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티나(66)
* * *
기레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평소의 일상이 무언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일은 없다.
티나가 나서서 화해할 명분도 없었고, 단단히 삐진 것처럼 보이는 기레스가 당연히 먼저 다가올 리도 없어서, 사실상 이 지옥 같은 냉전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레스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가시밭길을 걷는 것만 같았던 티나의 마음은 따스한 봄날 같은 평온을 되찾았을 수 있었다.
"....."
"....."
냉랭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기레스는 티나를 흝고 지나친다.
이전 같았으면 저 냉기를 풀풀 풍기는 쌀쌀맞은 태도에 흘러 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홀로 방에서 끙끙 거렸을 티나지만, 지금의 티나는 한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평온하다 뿐이랴, 오히려 저 태도가 자신을 '좋아한 나머지' 돈줄 이상의 취급을 받고 싶어서 삐진 것이라 생각하면 은근히 기쁘다 못해 기레스가 귀엽게까지 보이는 티나였다.
"흐음..."
방으로 돌아온 티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레스가 사실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 까지는 좋다.
저 쌀살맞은 태도도 자신에게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귀엽게도 봐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냉전 자체가 좋냐하면 그건 아닌 것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티나는 어떻게든 기레스의 속을 풀어서 다시 이전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계기를 얻고 싶었다.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면 이전처럼 유혹할 수도 있을테니까..'
슬그머니 도발하고 기레스를 흥분시켜 결과적으로는 따먹힐 생각을 하니 입에는 군침이 돌고, 몸은 달콤하게 저려버리는 티나다.
"으우.."
그렇게 망상에 헤벨레 거리다가 현실로 돌아와 보면 생각나는 방법이 전혀 없어 울상을 짓는 티나였다.
'직접적인 이유는 돈이 다 떨어져서 그런거였지... 음.. 근데 나 돈을 얼마나 받은거지?'
지금까지 돈 '따위'에는 관심이 전혀 없어서 매번 받은 돈을 세어볼 생각도 않고, 벽장 안에 차곡차곡 쳐박아 두었던 티나다.
조금 안정이 된 지금에야 자신이 얼마나 돈을 받았는지 궁금해진 티나는 벽장을 열고 돈을 보관해 두었던 자루를 열었다.
'우와....'
묵직한 자루 안의 돈을 세어보니 거의 천만 에보나에 가까운 거금이 들어 있어서, 티나도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달은커녕 한 달을 조금 넘을까 말까 하는 그 짧은 사이에, 기레스는 자기 하나 안아 보겠다고 전재산인 천만 에보나를 탕진해 버린 것이다.
'이건... 속상할 만도 하겠네..'
최근 기레스에 대해 많이 생각하기도 했겠다, 티나는 기레스의 심정이 적잖게 공감이 되었다.
산처럼 쌓여 있던 돈은 돈대로 거덜이 나버렸지, 이제 돈이 없어서 자신을 안지 못해서 침울한 마당에, 일주일만에 나타나 한다는 말이 '돈 필요한데 요즘 왜 안부르냐?' 였으니, 기레스가 자신을 단순한 돈줄이라 착각해 귀엽게 삐져 버리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공감하는 티나였다.
"칫.."
티나는 돈을 들어 벽장을 향해 던져 버렸다.
'이딴 거.. 정말 아무래도 좋은데..'
마음 같아서는 이 돈으로 기레스를 사고 싶을 정도여서 티나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원망스럽게 수중에 놓인 돈을 바라보았다.
이 돈이 자기가 아니라, 기레스의 수중에 있었다면 아직도 그 달콤한 천국이 계속 되었을거라 생각하니 괜시리 짜증이 치밀어 버린 것이다.
기레스랑 그 꿈 같은 시간을 다시 보낼 수 있다면 이 돈의 10배가 되는 돈도 휴지조각처럼 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티나였다.
'아..! 시발..'
원망스레 돈을 바라보던 중, 티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손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 했다.
