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티나(72)
* * *
[사사삭]
"어? 티나?"
자신을 가로 막는 풀숲을 피할 생각도 않고 티나는 곧장 가로질러 소피아의 앞에 나타났다.
"읏!"
여전히 클로에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던 기레스는 불륜 행각이 걸려버린 외간남자마냥 부랴부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무 말 없이 빤히 기레스와 클로에를 냉랭하게 쏘아보는 티나를 보며 기레스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당황하면서 입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티, 티나 여긴 무슨 일이야?"
".... 오빠야 말로 '클로에 언니 위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평소 기레스가 정색할 때 보여줬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티나는 기레스와 클로에를 질책하듯 노려보았다.
"위에서라니... 티나, 오해야.."
클로에가 한마디 거들자, 티나는 아니꼽다는 듯, 클로에를 꼬나보며 말했다.
"흐~응? 오해?"
"그래!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방금은 사고 때문에... 그죠 엄마?"
기레스가 소피아의 방패를 들고 오자, 티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럼, 엄마나 언니나, '그런 차림'으로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데?"
기레스와 클로에 대신에 소피아가 나서서 티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기레스랑 클로에가 리움사관학교에 가기 위해 특훈을 하는 걸 돕고 있었단다."
"하, 엄마 제정신이에요?"
티나는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소피아에게 따지고 들었다. 상대가 소피아만 아니었다면 중간에 욕설이 들어가도 자연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신랄한 어투였다.
"응?"
"하일즈 오빠랑 약혼한 클로에 언니가, 저, 저, 저런 남사스러운 복장을 입는 걸 허락하다니 제정신이냐고요. 거기다 엄마도..."
"티나도 참.. 여기까지 와서 볼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리 야단이니?"
"볼 사람은..."
순간 울컥해서 티나는 기레스를 예쁜 손가락으로 삿대질 하며 말했다.
"저,, 저..! 오빠는 남자도 아니에요?"
"기레스는 가족이잖아. 나나, 클로에가 좀 가벼운 차림을 입는다고 기레스가 뭘 어쩌겠어?"
누가봐도 좀 가벼운 차림이 아니었지만, 소피아는 잔웃음을 지으며 여유롭게 티나의 말을 받아쳤다.
"클로에 언니는 가족이 아니잖아요!"
"그야 지금이야 그렇지만.. 요즘 날도 덥고, 훈련 강도도 높아졌으니까 클로에도 '내가 입었던 것처럼' 좀 더 편하고 가벼운 차림을 입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거든. 봐, 엄마도 클로에도 땀으로 범벅이잖아?"
소피아는 땀으로 촉촉히 젖어 새하야면서도 봉긋한 속살이 은근히 비춰 보이는 옷을 손가락으로 깔딱거리며 말했다.
'엄마가 입었던 것처럼?'
소피아의 말을 들은 티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티나의 입장에서 소피아가 집 안에서 저런 대담한 차림을 입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기레스를 유혹한답시고 야한 차림을 입었던 무렵이었다.
'서, 설마... 나 때문에 저런 복장을 입었던 거란 말야....?'
자신이 집 안에서 야한 차림을 입어서, 소피아가 티나를 따라 좀 더 대담한 복장을 입기 시작한 것이, 클로에한테까지 전염되었다고 착각한 티나는 머리가 새햐얘졌다.
저 여자가 봐도 넋이 나갈 정도로 육감적인 몸매를 기레스에게 마음껏 표출하도록 만든 원흉이 자신이라니, 아이러니한 현실에 숨이 턱 막혀왔던 것이다.
'휴.....'
클로에는 클로에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실 누가봐도 야한 이 복장을 티나가 따지고 들면 내심 어떻게 대꾸해야 되나 클로에는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소피아가 저렇게 잘 둘러대어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피아의 은근히 야한 복장에 자극받아 대담한 복장을 입은 것도 사실이었는지라, 티나와는 다른 이유로 클로에도 '내가 입었던 것처럼'이라는 소피아의 말에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복장 좀 가볍게 입는다고 기레스가 뭘 어떻게 할 리가 없잖니. 할 수도 없을거고.. 그렇게 따지면 티나 너도 집 안에서 그런 복장을 입으면 안되는 거잖아?"
"저... 저는 도, 동생이잖아요..!"
이미 기레스에게 몸이란 몸은 다 내어주었으면서도 티나는 뻔뻔스럽게 자신을 팔면서 따지고 들었다.
"클로에도 기레스의 제수씨가 될 사람이잖아."
그렇게 소피아가 가족론까지 들고 나오자, 티나는 숨이 목구멍까지 막혀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클로에가 변명해 오면 가증스러워서 어떻게 변명해 오든 바락바락 따지고 들 수 있었을텐데, 괜히 옆에서 소피아가 클로에를 변호해주니 강하게 따질 수도 없고 고구마를 들이킨 것처럼 목만 꽉꽉 메여왔던 것이다.
