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티나(69)
* * *
'왜....'
티나는 독살스러운 표정으로 기레스를 쏘아 보았다.
'여기선, 여기선...! 내 이름이 나와야 하잖아...!'
잠에서 깨어난 것도 아니고, 잠꼬대를 해대는 건 좋다. 하지만 이렇게 평소처럼 진하게 사정까지 시켜 줬으면, 여기서는 당연히 기레스의 전용 육변기인 자신의 이름이 나와야 되지 않느냐고 불평하면서 티나의 속은 활활 타올랐다.
백번 양보해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여기서 클로에의 이름만은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설마 아직도 언니를 협박하고 있다거나.. 아니, 그래도 이 녀석은..'
지금까지 티나가 보아온 기레스는 건방지고 찌질하고 치사하기는 해도, 거짓말만은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무려 자신이라는 탐스러운 육변기를 눈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이 약속을 전부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던 기레스를 옆에서 전부 보아온 티나다.
'이 녀석은 약속 하나는 잘 지키니까.. 그럴 리는... 그럴 리는 없을거야...'
자신을 상대로는 꾸역꾸역 참아가면서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기레스가, 혹시나 클로에를 상대로는 약속을 어겨가면서 협박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티나의 속은 자글자글 타들어갔다.
[으득]
'이 바보가 협박을 할 리가 없어.. 내 약속도 다 지켜줬잖아? 반드시.. 반드시, 그래야만 해. 응! 하, 하일즈 오빠는 내가 지켜야 되니까..'
이 속이 자글자글 지져지는 분노의 이유를 하일즈 때문이라고 애써 변명하면서 티나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 바보가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면 클로에 언니의 이름을 부를 일이 있나? 약속은 지키고 있지만... 잠꼬대로 클로에 언니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티나는 방금 전, 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 하던 기레스를 떠올렸다.
'서, 설마... 이 바보 오빠.. 클로에 언니를 조,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번에는 마음 속에 커다란 납 덩어리가 쿵하고 떨어진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버리는 티나였다.
방금 전, 기레스가 클로에를 협박 하지는 않을까? 했던 망상과는 달리, 기레스가 클로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천천히 티나는 기레스가 처음 클로에를 협박 했던 날을 떠올렸다.
'으...흣....!!'
지금까지는 동정 동정 거리며 잊고 있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기레스는 동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티나의 마음은 소용돌이처럼 정신없이 휘몰아 치기 시작했다.
클로에의 풍만하면서도 싱그럽기 짝이 없는 몸에 찰싹 달라 붙어 음흉하고 끈적하게 몸을 뒤섞었던,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날의 일이 머릿 속에 선명히 떠오르자, 봇물 터지듯 범람해 버린 감정에 티나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아 버렸다.
'뭐, 뭐야.. 왜.. 오, 오빠 때문인가..'
애써 흘러 넘치는 눈물을 꾸역꾸역 눌러 참고, 하일즈의 핑계를 대며 티나는 마음을 추스리려 노력했다.
'돈이 없어서, 날 못 부르니까 처음 안았던 클로에 언니를 생각한 거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다리는 맞아 떨어지지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티나였다.
'이 바보 한테는 나밖에 없어야 되는데...'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기레스를 안아줄 수 있는 상대는 죽을 때까지 자신밖에 없어야 했는데, 사실 기레스는 이미 다른 여자를 맛 봤다는 사실을 자각해 눈물이 돌아 버릴 정도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티나였다.
기레스를 만나기 전까지 깨끗한 처녀였던 자신과 달리, 기레스의 동정은 이미 클로에한테 따였다는 사실이 티나는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푸우.. 후우.. 음.."
세상 모르고 새근거리는 기레스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면서 티나는 생각했다.
'방금 전에는 내 이름을 그렇게 서럽게 불러 대더니..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이 바보오빠는...'
"바람둥이.."
곁잠을 잘 기분도 들지 않은 나머지, 티나는 그렇게 울분을 삭히며 한마디를 툭 내뱉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처량하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확인해 봐야겠어..'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한숨도 자지 못한 티나는 방 밖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밤새도록 생각한 결과, 티나는 기레스가 잠꼬대로 클로에의 이름을 말한 이유가 딱히 클로에를 좋아해서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레스가 클로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낸 티나는, 최근 클로에를 감시하던 것을 소홀히 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조사를 해봐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색골 오빠니까, 그냥 단순하게 발정나서 클로에 언니의 몸을 떠올린 걸지도 모르잖아? ..... 우으.."
애써 그렇게 바꿔 생각해봐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티나였다.
버젓히 육변기 취급 했던 자신을 제쳐두고 클로에의 몸을 떠올리며 잠꼬대 하다니, 여자로서, 아니 변태로써 그보다 수치스러우면서도 질투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이왕 생각할거면 매일 같이 물고 빨고 즐긴 나나 생각할 것이지..!'
[덜컥]
"으앗."
입을 삐죽거리면서 클로에보다는 작은 자신의 예쁜 가슴을 불만스럽게 주물거리던 티나는 방에서 튀어나온 기레스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 뭐하냐?"
