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 티나(102)
* * *
"우리도 아예 티나한테 숨기지 않고 다 까발려서 끝장을 보는 건 어떨까?"
"뭐?"
"티나도 너나 하일즈로 날 협박까지 해대면서 나한테 들이대고 있잖아? 티나가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아예 우리 관계를 다 밝히고 배째라고 나서보자는거지."
"하지만.. 티나가 가만히 있을까?"
클로에는 지난 밤, 자신에게 황홀해 하면서 기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티나를 떠올렸다.
사정을 모르는 클로에의 입장에서 보면 티나의 성격으로 보나, 기레스를 향한 연심으로 보나, 전혀 곱게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티나가 배신감에 다 까발릴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가능성은 낮다고 봐."
"어째서?"
"원래는 지키려고 했던 하일즈한테 다 까발리겠다고 협박할 정도니까 말이지. 나한테 협박으로는 잘 통한 건 사실이지만, 되돌려서 생각하면 그정도로 내 애무를 받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
"아..."
'기레스는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티나가 하일즈에게 까발리는 걸로 베팅한다면, 이쪽은 애무로 베팅한다는거지. 어느 한 쪽이 물러나거나 양쪽 다 파멸할 때까지 말야."
이 치킨게임의 승자는 이미 사전에 결정되어 있었음에도 기레스는 마치 비장한 각오라도 다진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티나의 성깔과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클로에지만, 이 승부는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내 선에서 티나한테 선고하고 끝냈어야 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티나한테 협박 당해서 주도권을 뺏긴 지금은 나 혼자서는 힘들거 같아서 말야. 클로에 네가 도와주면 티나를 몰아부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기레스 네가 부탁하는 거면 뭐든지 도와주기는 할거지만.. 혼자하면 안되는 거야?"
"혼자 밝히면 내 독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티나가 배짱으로 협박하고 들면 강하게 몰아 부칠 수 없거든. 반면에 네가 도와줘서 같이 관계를 까발려 버리면 이쪽도 뒤가 없다는 것을 티나가 알아줄거니까 느낌이 다를거야."
'그렇구나..'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바로 어제, 말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를 실감한 클로에다.
기레스가 홀로 멋대로 자신과의 관계를 말로 커밍아웃 하는 것과, 자신과 함께 합의해 각오를 보여주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것이라는 것을 클로에는 뼛 속에 사무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흘끔 기레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기레스는 티나가 자기를 자위도구 취급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그런데 기레스. 솔직히 해볼만 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티나가 정말로 다 까발려 버리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때는.. 둘이서 야반도주라도 할래?"
까발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레스는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술술 입을 놀렸다.
"어?"
"아... 미안. 너도 집안 사정이 있는데 같이 도망치는 건 좀 그런가..? 그럼 일단은..."
"아.. 아냐..!"
클로에는 얼굴을 붉히고 손을 파닥 거리면서 안달을 내며 기레스의 말을 가로 막고는 우물쭈물 기레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난.. 괜찮아.. 아니.. 오히려 좋... 은데.. 기레스.. 넌 그래도 좋은거야? 나 하나 때문에 가족을 다 포기하게 되는건데?"
"그렇다고 해도.. 티나나 하일즈 같은 거 보다는 네가 소중하니까 말이지."
"아으..."
손을 붕붕 저으면서 클로에는 울긋 불긋 색이 감도는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는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굳이 밝히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지 않아?"
"그래도 좋아?"
"좋지는 않지만.. 이게 최선이고.. 괜히 기레스 너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
기레스가 야반도주 하게 되는 것은 폐를 끼치는 거라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 것은 이미 폐라고 생각지도 않는 클로에였다.
"그건 상황을 보류하는 거지, 최선은 아니라고 봐. 티나가 저렇게 들이대고 있으면 늦은 빠르든 우리 관계는 들통날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음..?"
기레스의 말을 듣고 티나의 행동력을 떠올린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걸리고 나서 배째라고 나설 수도 있긴 하지만.. 몰렸을 때 어쩔 수 없이 까발리는 거랑, 스스로 까발려서 주도권을 가지고 오는 건 차이가 꽤 날거니까.. 이왕이면 티나가 쫄아서 수그리게 만드는 쪽이 좋잖아?"
"그렇네."
"그리고..."
"?"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도 우리 집에서 클로에 너랑 즐기고 싶었거든.."
"아..."
클로에는 행복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윽한 시선으로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말야.. 클로에 너한테는 미안한 말일 수 있는데.."
"응?"
