"으으음...."

티나의 말에 하일즈의 귀가 팔랑 거린다.

클로에의 주량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대가 그 클로에인 이상 높을 가능성은 굉장히 커보인 것이다.

'기껏 사들고 갔는데 평소처럼 무반응이면 그것도.. 좀 그렇긴 하지..?'

이왕 사기로 마음 먹었다면, 얼음같은 클로에가 술에 취해 흐무지게 풀어진 얼굴을 보고 싶은 하일즈였다.

야한 짓까지 할 수 있으면 더욱 좋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취한 모습을 보기만 해도 소원이 없을 정도로 하일즈는 저 혼자 기대로 애간장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

"그건 뭐야?"

"아저씨한테 물어보니까, 이 술은 새콤달콤해서 음료수 같이 맛있는 술이라고 하더라고."

"호오.."

"일단은 이걸로 간을 보면서 분위기를 띄우다가, 오빠가 독한 술이 별거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서 천천히 술에 취하게 만들면 어떨까 싶은데.."

"음.. 뭔가 클로에를 속이는 것 같아 그렇지 않나..?"

"그럼.. 안 할거야? 오늘이 아니면 결혼하기 전까지는 언니랑 술 마실 일 없을걸? 아니, 언니 성격상 결혼해도 술을 같이 마셔준다는 보장도 없고.."

"크으음... 역시 그렇지?"

이렇게 며칠이나 동거를 하면서도 기어코 단 한번의 애무도 허용하지 않았던 클로에다.

그런 클로에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티나의 말은 더욱 그럴싸해 보여서 하일즈는 티나의 교묘한 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하일즈는 티나가 추천하는 술과, 음식들을 잔뜩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어, 어서와. 하일즈."

클로에는 살짝 뺨을 물들이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온화한 미소를 짓고 하일즈를 반겼다.

'하아...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면 이런 기분인 걸까?'

오늘의 복장은 소피아를 떠올릴 만큼 단아해 보이는 주부를 연상시키는 복장이어서 그런지, 하일즈는 신혼생활을 떠올리곤 헤실거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와... 그게 다 음식이야?"

'시발..'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클로에의 근처에서 서성이던 기레스가 놀란 눈으로 말을 걸어왔다.

'클로에의 앞에서는 좋은 동생으로.. 있어야지..'

"어.. 형. 어제도 말했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먹고 마시면서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서 돈 좀 썼지."

'그러고 보니 나보다 어린 티나도 저렇게 기특하게 파티 한다고 술을 샀는데, 저 씹새끼는 눈치 하나 없이 얻어 쳐먹기만 하는건가? 어제 클로에 옆에서 파티하겠다는 걸 들어 놓고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눈치나 개념은 밥 말아먹은 기레스의 행동이 괘씸하기 짝이 없는 하일즈였다.

'아침 저녁으로 요리도 많이 안했고.. 시발 어디 하나 쓸 게 없는 새끼라니까.. 저러니 따돌림이나 당하지.'

"저.. 하일즈. 너무 과소비 한 거 아냐?"

"과소비는 무슨.. 클로에 너랑 지내는 마지막 날인데 이정돈 아무 것도 아니지."

"그래도.."

"정 신경 쓰이면, 맛있게 먹고 '마셔줘' 그래주면 준비한 나도 정말 기쁠거야."

"아.. 응..."

'오옷... 클로에는 이런 게 취향인가..?'

살짝 클로에의 눈빛이 요염하게 젖는 게, 누가봐도 자신에게 다시 한번 반한 것만 같아, 하일즈는 헤벌쭉 싱글거리며 좋아라 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하일즈는 부지런히 요리 준비를 했다.

그림같이 멋진 외모로, 클로에를 위해 책임지고 수많은 요리를 준비하는 하일즈의 모습은 누가봐도 반할 것만 같은 이상적인 남자친구였지만, 기레스와 티나는 물론이거니와 클로에조차도 그 노력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후우.. 자! 이걸로 끝."

거실 탁자에는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척 봐도 준비하는데 엄청난 고생이 들어간 게 눈에 훤히 보일 멋진 만찬이었다.

"고생... 많았어. 하일즈. 나도 도와줘도 괜찮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날, 대접인데 손님한테 물을 뭍히게 할 수는 없지. 티나도 도와줘서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

하일즈는 클로에의 복장에 눈을 흘끗이며 멋드러진 어투로 말했다.

"아... 고마워.. 하일즈."

'부끄러워 하긴.. 요리 따위 클로에의 저 복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클로에는 색기가 흘러 넘치는 복장을 입고 나와 발그레한 얼굴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렇게 부끄러워 하면서도 기어코 입고 나와 자신의 눈을 호강시켜주는 클로에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하일즈는 오늘 하루 노력한 피로도 잊고 입꼬리가 귀에 걸려 버렸다.

