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83화 (183/238)

〈 183화 〉 티나(75)

* * *

"하아!"

기합과 함께 하일즈는 바람을 찢는 소리를 내는 흉흉한 공격을 젤가에게 휘둘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통이 날아간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지만 젤가는 여유롭게 하일즈의 공격을 받아냈다.

"하아아....."

'지루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티나는 한숨을 쉬며 흥미 없다는 듯 반쯤 죽은 동태 눈으로 둘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저런 게 뭐가 즐거웠던걸까..'

티나는 기레스와 만나기 전, 하일즈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멋지다고 넋을 잃고 좋아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멋있긴 하지만..'

소피아나, 클로에, 그리고 티나가 예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일즈는 호불호의 여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객관적으로 멋있는 미남이었다.

대련을 할 때나, 몸을 움직일 때도 항상 시원시원한 것이 보는 맛이 있을 정도로 멋스러웠지만 지금 하일즈와 젤가의 대련을 지켜보는 티나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멋있기만 하다고 해야 되나..'

이성적으로는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티나의 마음은 미동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왜 이러지.. 난 분명히 오빠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하일즈가 사랑하는 클로에를 지키기 위해, 그 싫어하는 기레스에게 자신의 몸을 팔았을 정도로, 남매사이라지만 티나는 하일즈를 분명히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차마 사랑하고 있다고, 티나는 생각을 잇지 못했다.

머리는 아직도 하일즈는 누구보다도 잘났고, 멋있으며, 사랑스러운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음은 굼벵이처럼 느릿하게 생각을 따라가 주질 않는다.

'그 바보에 대한 걸 방해 받아 실망해서 그런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안 좋은 일이 연거푸 생기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티나는 하일즈에게 잔뜩 방해 받아 실망한 탓에 그런 것이라고 애써 변명해 보았다.

'.......'

그렇게 하일즈를 통해 기레스를 떠올린, 티나의 심장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주책 없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전 날, 기레스의 고혈을 맛있게 빨았던 달콤한 추억을 떠올려 뚱해 있던 표정이 사르륵 풀리는가 하면, 오늘 괜히 하일즈 때문에 클로에와 살을 섞어가며 대련을 할 것을 상상하면 속이 지글지글 끓어올라 울그락불그락 좋았다 말았다 표정관리가 안되는 티나였다.

"후우.."

한차례 젤가와 가볍게 겨루고 돌아온 하일즈는 흘러내린 땀방울을 닦으면서 티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런 하일즈를 보고 티나는 코를 쫑긋 거리며 집중해 보았다. 이미 한번 하일즈의 냄새에 실망한 적은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버린 것이다.

[스읍ㅡ]

'하아...'

한차례 숨을 쉬는 척, 들이켜 봐도, 하일즈의 냄새는 여전히 매가리가 없다.

개변태인 티나의 마음에 와닿는 건 전혀 없어서 티나는 속으로 땀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땠어? 티나?"

"응..? 뭐가?"

"최근 같이 훈련해 본 적 없잖아. 오랜만에 본 내 실력은 어때 보였어?"

"음.. 멋있었어. 오빠."

뭔가 막연하게 멋지다는 느낌으로 지켜보긴 했지만, 중간부터는 기레스와의 달콤한 애무행위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머릿 속에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었던 티나는 하일즈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하하. 그래?"

"아직도 멀었어. 클로에를 이기고 싶다면 더 열심히 해야지. 하일즈 넌 너무 움직임에 과장이 많아."

"알았다고요."

"그럼 이번에는 티나의 실력을 한번 볼까?"

"..... 네.."

뭔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티나는 너털거리며 젤가를 따라갔다.

한동안 대련과 젤가의 특별 강의가 끝나고 가족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휴식을 취했다.

"후우.. 역시 아버지는 강하네요."

클로에와 겨룰 때 이상으로 진지하게 임했지만, 끝끝내 젤가에게 유효한 공격을 하지 못한 하일즈는 젤가의 실력에 만족한 듯 시원하게 말했다.

"흥.. 그래봐야 속으로는 소피아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거야.. 빈말도 못할 정도로 사실이긴 하잖아요."

젤가의 농담을 하일즈는 가볍게 진심과 농담을 섞어서 되받아쳤다.

"쳇.. 기레스 놈 때문에 가장 체면이 말이 아니야. 정말. 너희들도 한때 기레스 녀석 때문에 마음 고생 많았지?"

"좀 분하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저희가 잘못했던 건 사실이고, 엄마도 그 일 때문인지 그녀석을 좋아하는데다.."

'아빠 앞이라고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네.'

하일즈가 기레스를 깔아내리자, 티나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거슬림에 눈섭을 까딱 거리며 불편해 했다.

"가족이니 제가 참아야죠."

"으음.."

"아버지?"

"너희도 이제 클 만큼 컸으니 이야기를 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이야기라뇨?"

"사실, 기레스 그 새끼는 나와 소피아의 친자식이 아니란다."

"!!?"

"!!!?!??!?!"

그 말에 하일즈와 티나는 제각각 다른 이유로 흠칫 놀랐다.

"기레스.. 그 놈이 친자식이 아니라고요?"

"그래. 네가 태어나기 전, 전쟁터에서 주워 온 양자야."

"어쩐지.. 우리 유페르 집안에 그런 병신이 태어났다는 게 이상하다 했어요!"

젤가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들은 하일즈는 전에 없을 정도로 흥분하며 말했다.

'병신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친자식이 아닌, 양자라는 젤가의 말에 흥분한 하일즈가 기레스를 까내리자, 티나는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심장을 꽉 움켜쥐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답답해져 버렸다.

"그런데 왜 그런 병신을 양자로.."