"우리 관계를 밝힐 때, 티나를 내치게 되면 진짜로 까발려 버릴 가능성이 높잖아?"
"그... 그렇지."
"그래서 티나도 여튼 애무를 해주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기레스는 클로에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방금, 내가 티나보다 더 소중하다고 했지?"
"그랬지."
"후우.. 그럼 됐어. 어차피 티나를 애무로 구슬리는 건 처음부터 결정된 거였잖아. 이제와서는 새삼스러울 뿐이야."
티나의 기레스를 향한 저돌적인 유혹과 도발에 휘둘릴대로 휘둘렸기 때문일까, 소피아와 기레스가 대련하는 모습만으로도 질투심에 몸을 가누지 못했던 클로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기레스.."
둘 밖에 없는 구교사에서 클로에는 기레스에게 끈적한 몸놀림으로 기레스에게 매달려 안겼다.
요망한 표정으로 살그머니 기레스에게 달라 붙는 게 꼭 티나를 보는 것만 같이 저돌적이기 짝이 없었다.
"티나가 나한테 자랑스럽게 말하던데... 육변기가 뭐야..?"
"엑...? 아니.. 그 녀석 미쳤냐? 너한테 그런 이야기까지 했어? 클로에 너는 몰라도 돼. 아니 그보다 말만 들어도 척하면 척, 안 좋은 의미라는 거 알잖아?"
"하지만.."
여자로서 입에 담는 것이 수치인 육변기라는 주제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클로에의 말투에는 아쉽다는 듯한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 고지식한 클로에가 육변기에 이런 반응이라니..'
티나가 어지간히도 질투심을 잘 자극했다고 생각하면서 기레스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한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지..'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그 이야기는 금지야. 금지. 그보다 이따가 티나한테 어떻게 밝힐지나 생각해 보자고.."
"아읏..♥ 으응.."
봉긋한 가슴, 유두 끝을 스치는 손가락에 클로에는 단숨을 내쉬면서 기레스를 받아 들였다.
그 날 저녁 일과를 끝마치고 기레스는 하일즈과 교대하기 위해 셀린의 방으로 향했다.
"하일즈 교대하러 왔어."
교대하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 하일즈를 맞이하러 오는 것은 기레스에겐 이미 일과가 되어 있었다.
"우웅... 아아앙.."
"마침 잘 왔네. 기저귀를 갈아줘야 될 것 같은데 네가 해주면 되겠다."
"어? 어어.."
'씹새끼. 이젠 형이라고도 안 부르는구만.. 뭐 나야 좋지만..'
소피아가 없다고 하일즈가 삐딱선을 타면 탈수록 기레스는 속이 홀가분하기만 했다.
"하아.. 시발.."
기레스의 얼굴을 본 하일즈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욕설을 내뱉었다. 평소보다 더욱 저기압인 하일즈의 상태에 기레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했다.
'클로에와 같이 셀린을 못봐서 화가 난 모양이구만.'
간다는 말도 없이 하일즈는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으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던 중, 하일즈는 계단을 내려오는 클로에를 발견하고 물었다.
'오오...'
가벼운 잠옷차림의 클로에의 모습에 방금까지 저기압이었던 하일즈의 텐션은 삽시간에 미터기를 뚫고 올라가 버렸다.
"클로에.. 어디 가?"
"화장실 가려고 하는데.. 하일즈는 셀린 보는 거 끝난거야? 좀 빠르지 않아?"
"아.. 형이 오늘 좀 일찍 봐주겠다고 하셔서.. 고맙게 받아 들였지."
"그렇구나.. 음.. 기레스는 어린아이를 좋아하나?"
어쩐지 기레스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한 클로에의 발언에 하일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진 않을 거야. 그냥 시간 감각이 없는거겠지."
'뭐지.. 이전부터 하일즈는 기레스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듯한 느낌인데.. 기레스는 하일즈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였는데..'
하일즈를 위하겠다고 별의 별 짓거리는 다 했던 기레스를 떠올린 클로에는 살짝 불편함을 숨기지 못하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하일즈를 위 아래로 흝어 보았다.
"그럼, 셀린 보느라 힘들었을텐데 푹 쉬어. 내일 봐."
그렇게 클로에는 냉랭하게 말을 툭 건네곤, 하일즈가 뭐라 말릴 틈도 없이 비단결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곧장 화장실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 크, 클로.."
대화를 지속할 여지를 단칼에 끊어 버리는 클로에의 말투에 하일즈는 멍한 얼굴로 클로에가 사라진 계단만을 망망히 바라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