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티나(95)
* * *
"이쪽이야. 언니."
아직 잠을 청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자신의 방으로 가보자는 티나의 권유에 클로에는 2층으로 올라갔다.
"티나, 너무 클로에 곤란하게 하지 말고.. 클로에도 잘 자."
"응. 하일즈 너도."
"그, 그리고.."
"응?"
"혹시 심심하거나 하면 언제든 내 방에 와도 되니까.."
"어... 생각은 해둘게."
'흐응..'
속마음을 몰랐을 때라면 그냥 넘어갔을 아주 짧은 클로에의 망설임이 지금의 티나에게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와닿는다.
'어지간히도 가기 싫은 모양이네..'
"오빠. 잘 자."
"그래."
서로 인사하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티나를 보면서 클로에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티나의 방은 처음 들어가 보는 것 같네. 어렸을 적에는 한번 들어가 봤었나?'
이렇게 집에서 노는 것도 그리 흔하지는 않았지만, 보통 집에 오면 중심인 하일즈의 방에서만 놀았던 추억을 떠올리며 클로에는 기레스의 방문에 눈을 흘겼다.
'그리고 이게.. 기레스의 방...'
이러니 저러니 기레스와 질펀하게 즐기기는 했어도, 기본 클로에와 기레스의 관계는 비밀중의 비밀인지라, 만나는 것에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기껏해야 구교사에서, 오두막에서, 그것도 아니면 학교에서 몰래 만나기나 했지, 당연히 기레스의 방에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클로에다.
하일즈에게 초대를 받은 그 순간부터, 기레스의 방에 몰래 들어가 밤새 앙앙대며 즐길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클로에는 기레스의 방문 앞을 지나치자,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언니! 뭐해?"
"아.. 응. 가고 있어."
"어서 와."
'깔끔하네.'
사무적이라고 해야할까? 정리정돈은 되어 있다지만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방과 달리, 여성스럽고 귀엽게 치장된 티나의 방을 보고 클로에는 내심 은근히 감탄했다.
"잠은 침대에서 같이 자도 되겠지?"
여자 둘은 물론이거니와 남자와 뒹굴러도 여유로워 보이는 침대의 크기를 보고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레스의 침대도 이정도 크기려나?'
정말이지 오랜만에 침대에서 기레스에게 안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던 클로에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냐.. 그보다..'
클로에는 식사시간에 티나가 자신에게 보여준 야릇한 장난을 떠올렸다.
그런 치태를 보여주었으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티나는 속편하게도 침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넓은 침대에 배개를 하나 더 꺼내 얹는 티나를 보자, 클로에의 속이 뭉글거린다.
'기레스의 침대든.... 티나의 침대든.... 둘이서...'
기레스는 이따금씩 티나의 조교가 순조롭다고 자신에게 보고해 왔다.
'집 안에서... 조교...'
그때는 다소나마 속이 불편했어도 그냥 조교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성적인 조교라니.. 이 얼마나 음탕한 단어인가. 한번 두번 곱씹어 생각해 보면 볼수록 클로에의 머릿 속에는 떠올리기 싫은 끈적한 남녀 간의 정사가 눈앞에 생생히 떠올라 버린다.
이부자리를 정리한답시고 엉덩이를 쭉 빼내 이불을 펴대는 티나의 조각같이 예쁜 몸매에 클로에의 시선에 질투의 색이 서려 버린다.
"저기.. 티나? 아까 식사할 때 말인데.."
"식사할 때라니?"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티나를 보는 클로에의 눈이 동그래진다.
'응? 혹시 내가 잘못 본 걸까..? 사실 정말 숟가락을 흘려서 주운거라던가..'
"그.. 숟가락을 흘렸을 때 말야.."
"아... 들켰어?"
티나는 실수라도 했다는 것처럼 귀엽게 입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응? 들켰다니 무슨 소릴..'
"언니한테는 안보이는 각도가 아닌가 싶었는데 들켜 버렸나 보네. 뭐, 언니라면 들켜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본거지? '내가 오빠를 애무하는 거.'"
티나는 요망함이 듬뿍 담긴 게슴츠레한 눈으로 클로에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 무슨..!"
감정을 드러낸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감정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당황하는 클로에를 보면서 티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라? 그게 신경 쓰여서 물어본 거 아니었어?"
"아니.. 기, 기레스를 애무하다니.. 티나.. 너 기레스한테 능욕... 당하던 거 아니었어?"
