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86화 (186/238)

〈 186화 〉 티나(78)

* * *

"티나, 하일즈. 이번 주말에는 합숙을 하도록 하자."

"네? 합숙이라뇨..."

오늘은 또 어떻게 기레스를 물고 빨며 조교할까 머리가 꽃밭으로 가득했던 티나의 흐물거리던 표정은 젤가의 거슬리기 짝이 없는 일방적인 통보에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너희들은 정말 소피아한테 고마워 해야 돼."

'왜 또 여기서 엄마의 이름이..'

"엄마가 왜요?"

합숙이라는 말에 꿍해있는 티나와 달리, 하일즈는 기대심에 반짝이는 눈으로 젤가에게 물었다.

"너희들의 장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소피아가 이제 리움사관학교의 시험도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나보고 아버지로서 좀 더 노력해주면 어떻겠냐고 부탁해 오더라. 합숙이라는 아이디어도 소피아가 내준거야."

[으득]

'엄마가 나를...!'

소피아를 추켜 올리는 젤가의 말에 티나는 이를 갈며 분개했고, 하일즈는 어머니라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기대해주는 소피아에게 감동했다.

'역시 엄마도 가문을 빛낼 사람은 나뿐이라고 챙겨주시는 건가?'

"저... 아빠... 합숙이면 집에는 못 가는 거에요?"

"그야 그렇지. 오두막에서 할까, 아니면 마을 밖의 집을 빌릴까 고민중에 있지만.."

'시발... 아빠나 소개해 줬으면 됐지. 뭘 또 합숙까지...'

강직하지만 온화한 소피아 답다면 다웠지만, 티나는 정말로 쓸데 없는 오지랖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2박 3일 동안, 합격에 자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실력을 끌어 올려 줄테니까.. 각오들 하고 있어."

'!? 1박2일조차도 아니야?'

그래도 하루정도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겠지 싶었던 티나는 젤가의 말에 표정관리도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절망해 버렸다.

"티나, 요새 리움사관학교 때문에 꽤나 불안해 하는 모양이던데, 이번 합숙이 끝나면 그런 걱정도 많이 사라질거다."

젤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힘내자고 화이팅 했지만 티나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이틀!? 이틀이라니...!'

이제는 하루라도 기레스를 안 빨면 입 안에 가시가 돋을 것 같은데, 하루도 아니고 이틀이라니.. 속이 답답하고 느글거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 리움사관학교에 가고 싶다는 핑계를 너무 남발해댄 까닭에, 티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티나의 생각을 알 길이 전혀 없는 하일즈는 속으로 야심찬 다짐을 하고 있었다.

'기레스 새끼를 불구로 만들자는 것을 거절당한 뒤로 티나와 뭔가 서먹했는데 잘됐어. 이번 기회에 합숙으로 다시 티나와 우애를 다지도록 노력해 봐야지.'

"나도 많이 도와줄테니까, 열심히 하자. 티나."

제딴에는 힘을 북돋아 준 멋진 오빠를 그린 하일즈지만, 하일즈의 겉만 번지르르한 말 따위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은 티나였다.

"아우으..."

'하여간 사사껀껀 사사껀껀...!'

뭔가 소피아도 젤가도 하일즈도 다들 합심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느끼면서 티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에 거품을 내었다.

'한창 좋을 때였는데..'

어젯 밤에는 첫 수면제 섹스도 떼었겠다. 기레스의 잠꼬대 조교도 점점 박차를 가하고 있겠다, 물이 오를대로 올라 하루하루가 충실하기 짝이 없었는데 합숙 이야기 하나로 티나의 달콤하게 들떴던 마음은 착 가라앉아 버렸다.

'후우... 참자... 참아.. 화내봐야 나만 손해야..'

머리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티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가라앉히려 들었다. 그런다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가라앉을 속마음이 아니었지만, 티나는 차분하게 자신을 설득하려 들었다.

'어차피 바보 오빠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참을 수 있어..'

"후우... 하아..."

'거기다, 언니가 지명권까지 줄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도 진지하게 리움사관학교를 노리긴 해야 되기도 하니까.. 여기서 열심히 노력해 두는 건 딱히 손해라고만 생각할 건 아냐...'

클로에는 자타공인 명실상부한 수석후보, 기레스 혼자 리움사관학교를 준비한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입학하지 못하겠지만, 클로에가 지명권을 제공해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요새 소피아에게 특훈을 받고 있는 기레스를 생각하면, 과락을 면해 지명권으로 리움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마냥 허망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언니랑 그 바보만 리움사관학교에 가는 꼬라지를 볼 수는 없지. 나도 안정권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언니의 말마따나 절대라는 건 없으니까..'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쳐대면서 티나는 늘씬하게 잘 빠진 몸에 거품을 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오빠랑 같이 씻었던가...'

