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 티나(94)
* * *
'오늘은 클로에와 오랜만에 즐길 수 있으려나..'
최근 리움 사관학교의 시험이 다가왔느니, 수행이니, 젤가에게 특훈을 받느니 이런 저런 일들로 클로에한테 애무를 받기는커녕 만나는 것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하일즈는 간만에 찾아온 기회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슬슬 기레스 놈이 교대하러 올 시간이니까.. 이야기를 해둬야겠지.'
"푸으으.."
하일즈는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셀린을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곤 클로에를 불렀다.
"저.. 클로에."
하일즈의 부름에도 클로에는 뭘 생각하는지 멍하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잠든 셀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클로에, 어린애를 좋아하나?'
아이라면 자신이 얼마든지 임신시켜 줄 수 있을텐데 라고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김칫국을 마시면서 하일즈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클로에 사이에서 잠들어 있는 셀린을 보니, 마치 신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되어버린 하일즈는 클로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다시금 클로에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
"클로에?"
"어? 어.. 무슨 일이야?"
"이제 곧 형이 교대를 하러 올거라서.."
'기레스가..'
티나의 일로 머리가 곤죽이 되버린 클로에는 기레스의 이름을 듣자마자 무슨 표정을 지어야 될지를 몰라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머리 속에 클로에와의 음희로 가득 찬 하일즈에게 클로에의 울긋불긋한 기운이 서린 오묘한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말인데, 아직 이르긴 하지만 곧 자야하기도 하고.. 내 방에서 오랜만에 한번 할래?"
가뜩이나 뒤숭숭해 미칠 것만 같았는데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하일즈의 소름끼치는 손길이 떠오르자, 등골이 오싹해진 클로에의 얼굴은 삽시간에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같이.. 자겠다는 거야?"
"앞으로 며칠 간, 우리 집에서 동거하기로 했잖아? 약혼한 사이기도 하고, 각방을 쓰는 모습을 형이나 티나한테 보이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을까?"
그냥 사귀는 사이라면 몰라도, 클로에와 하일즈는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약혼한 사이, 하일즈의 말이 아주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클로에였다.
"이럴 속셈으로 날 부른 거야?"
살짝 냉랭하게 정색하는 클로에의 말투에 하일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철렁거리는 건 철렁거리는거고, 한껏 발정나 불이 붙어버린 성욕은 성욕.
약혼한 사이라는 보증에 발정까지 나 성욕을 주체하기 힘든 지금, 하일즈도 순순히 물러날 리 만무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둘이서 만나는 거.. 정말 오랜만이라 속셈이 없었던 건 아닌데 이럴 속셈'만' 있었던 건 정말로 아니야. 어머니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미리 신혼 기분도 내면서 추억도 만들어 보고, 겸사겸사 덤으로 즐기기도 해보려고 했던거지."
제 딴에는 사랑을 속삭인답시고 한 말이었지만 하일즈의 신혼 기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더욱 팍 식어버리는 클로에였다.
"약혼까지 한 사이인데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니잖아.."
기분이 팍 식어 버린 것과는 별론으로 애원해오는 하일즈의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아예 성행위에 경험이 없어서 저항감이 높다면 모를까, 이미 하일즈와 클로에는 섹스만 빼면 나름 다양한 체위를 겪은지 오래된 사이다.
부모님은 자리를 비운 집에서, 마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경국지색인 약혼자 클로에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고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럴 바람이 드는 건 남자친구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도리어 여기서 클로에를 요구하지 않으면 사랑을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지라, 클로에도 평소처럼 칼같이 하일즈의 권유를 잘라내기 힘들었다.
'으...'
하지만 클로에는 정말로 지금만큼은 하일즈의 애무를 받고 싶지 않았다.
티나의 일로 마음은 곪아 문드러지고 있는데, 기레스에게 위로받기는커녕 음흉한 하일즈의 혈관을 꽉꽉 막아버리는 듯한 소름 돋는 애무를 받아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기레스도 티나도 이제 다 컸는데, 합방하게 되면 다 알 거 아냐.."
"형이야 여자 경험이라고는 전무할테고, 티나도 아직도 남자를 사귀어 본 경험이 없다던데... 그리고 설사 안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잖아?"
내막을 알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하일즈의 착각에 클로에는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사귀어 본 경험이 없기는..'
요리하는 하일즈 몰래 자신의 눈앞에서 요망한 치태를 선보였던 티나의 모습을 떠올린 클로에는 부들거리면서 하일즈에게 살짝 목소리를 높히며 말했다.
"내가 창피하단말야!"