"맞아. 언니랑 하일즈 오빠를 지키려고 능욕 당했지. 아..."
어딘지 황홀한 표정으로 수긍하는 티나의 모습에 클로에는 부아가 미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능욕을 당했는데 무, 무슨 애무야.."
"아... 언니는 기레스 오빠한테 능욕을 안 당해봐서 모르나 보네?"
"으..응?"
"하긴.. 언니가 아는 기레스 오빠라고 해봐야. 단련이나 같이 해주는 못난이일 뿐일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마치 기레스와 클로에의 비밀스러운 관계 따위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티나는 신을 내면서 입을 털었다.
티나가 나불대는 소리에 클로에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하일즈를 배신하고 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수도 없이 질펀하게 몸을 뒤섞었다고' 어찌 고백할 수 있으랴.
하일즈와의 파국은 곧 기레스와의 파국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고백할 수도 없지만, 상대가 자신을 지킨답시고 몸까지 판 티나라면 더더욱 따질 수 없는 게 클로에의 입장이었다.
"사실 말야. 오빠는 애무를 정말로 잘하거든?"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이야기 하는 것처럼 티나는 클로에에게 넌지시 고백해 왔다.
티나에게 들을 필요도 없이 이미 몸에 진리처럼 새겨져 있었음에도 클로에는 백치처럼 티나의 말에 반문했다.
"잘해..?"
"응. 사실 처음에 당할 때는 정말로 불쾌했어. 하일즈 오빠를 배신하고 클로에 언니를 협박하질 않나. 아무리 내가 언니 대신 받겠다고 했다지만, 동생을 능욕하겠다고 음흉하게 나서질 않나.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역겨운거야.."
"그런데... 왜.."
"기분이... 너무 좋았거든♥"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요염한 티나의 말투에 클로에의 가슴이 철렁 주저 앉는다.
"언니는 오빠한테 '딱 한번' 당해봐서 잘 모를 수도 있겠다. 나도 처음에 당할 때는 역겨웠으니까.."
톡 건드리면 산산조각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클로에의 필사적인 무표정을 간식 삼아 티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말야. 그렇게 역겹다고 생각하려 하는데도, 오빠가 만지고 물고 빨아주면 어째선지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거야."
'으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레스에게 푹 빠져, 하일즈마저 배신한 클로에가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 모를 리가 없다.
"언니는 모르겠지만.. 마치 전신이 성감대가 된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너무 느껴서 말야. 처음에는 내가 변태인줄 알았다니까?"
'변태는 맞지만, 언니한테 육변기 이야기까지 해줄 필욘 없겠지..'
소피아는 몰라도 클로에에게까지 육변기 역할을 빼앗기기는 싫다고 티나는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오빠랑은 내기도 하고 있겠다, 꼴에 지기는 싫어서 기분 나쁜 척 하기는 했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나중에는 싫어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 버릴 정도로 몰두해 버렸어."
'......'
"세, 섹스도 한 거야?"
"응.. 방금 내기 했다고 했잖아? 내기를 지면 오빠한테 섹스 당하기로 약속 했거든."
뭘 했고 뭘 당했는지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은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썰임에도 듣는 클로에는 질투와 더불어 절로 몸이 달아올라 버린다.
기레스와 내기를 해서 져버리면 섹스를 당하게 된다니... 그 과정 속에서 기레스에게 티나가 얼마나 정신없이 휘둘렸을지를 상상하면 그것만으로도 부러움에 음부가 푹푹히 젖어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일즈 오빠가 말하는 거 보니까 언니는 아직 하일즈 오빠랑 아직인 모양인데.."
"이 이야기에 하일즈는 관계 없잖아?"
"그렇게 말하지만, 언니 이미 기레스 오빠한테는 한번 따먹혔잖아. 하일즈 오빠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한번 정도는 대주는 게 어때?"
"으... 읏....."
천박하기 짝이 없는 티나의 질책에도 클로에는 대답도 못하고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기레스에게 최소 한번은 안겼으면서 남자친구이자, 약혼자, 결혼이 약속된 하일즈에게는 못하겠다고 티나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 그래서? 아직도 능욕을 당하고 있는거야?"
"아니, 능욕은 끝났어."
"그럼 왜.."
이유야 듣지 않아도 다 알면서도 어떻게든 티나의 폭주를 멈추고 싶은 클로에는 물을 수 밖에 없다.