"아, 알았어요. 일단 복장이야 그렇다 치고, 언니는...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소피아와 말을 주고 받아 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티나는 화살촉을 클로에에게 겨냥했다.
소피아는 티나에게 거리낄 게 없다지만, 클로에는 다르다.
기레스에게 협박 당해 하일즈를 배신할 뻔 했던 클로에를 몸을 팔아서까지 구해준 게 티나인 이상, 클로에는 티나의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하고 기어야 정상인 것이다.
"내가 이러라고 그때.."
티나는 적당히 기레스와 클로에의 내막을 알리지 않는 선에서 클로에를 구박한 뒤, 이 모임에서 나가라고 종용하려 하기 위해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티나. 미안해."
하지만 클로에는 당당하게 티나의 앞에서 사죄의 말을 건넸다.
"네가 왜 이렇게 나한테 화가 났는지는 알겠어."
'뭐야? 왜 이렇게 당당해..?'
"그럼..."
그럼 양심껏 기레스와 어울리지 말고 이 모임에서 나가라고 쏘아 붙히려는 티나의 말은 보기 좋게 클로에의 말에 잘려 버렸다.
"하지만, 나한테 이번 리움사관학교의 시험은 정말로 중요해."
'어...?'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하일즈와 기레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리움사관학교를 언급해 오는 클로에의 말에 티나는 머리가 몽롱해 졌다.
"티나, 너도 우리 집에 빚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갑자기 클로에가 무거운 현실의 이야기를 꺼내오자 티나는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어... 그, 근데 그건.. 하일즈 오빠랑 결혼하면.. 우리 집에서.."
"유페르 가문에 손만 빌려서 빚을 해결한다니 나는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아.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나는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고, 착취하기만 하는 건 가족이 아니잖아?"
'고지식해..!'
하지만 지금까지 티나가 십 수년간 숱한 시간을 보아온 클로에라는 여성은 원래가 저런 사람이었다.
'하일즈 오빠의 말로는 아버지가 빚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야반도주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클로에의 사정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기에 더더욱 클로에의 저런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티나였다.
"하지만 언니라면 리움사관학교 정도는 쉽게.."
"나한테 리움 사관학교 시험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회야.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까, 최선을 다해야지. 얼마 전에, 소피아 아줌마랑 단련할 기회를 얻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달았어."
'어... 어...? 이게.. 아닌데..'
원래라면 찍소리도 못하고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어야 할 클로에의 변명을 찍소리도 못하고 듣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티나의 속에 고구마가 차곡차곡 쌓여 나갔다.
"마침 기레스도 리움 사관학교에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길래, 나도 나의 부족함을 알려준 아줌마한테 확실하게 단련을 받고 싶어서 부탁하게 된 거야."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티나는 살짝 이를 갈면서 기레스에게 협박 당해서 겁탈당한 일을 꺼냈지만, 클로에는 티나의 그 민감한 질문에도 찍소리도 못하기는커녕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반박했다.
"한번 떨어지면 5년을 치를 수 없는 일생일대의 시험이야. 그거보다 더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내게는 리움 사관학교의 시험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으.... 으으.....'
집안사정을 끌고 와서 저렇게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나오면 아무리 티나라고 해도 비아냥 거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집안을 이끌어 나가야 할, 장녀기에 무엇보다도 리움사관학교를 합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데 거기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기레스가 상종하지 않아야 할 원수든 말든, 그것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위해 리움 사관학교가 중요하다고 못을 박아 버리면 티나로서는 클로에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뭐라 따질 명분이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디까지나 클로에의 인생은 클로에의 것이며, 선택도 클로에의 몫이기 때문이다.
'치사해..... 치사해!'
속이 울컥거린다. 기레스와 클로에의 꽁냥거리는 모습에 눈이 돌아가 나오기는 했지만, 나오고 나니 하나 건진 것도 없이 이 모양 이 꼴이다.
'나도... 나도...?'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티나는 소피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저... 엄마."
"응? 이야기 다 끝났어? 둘이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가족이 될 사이기도 하니까.. 싸우지 말고 적당히 화해하도록 해."
"싸운 거 아니에요. 그것보다 엄마. 저도 리움사관학교에 가고 싶어서 많이 고민 했잖아요?"
리움사관학교로 잠들지 못하겠다는 핑계로 수면제를 받아갔던 일을 언급하면서 티나는 소피아에게 알랑대며 물었다.
"응. 그랬지."
"저도.. 엄마한테 단련 받으면 안돼요?"
"그건 안되지."