드물게 초조한 감정을 드러내는 클로에의 톡 튀는 신선한 반응에 하일즈는 눈을 껌벅이면서 놀랐다.
'클로에도 이렇게 당황하기도 하는구나..'
매사 차갑고 냉정하기만 했던 클로에의 창피한 나머지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라니 또 하나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 끝까지 기어 오른 하일즈였다.
"아무리 가족이어서 알아도 상관 없다고 해도, 성행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무슨 기분이겠어?"
'듣고보니.. 그렇긴 하지? 내가 알 거 다 안다고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섹스하는 걸 직접 보면 느낌이 다르긴 할테니.. 하지만 모처럼 동거하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클로에와 같이 자는 걸 포기하기는 힘든 하일즈였다.
"그래도 클로에, 어차피 잘 곳이 없잖아. 이렇게 잠시나마 같이 살게 되었는데, 부모님 침실에 너 혼자 밀어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형이나 티나나 나는 각방을 쓰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내 방에서.. 음.."
셀린의 방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괜한 말다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하일즈는 입을 다물었다.
곧 기레스와 티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티나...'
의식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클로에는 기레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들어오는 티나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응? 교대할 사람은 형인데 티나 넌 왜 따라왔어?"
"이제 곧 자야 할 시간이라 언니 얼굴이나 보고 인사하려고 따라와 봤지."
실실 미소를 머금고 클로에를 바라보는 티나의 얼굴에는 하일즈는 알아차리지 못할 묘한 요망함이 서려 있었다.
지금까지 티나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소악마 같은 매력은 클로에의 속을 꼬챙이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자극해 버린다.
"그런데 둘이서 무슨 이야길 그렇게 하고 있었어? 밖에까지 뭐라 들리는 거 같던데.."
"아... 클로에가 어디서 잘 지..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는데.."
'흐응~'
하일즈의 말 한마디에 곧장 사태를 파악한 티나는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던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본래라면 약혼까지 한 클로에가 어디서 자는지에 대한 건은 이렇게 이야기가 나올 일이 전혀 없는 이야기다.
클로에를 끔찍히도 사랑하는 하일즈가 자신의 방에서 자자고 권하고 약혼자인 클로에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뿐인 것이다.그런데 어딘가에서 왈가왈부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당연히 클로에 쪽에서 쓴소리가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렸으면서도 티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하일즈에게 물었다.
"어..."
'클로에는 나랑 성행위 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여기선 내가 잘 둘러대줘야..'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나랑 같이 자는 건 부끄럽다고 클로에가 말해와서 말이지."
기레스나 티나도 익히 알고있는 클로에의 고지식한 성격을 이용해 하일즈는 마치 말만 들으면 클로에가 야한 짓은 커녕 남자와 잠을 자는 것도 부담스럽게 생각해, 혼전순결이라도 원한다는 듯, 보기좋게 포장해 주었다.
당사자인 기레스와 클로에는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티나도 클로에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터라 하일즈의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변명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 촌극 속에서 어느 누구도 내색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 약혼자니까 별 상관 없는 거 아냐?"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했는데, 부담스러워 하더라고.. 아무래도 집에 너나 형이 있으니까 그럴만은 하지만.."
"음.. 그럼, 언니는 내 방에서 자면 되겠다."
"뭐?"
"하일즈 오빠 방에서 자는 건 부끄럽다지만, 그렇다면 기레스 오빠 방에서는 더더욱 무리잖아?"
살살 마음에 못질을 하는 티나의 말에 클로에의 눈썹이 움찔거린다.
"그럼 결국 소거법으로 내 방에서 자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같은 여자니까 부끄러울 일도, 문제될 일도 없을테고.."
"음... 그건 그렇긴 한데.. 클로에는 어떻게 생각해?"
하일즈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말투로 클로에의 눈치를 살폈다.
'하일즈...? 티나...?'
어느 쪽이든 마음이 편하지 않아 클로에는 잠시 끙끙 앓면서 고민했지만, 그래도 몸과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야 마음만 불편한 쪽이 낫지 않겠나 싶은 마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천칭은 자연스럽게 티나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티나한테 할 말도 있으니까..'
따끔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시누이가 될 티나에게 적당한 제지를 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허망된 기대를 품으며 클로에는 하일즈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나의 방에서 자는 걸로 할게."
"후우... 알았어."
누구 들으라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소심한 저항을 하면서 하일즈는 축 늘어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칫... 어쩔 수 없지. 같이 자는 건 결혼하고 나서 실컷 해도 될테니까..'
"그럼 잘 부탁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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