"언니는 안 당해봐서 모르겠지만.. 오빠한테 안긴 다음에 방치되면 진짜 미쳐 버릴 것 같거든? '발정나서 말야.'"
'읏..'
"쾌락은 못 잊겠고, 안달이 나버려서... 하루에도 매일 같이 몇번이고 집에서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당했던 능욕이 떠올라 발정나 버리는 기분을 언니가 어떻게 알겠어?"
'알지... 그거..'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와중에도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클로에였다.
"그래서 도저히 못 참고, 얼마 전에 오빠한테 범해달라고 부탁했어."
"범....해달라니.. 티나... 넌 동생이잖아. 기레스한테 그런 짓을 당해도 괜찮은 거야?"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오빠는 양자라서 오빠랑 난 피 한방울 안 섞인 남남이거든?"
언젠가 기레스에게 들은 적이 있었던 이야기에 클로에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난 기레스랑 계속 만나기 위해서 하일즈랑 결혼까지 해야 되는데 티나는....'
지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기레스와 결혼까지도 가능하다는 현실에 클로에는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합법 동생이라니... 치사해!'
"아.. 하일즈 오빠한테는 비밀이야? 피가 이어진 건 아니라고 해도 가족이 들어서 좋은 일은 아니니까.."
"그러면서.. 나한테는.. 왜 말한 거야..? 아까도 굳이 내 앞에서 그런 짓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
"언니는 내가 기레스 오빠한테 능욕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가족한테는 들키면 안되지만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언니한테는 들켜도 상관 없으니까.. 오빠도 놀려볼 겸 장난쳐 본거야. 오빠 필사적으로 참는 거 귀엽지 않았어?"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티나의 말에 동조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클로에는 도저히 동조해 줄 수가 없었다.
저 혼자 멋대로 간접적인 질투심을 느꼈던 소피아때와는 그야말로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클로에는 속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언니..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이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특유의 무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험악한 표정이라 클로에는 당황하면서 표정을 고치려 들었다.
"어? 으..."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 지, 알 수가 없는 클로에였다.
"언니는 하일즈 오빠를 좋아하니까 들켜도 딱히 화날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혹시.. 날 걱정해서 화난거야?"
그렇게 클로에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척 살살 약올리는 티나의 말에 클로에는 화를 낼 수도, 따질 수도, 설득할 수도 없어 체한 것처럼 속이 꽉 막혀 버렸다.
"내가... 좋아서 오빠한테 그렇게 하고 있는거니까, 괜히 기레스 오빠한테 뭐라고 따지지 말아줘."
'시.....발...'
매사 침착하고, 이성적이라 평생 욕이라고는 입에 담아본 적이 없는 클로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욕이 끓어 오르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궁금한 건 다 풀렸지? 음.. 저기 언니.."
살짝 눈치를 보면서 티나는 클로에를 불렀다.
"왜...?"
'훗.. 표정좀 보라지?'
그 예쁜 얼음조각 같았던 클로에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나름 표정을 수습했다고 클로에 본인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지만 굳이 거기까지 지적해줄 마음은 전혀 없는 티나였다.
"저.. 아직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잖아? 나는 이따가 기레스 오빠랑 교대도 해야되고.."
"그래서..?"
"그래서 지금 기레스 오빠를 미리 만나러 갈까 하거든?"
".............................."
지금 만나러 가서 둘이서 무엇을 할 지는 티나의 새하얀 얼굴에 깃든 홍조를 보면 물을 필요도 없다.
"기껏 방에 초대해놓고는 언니만 방에 두고 가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한데.. 이제 언니도 사정은 알았을테니까.."
여동생이 오빠랑 떡치러 갈 거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들으면서도 클로에는 뭐라 대꾸할 수가 없다.
".........."
"난, 오빠랑 교대해서 셀린도 봐야하고 좀 늦을거니까.. 먼저 자도 좋아. 아.. 심심하면 하일즈 오빠 방에서 놀다와도 좋고.."
티나는 하나하나 좆같은 말만 골라서 하는데 반박다운 반박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통에 클로에의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 넝마짝이 된 지가 오래였다.
"그럼.. 다녀올게♥"
그런 클로에를 향해 기대로 가득 찬 음탕한 미소를 선보인 티나는 신이 나 죽겠다는 듯한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방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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