너무나도 자상하면서도 잔혹하게 소피아는 미소지으면서 단칼에 티나의 요청을 잘라내 버렸다.
"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티나는 되물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안된다고 말했단다.. 티나."
"어, 어째서.."
"지금 하고 있는 단련은 기레스를 위한 단련이거든."
"오빠를?"
"응. 젤가에게 마음껏 단련 받았던 너나 하일즈와는 다르게 기레스는 단련다운 단련을 받지 못했으니까 뒤처진 만큼 내가 단련시켜 주고 있는거야."
소피아의 입에서 기레스를 괴롭혔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자, 티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클로에와 기레스가 특별한 관계인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기레스를 싫어 해야 하는 티나의 입장상 기레스를 괴롭혔다는 일은 들켜도 별 상관 없기는 했지만, 어째선지 티나는 클로에한테만은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가 않았다.
"이대로 널 가르쳐 주는 건 형평성에도 맞지 않지만.. 기레스도 그런 걸 바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안돼."
"언니도 가르쳐 주고 있으면서..."
"클로에는 기레스가 꺼려하지도 않고, 또 수석으로 합격하게 되면 기레스에게 면제권까지 주기로 했으니까.."
"!!!? 언니.. 진짜야?"
그 말에 티나는 화들짝 놀라며 클로에를 돌아 보았다.
"응."
클로에는 표정변화 하나 없이 그 사실을 솔직히 시인했다. 그 거침없는 쿨한 반응에 티나의 속은 지글거리며 끓어 올랐다.
'말도 안돼.. 클로에 언니한텐 저 오빠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인간이잖아... 어떻게 그런 사람한테..'
"언니.. 지명권을 저녀석한테 준다니 무슨 생각이야. 하일즈 오빠는 어쩌고!"
"하일즈는 지명권이 없어도 합격할 수 있을테니까.."
"절대는 없다며..? 만일을 대비해서 남겨 둬야지."
"하일즈 본인이 떨어질 리 없다고 몇번이나 자신했어. 그럼 나는 날 위해서 지명권을 이용해야지."
실제 하일즈가 몇번이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기도 했겠다, 클로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티나에게 무덤덤하게 선고하듯 말했다.
'으...!'
클로에가 기레스에게 리움 사관학교의 지명권을 사용하기로 약속했다는 말에 티나의 속은 그야말로 시꺼멓게 타들어갔다.
기레스를 위해 성실히 대련 상대를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나 마음이 시큰거렸는데, 지명권이라니.. 티나는 뭔가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버리는 기분이 들어 버렸다.
'설마 클로에 언니'도'...? 아냐... 그럴 리는 없어. 리움사관학교에 가고 싶어서 단련하고 있는거라고 본인이 이야기 했잖아... 말한 그대로의 의미일 거야.. 그래야만 해...'
그렇게 생각하는 티나의 머릿 속에는 한번은 기레스와 몸을 끈적하게 포개고 있었던 클로에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라 버렸다.
'아냐... 아냣..!'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티나를 보고 소피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티나, 그렇게 리움사관학교를 위한 특훈을 받고 싶다면 젤가에게 이야기 해둘게."
"네?"
"기레스를 위한 훈련이니, 나는 가르쳐줄 수 없지만 젤가는 별 상관 없으니까.. 좋아하는 하일즈랑 같이 특훈을 해달라고 말해둘게."
'그런 거... 필요 없어..'
젤가고 하일즈고 나발이고, 티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른 솔직한 심정을 떠올렸다.
"티나도 굳이 기레스랑 훈련하고 싶지는 않을거 아냐?"
'아니.... 으읏...'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여온 행실은 부메랑이 되어 티나에게 되돌아 오고 있었다.
"티나는 기레스와는 다르게 재능이 뛰어나니까 젤가에게 특훈을 받아도 충분히 리움 사관학교에 합격할 수 있을거야."
"아니.. 그래도.. 저도 엄마한테.."
마지막의 마지막, 벼랑 끝까지 몰린 와중에도 티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피아에게 매달렸다.
"곤란하네..."
소피아는 살짝 마음이 약해진 것처럼 말을 흐렸다.
"오빠가 아들인 것처럼 저도 딸이잖아요..."
"그럼, 기레스한테 허락을 맡으면 가르쳐 줄게."
"오빠한테?"
티나는 애절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티나의 표정에도, 기레스는 돈줄 취급하기라도 한 티나를 떠올렸는지 정색하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부담스럽다는 듯 말했다.
"여, 역시 티나는 좀.."
"그렇다고 하네. 아쉽지만..."
"으흑...!"
자신이 해왔던 일도 있겠다,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레스에게' 거절을 듣자마자 지금까지 쌓일대로 쌓여 온 감정의 둑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 티나는 그대로 도망치듯 내달려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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