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84화 (184/238)

〈 184화 〉 티나(76)

* * *

그렇게 하일즈와 티나가 동상이몽 하고 있는 사이, 한 남성이 젤가를 향해 다가왔다.

"젤가 씨 여기 계셨군요."

"음? 이든, 이런 변두리까지 무슨 일로?"

"마을의 일로 찾아 다녔거든요. 잠시 이야기를 좀.."

이든이라고 불리운 마을 사람은 젤가에게 눈치를 주었다.

"따라오게."

젤가와 마을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하일즈는 티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어."

"으응?"

"설마하니 그 병신이 양자였을 줄은.. 티나 너도 놀랐지?"

"응.. 뭐 그렇긴 한데.."

하일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병신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티나는 바늘에 심장이 쿡쿡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아... 시발. 그래도 친형인줄 알고 참았는데, 생판 남이라고 들으니까 참을 수가 없네."

'생판 남...!'

하일즈의 말을 듣고 티나는 배시시 미소를 띄웠다.

생판 남이라는 것을 자신도 아니고, 하일즈의 입에서 공인 받은 티나의 심장은 콩콩, 기분 좋게 두근 거리고 있었다.

"티나도, 그 병신이랑 피가 이어지지 않은 게 기쁜 모양이네."

"응... 정말 기뻐.."

푸근한 미소를 음탕하게 물들이면서 티나는 하일즈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그 새끼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라니?"

"티나, 너는 모르나본데, 사실 그 병신새끼 지 주제도 모르고 리움사관학교에 지원하려고 하더라고?"

"그런데?"

이미 옛적부터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티나는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그런 병신새끼가 리움 사관학교에 지원해서 우리 집안 망신이란 망신을 다 주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

'.......'

연신 기레스를 병신 취급 해대면서 입을 나불거리는 하일즈를 보는 티나의 마음은 어째선지 너무나도 불편했다.

'병신이라 불러도 내가 불러야 되는데...'

이상한 독점욕을 부리면서 티나는 답답한 마음에 하일즈에게 쏘아 붙히듯 말했다.

"어차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잖아? 엄마도 있고,"

소피아를 핑계로 은근히 하일즈를 설득하려 드는 티나의 말에 하일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티나, 네가 도와주면 몇번 정도는 은근히 그 병신을 괴롭혀 줄 수 있을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빠도 말했잖아. 그... ㅂ.. 기레스 오빠가 양자라는 걸 말해주긴 했지만, 괴롭히거나 하지는 말라고."

"아냐, 티나. 아버지는 분명히 '티나거나 대놓고'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어. 사실상 걸리지만 않으면 괴롭혀도 좋다고 언질을 주신거지."

티나는 예쁜 눈을 위로 굴리며 방금 전, 젤가가 한 말을 떠올렸다.

'하일즈 오빠 못지 않게, 기레스 오빠를 싫어하는 아빠니까...'

그 때는 기레스가 유페르 가문의 양자라는 말에 정신이 나가버려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하일즈의 말처럼 몰래 괴롭히라고 돌려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음.... 그래도, 굳이 이제와서 기..레스 오빠를 괴롭힐 필요가 있어? 은근히 골려줬다가 엄마한테 고자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못 참겠어.. 그 새끼 때문에 난, 어머니의 신용을 전부 잃었고, 우리 같은 친자식이라면 몰라, 그런 굴러 들어온 생판 남인 병신새끼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게 용납이 되겠어?"

하일즈의 말에 티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생각했다.

'확실히 엄마의 사랑을 받는 건 좀 좆같긴 해. 그 바보 오빠는 나나 바라보고 있으면 되는데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티나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했다고 생각했는지 하일즈는 은근히 설득하는 어투로 티나에게 속삭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티나?"

속삭여 오는 하일즈의 목소리에 흠칫, 거리를 벌리면서 티나는 사납게 눈을 찢으며 생각했다.

'뭔가... 찌질해...'

콩깍지가 씌일대로 씌였던 과거, 아직 어렸던 티나는 하일즈가 기레스를 괴롭히는 게 너무나도 재밌고, 멋있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기레스에게 한껏 개발되어 콩깍지가 벗겨지다 못해 뒤집어진 지금, 고작해야 질투심 따위로 기레스를 괴롭히고 싶다고 자신에게 고백해 오는 하일즈가 어찌나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기레스를 떠올리면서 뜨뜻하게 데워진 마음이 삽시간에 차갑게 식어 버린 티나였다.

