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티나(86)
* * *
"크윽.. 그럴리가..."
[찰싹]
"난 왜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를 모르겠는데.. 엄마나 언니나 그냥 예의 상 기분 좋다고 말해준 거 아냐?"
티나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어깨 위에서 부들거리는 하일즈의 손을 굳이 쳐서 치우면서 말했다.
"그냥 티나랑 하일즈의 안마가 안 맞는 모양이겠지. 기레스보다는 못하지만 하일즈의 안마도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진 않았단다."
소피아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띠면서 하일즈의 마음에 자잘한 못을 박아댔다.
'기레스보다는 못하다고....?'
같은 조건이라면 기레스에게 질리가 없다고, 기레스에게 요령을 받은 이후부터는 당연히 기레스보다 손기술이 위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하일즈는 티나와 소피아의 말에 충격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도 안돼.. 하필이면 저 병신새끼한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자식도 아닌 주제에 유페르 가문을 더럽히는 이물질인 기레스보다 못하다는 사실은 하일즈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엄마나 클로에 언니는 좋아한다니 다행이잖아? 오빠. '나는 빼고' 엄마랑 클로에 언니한테나 자주 해주도록 해."
티나는 슬그머니 안마의 화살을 소피아와 클로에에게 돌려버렸다.
"아니, 티나.. 미안한데 나중에 설욕할 기회를.."
"됐어. 징그럽게 남매 사이에 그렇게까지 안마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
티나의 신랄한 말투에 하일즈는 평소의 산뜻하면서도 쿨한 오빠를 연기하지도 못하고 누가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정을 구겼다.
자신하던 안마는 티나한테 기분 나쁘다는 소리나 듣질 않나, 소피아한테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절대 져서는 안되는 쓰레기만도 못한 기레스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질 않나, 저 잘난 맛에 사는 하일즈로서는 오랜만에 맛보는 치욕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셋이 모이다니 잘됐다. 마침 할 이야기도 있었는데.."
"할 이야기요?"
"응. 사실은 나중에 식사 시간에 이야기 하려 했는데, 며칠 뒤에 엄마랑 아빠가 한동안 자리를 비우게 됐거든."
"한동안?"
소피아의 말에 티나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티나. 뭔가 좋아하는 거 같다?"
"별로 그렇진 않은데요? 근거라도 있어요?"
그렇게 뻔뻔스럽게 잡아 떼면서 티나는 은근슬쩍 소피아에게 물었다.
"한동안이면.. 어느정도나 비우시는데요?"
"음.. 글세.. 빨라도 일주일 정도려나?"
'일주일.....!'
"일주일이라니... 어딜 가시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일주일이라는 기간에 놀란 건 티나 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가정주부에 전념하는 소피아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매우 드물었고, 가끔 비우는 경우도 하루 이틀을 넘기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소피아가 젤가와 함께 일주일이나 집을 비운다는 것은 엄청나게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굴의 토벌 의뢰가 들어왔거든."
"마굴?"
마굴이라면 기레스도 수업시간에 배운 적이 있다.
던전이라고도 불리우며,마물이나 마수들이 서식하는 소굴로, 발생하는 원인과 장소는 불명이지만, 제국은 물론 전 세계 곳곳을 가리지 않고 주기적으로 출몰하는 미궁이다.
가도나 마을에 출몰하는 마물들은 대부분 던전을 통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마물의 토벌로 제공되는 마석은 마법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거나 하는 둥 여러가지 수업을 들은 경험은 있지만, 실제로 던전은커녕 가도에 출몰하거나 한다는 마물조차도 한번 본 적이 없는 기레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뭐야.. 오빠는 그런 것도 몰라?"
기레스의 반문에 티나는 가볍게 핀잔을 주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설명해주려 들었다.
"알아. 그냥 수업에서 들어보기나 했던 일이라 놀라서 물은 것 뿐이야."
'치잇..'
"너희들도 아마 리움사관학교를 합격해서 우리 마을 밖으로 나가보면 마수를 종종 만나게 될 거야."
"마을 밖에선 꽤 흔하게 볼 수 있나보죠?"
"그럼. 원래가 마굴을 소멸시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도 아니고, 보통 마석을 채취하기 위해서 고만고만한 마굴은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마물을 사냥하거나 토벌하는 직업도 따로 존재할 정도인걸."
"그정도인데 우리 마을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은 게 신기하네요."
"우리 마을에도 종종 나타나기는 했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처리했을 뿐이지. 왜 엄마가 가끔 마을의 일을 돕는다고 가끔씩 나갔을 때 있잖아?"
"아...."
기레스나 하일즈는 물론 은근히 소피아를 견제하는 티나마저도 짐작 가는 게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마을의 일이라고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는 소피아지만 이따금씩 일을 돕는다고 나간 일이 가끔씩 있기는 했던 것이다.