뭔가 찌뿌둥한 표정으로 방을 나온 기레스는 뒷걸음질친 티나에게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하며 지나가려 들었다.
"조심좀 해! 시발 부딪힐 뻔 했잖아!"
전 날, 클로에의 이름을 잠꼬대 하기도 했겠다, 자신에게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한 기레스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 티나는, 기레스가 정색을 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사납게 투정을 부렸다.
괜한 트집이었지만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밤을 새가며 푹 곪아버린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티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레스는 살짝 눈을 흘기며 물었다.
"어디 아프냐?"
"그건 왜 물어?"
오랜만에 자신의 안부를 묻는 기레스의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에 티나의 활활 타올랐던 티나의 마음은 뭉글뭉글 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네가 내가 지나가는 소리를 못 들을리가 없을텐데 뭔 일 있나 싶어서.."
"별일이네? 내 걱정을 다 해주고?"
여전히 클로에의 일로 말에 시퍼런 날이 서린 티나다.
"뭐어? 별 일? 하여간 이 년은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네. 에휴 내가 미쳤지. 그 이상한 꿈만 아니었어도.."
"이상한 꿈?"
기레스의 혼잣말에 티나는 눈을 반짝이며 반응했다.
"아, 아무 것도 아냐. 이년아."
오랜만에 정색 하나 하지 못하고 당황한 기레스는 다급하게 말을 흘리면서, 티나를 피해 도망치듯 1층으로 내려갔다.
'꿈... 이라고?'
그로부터 사흘 간, 티나는 은밀히 클로에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는 수업이 다르기에 수업마다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정보통을 써가며 감시해 본 결과, 클로에는 교내에서 티나의 눈 밖에 날만한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으...'
쉬는 시간에 부리나케 달려와 기레스와 같은 교실에 머물고 있는 클로에를 볼때면, 기레스에게 범해지던 그 날의 클로에가 새록새록 떠올라 속이 시큰시큰 거리는 티나였다.
그리고 방과 후, 오늘도 티나는 클로에를 찾아 헤맸다.
'또.. 놓쳤어..'
어제는 하일즈와 만나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미행 첫 날과 오늘 클로에는 학교에서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춰 버렸다.
학생들에게 수소문을 해봐도, 그 아리따운 클로에를 봤다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티나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학교를 빠져 나갔다.
'이상해... 아무리 하교시간이라도 그렇지, 클로에 언니를 봤다는 사람이 이렇게 없다는 게 말이 돼?'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학교의 상징인 클로에를 본 사람이 이렇게 적다는 게 쉬이 납득이 되지 않은 티나는 직접 클로에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티나 언니!"
"오랜만이야. 니나! 자 이건 선물."
"와아~"
기레스에게 받은 돈도 많겠다. 티나는 니나가 좋아할 법한 귀여운 봉제 인형과 더불어, 큼지막한 사탕과 달콤한 과자 바구니를 니나의 손에 쥐어주며 물었다.
"그런데 니나, 혹시 클로에 언니 있어?"
"응? 없는데..?"
"그렇구나.. 이 시간에 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냐. 요즘 언니는 항상 6시 정도는 넘어야 들어와."
"6시??"
니나의 대답에 티나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평소 기레스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니나의 거짓 하나 없는 천진난만한 대답에 티나의 속에선 검디 검은 의심이 뭉게 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티나 언니?"
"응? 왜 그렇게 늦게 오실까? 오늘은 하일즈 오빠를 만나는 것도 아닌 모양인데.. 니나는 뭐 알고 있는 거 없어?"
넌지시 묻는 티나의 말에 니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으응. 그래도 요즘 언니는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어!"
"그, 그래?"
니나의 말은 떼어놓고 보면 별로 특이한 말은 아니었지만, 기레스의 잠꼬대를 들은 티나에게는 니나의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어이! 니나! 놀러가자!"
"앗..!"
밖에서 들리는 사내아이의 목소리에 니나는 티나의 눈치를 살폈다.
"아, 난 괜찮아. 놀러가도 돼."
"응. 언니한테 티나 언니가 왔다고 전해줄게."
"안 그래도 돼. 클로에 언니는 내일 학교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까.. 오늘은 클로에 언니도 만나고 겸사겸사 니나의 얼굴도 보고 싶어서 한번 와본 것 뿐이야. 봐, 여기 선물도 들고 왔잖아?"
어디까지나 니나를 위한 선물이었다는 듯 티나는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마워! 언니! 이거 애들이랑 나눠 먹어도 돼?"
"그럼~ 재밌게 놀고 와."
"응!"
'좋을 때네.'
귀엽게 와와 거리면서 또래의 남자친구 둘과 만나러 가는 니나를 보면서 티나는 클로에와 하일즈와 뛰놀았던 그리운 나날을 떠올렸다.
푸근한 미소를 지어야 될 상황 속에서도 어딘지 전혀 웃음이 나질 않아서 티나는 차갑게 실소를 머금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