"나도 그 바보 오빠가 좋은 건 아닌....데, 이제와서 어쩔 수도 없잖아. 오빠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굳이 좀 질투난다고, 엄마한테 의심까지 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괴롭힐 필요가 있어?"

차근차근 티나는 기레스를 괴롭히지 말아야 할 이유를 조곤조곤 하일즈에게 따지고 들면서 기레스를 괴롭히지 말자고 설득했다.

그러면서 티나는 자신의 행동을 흐뭇해하면서 속으로 자화자찬 했다.

'흐흥~ 하여간 나만한 여동생, 아니 '의붓!' 동생도 없다니까...'

기레스는 자신을 오해한 나머지 속좁게도 정색하며 무시해대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기레스를 지켜주는 기특한 의붓동생이라는 생각에 티나는 저 혼자 우쭐거리며 헤실거렸다.

"그래서, 많이 괴롭힐 생각은 아니야."

'도대체 왜이리 집요한 거야..?'

많이는 아니어도 괴롭히긴 할 거라는 하일즈의 집요한 고집에 티나는 슬슬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한 두번 정도... 실수인 척, 은근히 괴롭히면서 불구를 만들어 주려고.."

"뭐....?"

비열한 미소를 띠는 하일즈의 입에서 튀어나온 잔혹한 말에 티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나름대로 난 어머니한테 잘 보여왔잖아? 아마, 어머니라도 지금이라면 한 두번 정도는 기레스한테 실수해도 넘어가 주실거거든? 그걸 이용해서 실수하는 척 하면서 말 그대로 반병신을 만들어 주자는거지."

본래라면 좋다고 깔깔대며 같이 괴롭힐 궁리를 했어야 할 티나는, 기레스를 불구로 만들겠다는 하일즈의 간악하기 짝이 없는 말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원래.. 오빠가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 이전에도 저렇긴 했지만...'

하일즈의 행동은 이전과 변함이 없었지만, 티나의 안에선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여왔던 하일즈에 대한 환상이 산산히 갈려나가고 있었다.

"티나, 너도 요즘 그 병신이 설쳐대는 거 마음에 안 들거 아냐?"

하일즈의 말을 들은 티나는 약점을 잡고, 주인이라는 입장을 이용해서 자신을 마음껏 능욕하던 기레스를 떠올렸다.

가진 건 하나 없는지라 열등감은 폴폴 풍겨대는 주제에, 약점 하나 잡았다고 기세등등해져서는 자신의 몸을 탐하며 천둥벌거숭이마냥 '설쳐댔던' 기레스의 모습은 다시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귀엽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변태성이 한껏 개화해버린 티나에겐 어찌나 즐거운 추억이었는지, 하일즈의 말에 창백하게 질린 와중에도 몸은 멋대로 달아오르고, 얼어붙어 멈춘 것처럼 차갑게 식었던 심장은 다시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활력을 되찾은 티나의 칼날 같이 표독스러운 눈초리는 하일즈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아예 리움사관학교 같은 건 구경도 못하게 병신을 만들어 두면..."

"오빠... 애새끼야?"

"뭐?"

"엄마한테 그렇게 혼나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나도 그... 기레스 오빠가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애도 아니고, 그런 같잖은 질투심 때문에 병신을 만들어 놓자는 게, 지금 이 나이 먹고 할 소리야?"

"티, 티나?"

태어나서 단 한번도 자신의 말에 토를 달아본 적이 없었던 티나의 신랄한 비판에 하일즈는 얼이 빠져 버렸다.

"아니.. 하지만, 그 병신은.. 우리 가족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게 뭐? 엄마는 피가 이어진 가족이 아니면 애정을 주지도 못해야 된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 병신은 우리의 원수고.. 그런 놈이 어머니한테.."

"찌질해.."

"뭐?"

"그럼 아니야? 엄마한테 사랑 받는 기레스 오빠한테 질투해서 불구를 만들겠다는 게?"

"읏... 티나. 너 왜 그 녀석 편을 들고 있는거야?"

"무, 뭐? 이젠 나한테까지 질투하는 거야?"

"아니, 이상하잖아.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 병신새끼를 그렇게 혐오했던 네가 이렇게 나온다는게.."

"지금도 혐... 좋아하는 건.. 아냐.. 하지만 오빠가 그 지랄을 하면 괜히 나한테 불똥이 튈 거 아냐!"

기레스에게 이런 저런 변명질을 했던 경험이 어디 간 게 아니었는지, 티나는 청산유수처럼 하일즈의 말을 받아쳤다.

"어...?"