어찌나 거품을 잘 이용하는지, 혼이 빠져버릴 것만 같았던 애무를 떠올리면서 티나는 슬쩍 자신의 매끈 말랑거리는 몸을 주물 거렸다.

제딴에는 기레스의 음탕한 손놀림을 떠올리면서 자위해 본 것이었지만, 역시 타인이, 그것도 기레스가 만졌던 것과 자신이 만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맛이 달랐다.

"이게... 아냐..."

뭔가 허무함을 느낀 티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역시 한시라도 빨리 오빠 놈을 조교해서 나한테 빠지게 만들지 않으면...!'

"어?"

샤워를 하고 욕실 밖으로 나온 티나는 부엌쪽에서 무언가의 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간에 부엌이면 엄마 밖에 없겠지?'

젤가에게 합숙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연신 불만이었던 티나의 머릿 속에는 보상심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수면제나 가져다 주면서 오빠놈이나 놀려볼까?'

또 자신에게 당황하는 기레스를 상상하니 뭔가 기분이 달래진 티나는 부엌에 얼굴을 비추었다.

"아, 티나!"

아니나 다를까, 부엌에선 소피아가 요리를 통에 담아내고 있었다.

"엄마, 뭐하고 계세요?"

"응, 내일 아침 요리를 미리 재워두려고 준비하고 있었지."

"네에... 그런데 엄마. 아빠한테 합숙을 해달라고 권했어요?"

"아.. 들었어? 헤헤.."

쑥쓰럽다는 듯 헤실거리면서 좋아라 하는 소피아를 보자, 티나는 겨우 가라앉혔던 불씨에 마른 장작이 끼얹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아무래도 티나한테는 너무 야박하게 대한 것 같아서 말야.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걸 해주자고 생각했지. 어때? 마음에 들었어?"

'참자.. 참기로 했잖아.. 이후에 오빠놈을 빠는거나 생각하자..'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촌철살인을 해대는 소피아의 말에 티나는 기레스를 떠올리면서 필사적으로 화를 억눌렀다.

"네... 근데 이제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 엄마가 절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았으니까..."

제발 좀 쓸데없는 오지랖 좀 그만 부리라고 티나는 속으로만 웅얼댔다.

"그래도.."

"괜찮다니까요."

살짝 짜증이 섞인 티나의 어투에 소피아는 능글능글한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그래? 그나저나 티나 여긴 무슨 일로..?"

"아.. 오랜만에 수면제를 좀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오빠가 아직 수면제를 가져가지 않았으면 수면제도 전해주고요.."

"수, 수면제...?"

티나의 말에 소피아는 난처하다는 듯 고운 얼굴을 찡그리며 우물쭈물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라? 왜 저렇게 당황하시지?'

"티, 티나.. 저기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미안해 죽겠다는 듯, 눈치를 보는 소피아의 표정을 본 티나는 몇번이나 겪은 듯한 데쟈뷰 같은 불안한 마음에 속이 뜨끔 거렸다.

'아니 잠깐... 설마... 아닐거야..'

"티나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전에 말했듯이 이 수면의 비약은 원래 기레스를 위해 준비한 거잖아?"

"네, 네.... 그런데요...?"

소피아의 다음 말이 튀어나오는 게 무서워서 소름은 소름대로 끼치고, 티나는 금방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사실, 이제 수면의 비약이 얼마.. 안 남았거든..? 그래서 말인데... 정말 미안하지만 남은 수면의 비약은 기레스에게 양보를 좀 해주면 안될까?"

"아........"

소피아의 그 말에 티나는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티나의 반응에 소피아는 미안하다는 듯 당황해 하는 척하며 말했다.

"티나 널 차별하거나 하는 건 아냐! 그저, 이건 원래 기레스를 위해 공수해 온 물건이라.."

하지만 그런 소피아의 아무래도 좋은 말은 티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꼭두각시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티나는 죽은 생선 같은 풀린 눈으로 소피아에게 물었다.

"그래도... 아직 수면제가 남아 있기는 한거죠?"

"응.. 조금이지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이건 기레스한테.."

"달라고 안할게요.. 근데 그거 오빠가 며칠이나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으응.. 이번 '주말'쯤이면 끝나려나?"

"아........................."

그 주말이라는 소피아의 말에 티나의 시야는 그야말로 샛노랗게 물들어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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