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티나(99)
* * *
기레스에게 가볍게 꼽을 주기도 했겠다, 혹시나 금방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고 클로에는 순진한 생각을 품어 봤지만, 그 날, 티나는 늦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후으.. 좋아♥"
기지개와 함께 나른한 숨소리를 내쉬면서 티나는 침대의 이불 안으로 들어와 곧장 잠이 들어 버렸다.
'으읏.. 킁킁..'
그렇게 기레스와 끈적하게 뒹굴러 놓고 몸을 씻지도 않았는지 티나의 몸에선 코를 찌르는 정취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으읏..'
결국 그날 밤, 사방에서 풍겨오는 기레스의 잔향에 클로에는 몸이 근질거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으음.. 아..! 언니 잘 잤어?"
몇 시간의 단잠을 만끽하고,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뜬 티나는 이미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클로에에게 해맑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티나도 잘 잤어?"
"응."
"어제는 언제 들어왔어? 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던데.."
"아~ 오빠 방에서 조금 자고 오느라... 언니.. 혹시 기다렸어?"
티나는 가볍게 미안해 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레스와 정사를 즐긴 것도 모자라 같이 잠까지 자고 왔다는 말에 클로에는 순간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으득]
"조금.."
'보아하니 한숨도 못 잔 모양이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소피아와 기레스에게 휘둘려 매일 같이 발정난 몸을 오슬오슬 떨면서 잠들지 못했던 티나는 클로에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기레스와 별다른 관계가 없었어도 신경이 쓰여서 잠들지 못했을텐데, 이미 기레스와 달콤한 밀회를 즐기고 있던 클로에가 자신과 기레스를 뒤로하고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그렇게 잠을 설쳐 놓고도..'
기운 없이 퀭한 눈을 하고 있는 클로에의 서늘한 얼굴은 어딘지 병약해 보이는 절세미인을 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평소의 모습도 조각같이 아름답지만 기운이 없는 모습마저도 매력이 넘치는 클로에의 용모에 티나는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신경쓰게 해서 미안해. 언니. 하긴.. 아무리 의붓남매 사이여도 몸을 섞는다는데 편히 자기는 힘들었을수도 있겠네."
"그런거야! 내가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 줄 아니?"
클로에는 티나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속 안 쌓일대로 쌓인 감정을 부딪혀 왔다.
'어지간히도 안달났나보네..'
매사 침착하고 묵묵한 클로에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오랜 기간 알고 지낸 티나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아하하.. 미안. 언니. 이런 이야기는 내가 오빠한테 범해졌다는 일도 알고 있는 언니한테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라서 냅다 말해버리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아무리 '기레스 오빠한테 별 감정이 없는' 언니라고 해도 속이 편할리는 없겠네."
'끄윽...'
살살 속을 긁는 티나의 말에 클로에는 속이 자글자글 타올랐다. 악의는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점이 더 약이 오르는 클로에였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언니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도와줘? 뭘?"
"사실 말야.. 기레스 오빠가 저래 봬도 이상하게 고집이 세서.. 내가 유혹해대도 잘 넘어오지 않거든?"
듣던 중 반가운 티나의 솔깃한 말에 클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되물었다.
"잘 넘어오지 않는다니.. 어제는 그렇게 일찍 나가서 결국 기레스 방에서 잠까지 자고 왔잖아? 뭐가 넘어오지 않는다는 거야?"
"으.. 조금 창피하긴 한데.. 사실 오빠한테 애무 받고 싶어서 내가 좀 많이 들이대고 있거든? 근데 둘만 있으면 은근히 황소고집이라서 애무를 잘 안해준단 말야."
클로에는 눈을 감고, 자신이 기레스와 연습을 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나름 마을에서 미녀라고 소문난 자신이 유혹하면 홀라당 넘어올 법 한데도 고지식하게 연습을 고수했던 기레스라면 어째 티나의 이야기가 그럴 법 해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제는 분명 기레스랑 살을 섞었는데.. 음.. 그러고 보니 기레스랑 뭔가 속닥거리기는 했었나..?'
기레스와 티나가 속삭인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해 했다.
"완전 발정난 원숭이 같은 색골인 주제에 이상한 고집이 있어가지고는... 그래도 평소에는 적당히 밀어부치면서 유혹하면 나름대로 애무 받을 수 있었는데, 어제는 이상하게 안된다고 더 고집을 부려서 유혹하는데 정말 혼났어. 좀 무리하게 밀어 붙혀서 결국에는 기분 좋은 애무를 받기는 했지만.."
"그, 그래?"
'이건.. 나 때문인거지..?'