"지난 번처럼 엄마한테 악의적으로 괴롭힌 거 걸리면 어떻게 할 거야? 만약 걸리면 이번엔 엄마가 가만 두질 않을 걸? 기레스 오빠를 불구로 만들었다는걸 엄마한테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될 지는 생각해 봤어?"

"그거야 걸리지만 않으면.."

"걸리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는데? 예전에는 걸려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기레스 오빠를 괴롭혔어? 아니잖아!"

"읏.."

티나의 신랄한 반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엄마가 한 두번의 실수는 넘어가 줄거라는 생각 자체가 순진해 빠진 거 아냐?"

"으.."

"한 두번? 엄마라면 '별 거 아닌' 실수라면 넘어가 주겠지. 근데 기레스 오빠가 불구가 되어도 그냥 넘어가 줄까? 엄마가 실수라고 용서해 줄 지, 하일즈 오빠랑 내 다리도 분질러 놓을지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아냐고."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여 왔던 불만을 연료로 삼아 티나는 속사포처럼 하일즈를 몰아 부쳤다.

뭔가 기레스를 위해 저 사랑했던 하일즈를 구박한다는 자신의 행위에 심취해 버린 티나는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고 있었다.

'으.. 으으..'

티나의 정론에 하일즈는 말문이 틀어 막혀 버렸다.

다소 허무맹랑해 보이는 의견이어도, 티나라면 자신을 지지해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하일즈의 마음은 그녀의 신랄한 반박에 이미 너덜너덜해진지가 오래였다.

"괴롭히는 게 아니라, 사고 같은 걸로 제대로 위장하면.."

"그러니까 그걸 왜 해야 되냐고? 리움 사관학교를 도전하다 망신을 당하는 게 기레스 오빠지. 우리 집안이야? 어차피 기레스 오빠가 병신인 건 마을 사람 모두가 잘 알고 있는데, 그냥 애새끼처럼 찌질하게 질투나서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거잖아?"

"크윽.."

고백해 온 상대의 상처를 들쑤시고 소금을 뿌려대는 데에는 도가 튼 티나의 팩트폭행에 하일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일즈 오빠면 또 멋대로 움직일지도 모르니까..'

여기선 기레스를 가장 위하는 '의붓'여동생인 자신이 하일즈의 목에 목줄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티나는 신나게 입을 털었다.

"아무튼 할거면 오빠 혼자서 해. 그리고 엄마가 뭔가 눈치챈다 싶으면 난 다 불어버릴거야."

"어, 어째서?"

"그야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면 당연히 오빠랑 내가 공범이라고 엄마가 오해할 거 아냐?"

"나중에 걸리더라도 내가 아니라고 말해주면.."

"하, 퍽이나 엄마가 그걸 믿어 주겠네. 오빠라면 믿어 주겠어? 가증스러운 남매애라고 생각할 것 같지 않아?"

"으...."

확실히 소피아의 입장에서 보면 공범인 티나를 하일즈가 감싸주는 모양새처럼 보일 게 훤했기에, 하일즈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찍소리도 못하고 침울해 하는 하일즈의 표정에 어째선지 기분이 좋아진 티나는 꼴 좋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일즈의 상처를 후벼 팠다.

"오빠, 철 좀 들어. 이제 어린애처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잖아? 납득할 만한 이유도 아니고 이런 애새끼만도 못한 질투 하나에 인생을 걸 정도로 미련한 거야?"

"아니.. 네 말이 맞아. 그 병신이 양자라는 사실에 머리가 어떻게 되었었나봐."

'아...'

꼬리를 내리고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하일즈의 반응에 티나는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조금.. 아쉬운데..'

좀 더 하일즈의 속을 후벼 파고 싶은 마음에 티나가 아쉬워 하고 있는 사이, 멀리서 이야기를 끝마친 젤가와 마을 사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튼 다리가 분질러지고 싶으면 오빠 혼자서 해. 난 그런 도박 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알았어. 티나. 이 오빠가 유치하게 이성을 잃어서 미안해. 정말."

"후우... 알면 됐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하일즈의 말에, 더 따지고 들 수 없어진 티나는 어쩔 수 없이 누그러진 어투로 답하며 생각했다.

'이걸로 그 바보 오빠를 괴롭힐 생각은 못하겠지..?'

기레스를 까대는 하일즈에게 한방 먹여줬겠다, 하일즈의 흉계도 멋지게 막아냈겠다, 역시 기레스에겐 자신 밖에 없다고 혼자 속으로 시시덕대며 티나는 모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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