'으그...'

거리낌 없이 기레스를 병신이라 칭하는 말에 티나의 아니꼽다는 듯 하일즈를 바라보던 시선은 점점 더 독살스럽게 일그러 졌다.

"하일즈, 이 상처 보이냐?"

젤가는 눈가의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이건, 그 녀석의 부모가 만든 상처야."

"기레스의?"

"그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너 소피아의 실력이 어느정도라고 생각하냐?"

"음... 우리 마을에서 영웅 취급을 받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요. 아버지도 한 실력 하셨다고 들었으니, 전쟁터에서 꽤 유명할 정도의 실력이었나요?"

"유명 정도가 아니야. 단언코 말해서, 소피아는 세프람 제국 최강이었다."

"최강...?"

"너희가 어렸을 때랑 지금, 마을이 많이 달라졌지?"

"네. 비교도 안될 정도로 커졌죠."

"세프람 제국의 엄청난 나랏 돈이 마을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거야. 이런 아무 것도 없는 변두리 시골 마을을 도시로 탈바꿈 시킬 정도의 돈을 세프람 제국에서 왜 제공 했을까?"

답이 정해져 있는 젤가의 물음에 하일즈는 몸을 살짝 떨었다.

"원래 아무리, 전공을 세워도 나라를 위해 별다른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특례는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야."

실제로 소피아는 아주 가끔 마을의 일을 처리하러 자리를 비우는 것을 제외하면 젤가에게 모든 일을 일임해두고 평범한 가정 주부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하일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왜.."

"왜는.. 소피아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지. 소피아가 나라의 적이 될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진지하게 소피아가 적이 되면, 제국은 붕괴를 걱정해야 될 정도로 소피아의 힘은 일개 개인의 힘으로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이었거든. 물리적으로 소피아를 죽일 방법은 없고, 전쟁이 끝났다고 괜히 방치했다가 문제가 생길 여지를 만드느니, 그냥 막대한 돈을 지원해 소피아를 묶어두고, 빚을 만들어 두는 게 이득이라고 높으신 분들은 판단한 거야. 막대한 돈이래봐야 나라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엄청난 투자도 아니고 말이지."

"어머니.. 대단하시네요."

"그 대단한 소피아를 위험할 정도로 몰아부쳤던 게 기레스의 부모였던거다. 내 이 상처와 함께 말이지. 어찌어찌 결과적으로는 이겼지만, 아직 젊었던 난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

"그래서요?"

"그래서 원수의 자식인 기레스를 데려와서 우리 가문을 위해 부려먹기 위해서 양자로 삼았지. 설마하니 그런 호랑이 부모 밑에서 저런 개만도 못한 머저리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아...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저 병신새끼를 그렇게 괴롭혔던 거군요?"

"뭐... 그렇지.."

이제야 지금까지의 비밀이 풀려 이해했다는 듯, 신나게 기레스를 까대면서 죽이 잘 맞는 하일즈와 젤가와 달리, 티나는 대화에 참가할 생각도 않고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안달복달 못하고 있었다.

'그 바보 오빠랑 내가 친남매가 아니라고?'

침대 위였다면 마음껏 꺄르르 거리며 좌우로 굴렀을 거고,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미칠듯이 살랑 거렸을 정도로 티나는 표정관리도 못하고 입가에 파멸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티나도 그 버러지랑 같은 피가 흐르지 않아 기쁜 모양이네..'

그렇게 '누가봐도 기뻐하는' 티나를 보면서 하일즈는 반은 맞고 반은 완전히 틀린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하일즈 오빠의 약혼자고, 엄마는 엄마니까..'

'피가 이어지지 않은 동생'인 자신이 기레스와 가장 가깝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 티나의 입가에는 실실 거리는 미소가 가실 줄을 몰랐다.

"알고 있겠지만, 하일즈, 티나, 너희들 내가 이거 말했다고 티나게 기레스를 괴롭히거나 하진 마라. 이제 나이도 찰만큼 찼겠다, 슬슬 우리 가족에 진실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어서 말해준 거지. 이전처럼 괴롭혀도 된다고 말해준 게 아니야."

"네. 알고 있어요."

'헤헤...'

"티나?"

하일즈와 달리, 대답 없이 살짝 풀린 눈으로 헤실거리는 티나를 보며 젤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네? 저.. 뭐라고 했죠?"

"기레스가 양자라고 이전처럼 대놓고 괴롭히거나 하지는 말라고 했는데.. 소피아도 있으니까.."

"안해요. 안해."

'그런 거.. 할 리가 없잖아..'

목에 칼을 들이 밀고 괴롭히라고 협박해도, 아니 소피아가 자신을 이전처럼 잔혹하게 벌주면서 괴롭히라고 협박해도 이를 악 물고 괴롭히기 싫을텐데 쓸데 없는 걱정을 한다고 정색하면서 티나는 다시 머리 속을 꽃밭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 바보한테는 나밖에 없어. 엄마도 언니도 지금은 도와주고 있다지만, 지금 뿐이고 결국에는...♥'

차오르다 못해 흘러 넘칠 정도의 기쁨에, 티나의 아리따운 몸은 절로 부르르 떨려 버린다.

소피아나 클로에가 자신 못지 않게 아름다우며, 기레스를 도울 수 있다고 해봐야, 결국 그것 뿐이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로 마음껏 기레스의 '전신을' 물고 빨고 맛보고 돌리며 섹스할 수 있는 자신과는 비교할 꺼리도 못되는 것이다.

이미 예전부터 거리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진정한 의미로 거리낄 것이 없어진 티나의 심장은 하일즈의 멋진 대련을 심드렁히 구경할 때와는 다르게 터질 것처럼 벌렁거리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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