"보통은 젤가 선에서 처리하곤 하지만, 젤가가 힘들어 하는 경우에는 나도 일을 거들곤 했으니까.."
'결국 우리 마을에서는 마물의 마짜도 구경하기 힘들었던 건 또 소피아 때문이었던 건가?'
무언가 세간의 상식과 마을의 상식이 다른 게 존재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소피아에게서 이유를 찾는 게 가장 빠르지 않을까? 하고 기레스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경우도 있고 토벌하는 직업도 따로 있다는데 굳이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어머니는 왜 부르는 거죠?"
소피아의 위업으로 가문의 뽕에 취해 버린 하일즈는 방금 전 머리를 싸매고 수치스러워 했던 것도 잊고 물었다.
"보통은 급하게 마굴의 소멸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편이긴 한데, 이번에 나타난 마굴은 4대 도시중 하나인 엘룸의 근처에 나온데다 그 규모가 상당히 큰 모양이라 시급히 소멸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서 나와 젤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나라에서 요청이 왔거든."
'그러고보니.. 일전에 아버지한테 뭔가 보고하러 온 일이 있었더랬는데, 그게 이 일이었나? 으..'
기레스가 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무언가의 일로 따로 젤가를 찾아왔던 마을사람 이든을 떠올리면서 하일즈는 티나를 흘끗 바라보고는 후회로 눈을 질끈 감았다.
괜히 신나서 기레스를 괴롭히자고 권하다가 티나에게 실망을 사게 된 일이 떠오른 까닭이다.
오늘의 일까지 더해, 아직까지도 티나와의 관계는 회복할 기미도 없이 어색한 참이라, 항상 멋진 오빠이고 싶은 하일즈의 마음은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흐음.. 엘룸인가..'
한편 기레스는 낯익은 도시명에 일전, 해변 도시 히벨리에에서 소피아와 음란한 여행을 즐겼던 일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또 뭔 생각을 하면서 쪼개고 있는거람? 저 바보 오빠는... 음? 엘룸? 엘룸... 엄마랑 오빠가 히벨리에로 여행을 갔던 곳이잖아!'
실실거리는 기레스를 은근히 바라보던 티나는 티나대로 기레스의 속내를 정확히 읽어버린 까닭에 절로 속이 타버린다.
'잠깐 혹시 그때도....... 분명 3일만 여행하기로 해놓고, 기레스 오빠의 납치니 뭐니 하면서 일주일도 넘게...'
[으득]
일견 병신처럼 보이는 기레스지만, 능청스럽게 남들에게 둘러대는 것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능숙하다는 것을 티나는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당시의 납치도 꾸며낸 일이었을거라고 확신한 티나는 엊그제 기레스와 소피아의 지독하다 싶은 정사를 여행지에서도 즐겼을거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그렇게 삼인삼색, 제각각의 생각을 품고 있는 와중, 소피아는 살짝 걱정이 된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며칠 간은 남매들끼리 보내야 될 것 같아."
"걱정 마세요.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요 뭐.."
장남 역할이라도 맡은 것마냥, 하일즈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호쾌하게 나서서 소피아에게 말했다.
"셀린도 셋이서 돌봐줘야 되는데 할 수 있겠지?"
"물론이죠... 근데 저희 모두 학교를 가야 되는데 그건 어쩌죠?"
"아 그건.. 평소 봐주시는 보모를 고용해 뒀어."
"평소라니.. 언제 보모를 고용하셨어요?"
보모의 모습을 본 일이 없는 하일즈는 의외라는 듯 소피아에게 물었다.
"응. 원래는 젤가와 내가 번갈아가면서 셀린을 돌봐주곤 했는데, 요즘은 젤가가 하일즈랑 티나를 가르치느라 자리를 비우게 됐잖아? 그러다 보니까 둘 다 자리를 비우는 때가 생겨서 잠시 봐줄 사람이 필요했거든."
'티나와 내가 아버지랑 수행하는 도중에 보모를 고용하신 건가? 그럼 어머니는 그때 집을 비우신다는 이야긴데..'
하일즈는 젤가와 수행하기 전에도 항상 그 시간에는 소피아가 자리를 비웠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냥 아는 지인이나 아줌마나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는데, 보모까지 고용해 가면서 누구를 만나러 가나 보통?'
모성애가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실로 소피아 답지 않은 행동에 의아해 하는 하일즈를 뒤로하고 소피아는 말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요번에도 봐주시기로 해주셔서 학교를 간 동안에 셀린을 보는 건 걱정 안해도 될 거야. 다만 밤에는 너희들이 셀린을 봐줘야 된단다. 뭐 셀린은 애답지 않게 얌전해서 크게 손이 갈 일은 없겠지만.."
"맡겨만 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