'이제 클로에가 취한 모습만 보면...'

섹스고 뭐고 다 필요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 오른다.

"클로에. 그.. 오늘 마지막 날이고 하니,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서 술을 좀 준비해 봤거든?"

"으응.. 그래?"

'어째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취한 거 같이 요염하네..'

"시, 싫으면 안해도 되지만, 한잔 할래?"

"..... 좋아.. '특별한 날'이니까.."

하일즈에게 술을 받아 들고 클로에는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는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가 술을 마셨다.

하일즈는 클로에의 고운 입술로 흘러 들어가는 술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음.. 맛있네.. 이거."

"그렇지? 조금 독한 술도 있는데.. 혹시 생각 있으면 말해. 티나가 사온 건데, 상당히 고급진 술이라고 하더라고."

"하일즈는 그거 마실거야?"

"그야 뭐.."

하일즈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내가 따라줄까?"

"어? 어어.."

클로에는 색기 넘치는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기품 있는 움직임으로 하일즈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고마워 하일즈. 이렇게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게 해줘서.."

술이 한잔 들어가서일까, 보얀 피부에 떠오른 울긋불긋한 표정과 게슴츠레 살짝 풀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클로에의 요염한 자태에 하일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아, 아니 뭘... 나야말로 고마운데. 하, 하하.. 크으.."

클로에가 따라주는 술 한잔에 괜한 헛바람이 든 하일즈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잔에 들어간 술을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겨 버렸다.

'으.. 목이 타는 거 같아... 얼얼하네..'

그 와중에도 이거라면 클로에도 취하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하일즈는 목젖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거.. 많이 독해?"

'오.. 좋아...'

"클로에도 한 잔 해볼래?"

호기심을 보이는 클로에를 보자마자 하일즈는 기회를 잡았다 싶어 은근스레 거절하기 힘들도록 술잔을 클로에에게 쥐여주면서 말했다.

"음.. 그럼 한잔만... 으.. 확실히.."

"꽤 독하지? 독한 것도 독한대로 느낌이 있는 거 같지만.."

술을 찰랑이면서 하일즈는 분위기를 잡고 말했다.

"이렇게 독한데도, 여유로워 보이네..?"

마치 이런 술에도 끄덕 없는 것에 놀랐다는 듯한 클로에의 말이 간질간질 하일즈의 허영심을 자극한다.

"이정도야 뭐.. 조금 화끈한 거 빼고는 별 거 없잖아?"

실제로 만취하지도 않았겠다. 클로에의 앞에서 강한 척 하고 싶은 마음에 하일즈는 호기를 부리며 대꾸했다.

"하일즈는 술이 세구나...."

감탄어린 목소리에는 어딘지 아양이라도 떠는 듯한 교태스러움이 은근히 묻어 나와 하일즈의 마음을 호려 버렸다.

담소와 함께 술이 들어간다. 마시는 것은 클로에를 취하게 만들기 위해 준비한 독한 술 뿐이다.

'조금 취했지만.. 이정도는 괜찮아.. 아직 제대로 생각하고 있고..'

"크으.."

"오빠가 이렇게 술이 셀 줄이야.."

옆에서 살살 거드는 티나의 말도 하일즈의 자부심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만든다.

'조금 머리가 무겁긴 하지만, 이렇게 생각이 돌아간다는 거 자체가 버틸만은 하다는 거니까..'

"하일즈.."

"응?"

"너무 독한 술만 마시면.. 속 버리잖아."

'어... 클로에도 취했나?'

평소의 클로에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사근사근한 반응, 마치 소피아를 보는 것만 같은 정숙하면서도 요염한 느낌에 하일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으..'

어여쁜 얼굴은 어딘지 욕정이라도 느끼는 듯 발갛게 물들어 있다.

걱정하는 듯한 말과 눈빛은 요사스럽게 빛나 하일즈의 심장을 꼭 죄이게 만들고, 입가에 서린 녹아내릴 듯하면서도 파멸적인 미소는 지금까지 보아온 클로에의 어떤 모습보다도 요염해 하일즈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독한 술만 술이 아니니까... 너무 무리하지말고 이번에는 '이거 마셔.'"

미리 '준비해 둔' 새콤달콤한 술을 건네며 클로에는 살짝 몸을 떨면서,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음탕함으로 한껏 물든 표정으로 하일즈에게 속삭였다.

"고, 고마워 클로에."

그야말로 영혼마저 쏙 빼놓는 자태와 클로에의 상냥함에 하일즈는 백치처럼 헤벌쭉한 표정으로 술을 받아 마셨다.

"어... 아.. 어으.."

그와 동시에 꿈벅거리던 하일즈의 시야는 전원을 꺼버린 텔레비전마냥 그대로 어둠으로 물들어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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