클로에는 티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발그레 홍조를 띠우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은 등한시하고 티나한테만 정신이 팔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기레스가 어느정도 자신을 의식해서 티나를 조금이나마 거절해주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클로에의 얼굴에는 파릇파릇한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와... 저 헤실거리는 것 좀 봐..'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평소 그렇게나 얼음장 같은 클로에가, 기레스가 자신의 유혹을 은근히 거절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렇게 배시시 풀어진 얼굴로 생글거릴 수 있다는 사실에, 뿌리 깊은 애정을 느낀 티나는 티나대로 뭔가 속이 쿡쿡거린다.
"그래서 말인데.. 언니가 나 좀 도와주면 안될까?"
티나의 얼굴에 다소 짓궂어 보이는 요망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응? 도, 도와달라니 뭘...?"
멍하니 정신을 팔고 있었던 클로에는 티나의 말에 정신을 차려, 표정을 되돌리면서 되물었다. 되돌린다고 되돌린 표정에선 아직도 푸근한 기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오빠야 원래 단 둘이 있을 때는 괜히 팅기고 그러지만, 사실 집에서 내가 가족들 눈을 피해서 몰래 애무해대면 그건 크게 거절 못하거든? 괜히 크게 거절하다가 들킬 수도 있으니까 말야."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내가 기레스 오빠랑 좀 더 적극적으로 야한 장난 좀 칠 수 있게 언니가 하일즈 오빠의 시선을 좀 끌어주면 안될까?"
"하일즈를?"
티나의 악의가 듬뿍 담긴 칼부림에 클로에의 속은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다.
"아마 하일즈 오빠도 언니가 관심을 가져주면 엄청나게 좋아할 거야."
뭐라 거절하고 싶지만, 하일즈와는 단순히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약혼까지 한 친밀해야할 사이.
가뜩이나 자신과 하일즈를 지켜주겠다고 기레스에게 몸까지 바친 티나 앞에서 이 정도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꽤나 미묘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티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니, 그건 또 그것대로 기레스와 티나가 대놓고 꽁냥거리는 것을 지원해주는 모양새라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꽉꽉 막혀버리는 클로에였다.
"하일즈 오빠도 좋아할 거고, 나는 나대로 언니가 하일즈 오빠의 시선을 잡아두고 있을 때, 기레스 오빠랑 몰래 즐길 수 있어서 좋으니까.. 완전 남는 장사잖아."
"으응.. 그런가..? 하지만 들킬 위험도 있고.. 그냥 조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거잖아. 나 혼자서 몰래 장난쳐도 지금까지 들킨 적 없는데 언니가 도와주기만 하면 절대로 들킬 리 없어. 옛날에 오빠한테 몰래 조교당할 때도 한번도 들키지 않았는 걸?"
'으으..'
티나의 입에서 기레스의 조교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속이 달싹거리는 클로에였다.
'하아...'
어떻게 거절할까 클로에는 두뇌를 풀가동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렇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답정너로 밀어부치는 티나의 행동력에 둘러댈 허울 좋은 변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니, 이런 말까지 하긴 뭣하지만, 나는 하일즈 오빠랑 언니 지켜주겠다고 몸까지 팔아줬잖아. 내가 언니한테 '기레스 오빠한테' 범해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하일즈 오빠 시선 좀 돌려달라고 하는 이정도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냐? 응? 제발.. 언니.."
평소 그렇게 도도했던 티나가 맞나 싶을 정도로 티나는 간절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클로에한테 매달리듯 애원했다.
'으으.....! 기레스. 바보! 너무 조교해 버렸잖아!'
아무리 애무에 도가 튼 기레스라지만, 도대체 어떻게 조교해야 남자의 고백을 잔혹하게 짓밟는 것으로 유명한 저 티나가 이렇게까지 애원하는지 클로에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클로에는 이보다 더 깊을 수 있을까 싶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아... 알았어..."
도저히 티나의 의심을 사지 않고 좋게좋게 거절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던 클로에는밤을 새고 일어났을 때보다 더 수척해진 퀭한 얼굴로 티나의 요구를 받아주었다.
"정말!? 고마워 언니!"
그런 클로에의 승낙에 티나는 기쁨에 방방 날뛰면서 클로에를 끌어 안았다.
'스읍.. 아흐읏..!'
아직도 몸을 씻지 않은 티나의 싱그러운 몸에선 기레스의 잔향이 남아 클로에의 몸을 흥분으로 흠칫 떨리게 만들었다.
'하아아...... 기레스! 이 바보!'
그렇게 느글거리는 속의 울분을 기레스에게 떠넘겨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다 돌려받겠다고 다짐하면서 클로에는 죽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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