'진작에 이 돈을 바보 오빠한테 돌려줄 걸...!'
직접 돌려줄 수는 없지만, 도둑.. 아니 의적질을 하는 것처럼 몰래 돌려주는 건 가능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티나는 자신의 안일함에 치를 떨면서 아쉬움에 바닥을 데굴데굴 뒹굴렀다.
어차피 상대는 기레스겠다, 비장의 방음마법도 아직 수중에 있는 참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레스의 방에 잠입해 돈을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 아으,.... 아...! 이 바보..!'
조금만 더 빨리 이 생각을 해냈다면, 기레스가 자신에게 주는 돈을 받고 마음껏 즐긴 후에, 그 돈을 다시 기레스에게 몰래 넣어주고, 그 메꿔진 돈으로 기레스는 자신을 다시 산다는 영구동력이 완성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티나는 눈물이 고여 버릴만큼 아쉬워 했다.
'이젠.. 안되잖아...'
기레스의 반응을 보면 돈이 거덜났다는 것 쯤은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
돈이 바닥이 나기 전에 몰래몰래 넣어주었다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미 돈이 바닥나 저렇게 정색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돈을 넣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진짜 왜 그 생각을 못한 거야.....!"
생각 하면 할수록 아쉬워서 안타까움에 몸을 배배 꼬아보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그 날 하루 티나는 후회로 이불을 차대며 날 밤을 지새웠다.
"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레스와 화해할 형편 좋은 명분은 떠오르지 않아서 티나는 다시금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기레스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쨋든 욕구불만은 욕구불만대로 티나를 괴롭히고 있었고, 기레스는 여전히 냉랭 그자체였으며, 하필이면 전 날 기레스와 계속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티나는 안타까움에 정신이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참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찬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에 내려가자, 무언가를 닦으며 흥얼거리고 있는 소피아의 모습이 보였다.
"음 흠 음음~"
소피아는 뭔가 애지중지하는 듯한 느낌으로 예쁘장하게 생긴 물병을 닦아 내고 있었다.
"엄마. 그게 뭐에요?"
소피아가 답지 않게 굉장히 아끼고 있어서 흥미가 생긴 티나는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물병에 대해 물었다.
"아.. 이거? 수면제란다."
"수면제요?"
정말 예상하나 할 수 없었던 뜬금 없는 소피아의 대답에 티나는 움찔 놀라며 되물었다.
"응. 부작용은 하나 없이, 죽은 듯이 푹~ 잘 수 있다고 전해지는 특제 수면의 비약이야."
"그런 걸 왜.. 요즘 잠들기 힘들어요?"
"아니, 그렇진 않은데.. 기레스가 잠들기 힘들다고 고민을 말해와서 말야.. 정말 매일 같이 잠을 설치고 있는 모양이던데, 나도 엄마로서 좀 걱정이 되어야 말이지."
"!!"
소피아의 입에서 기레스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티나는 조건 반사처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냥 기레스라는 이름을 들은 것도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것보다도 자신의 앞에선 발기 하나 하지 않고 차가운 모습을 보이던 기레스가 '수면부족'이라는 말에 눈이 반짝거리는 티나였다.
'역시... 나 때문에...♥'
당연히 자신 때문에 밤 잠을 설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티나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닌 척 해봐야 기레스는 기레스. 자신조차도 이렇게 곁잠을 자지 못해 매일 같이 끙끙이는데, 자신이 없어진 기레스는 오죽하겠냐는 생각에 티나는 배시시 웃으며 생각했다.
'바보... 그렇게 잠 못 들 정도면.. 다시 조금만 용기내서 무료로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보지.'
"티나?"
"네? 아.. 그러니까 오빠가 잠을 못 자고 있다고요?"
"응. 그래서 아는 친구한테 부탁해 도착한 귀한 물건이야. 정말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 사실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내왔지 뭐니."
'그래서 저렇게 애지중지 하신 건가? 그런데 어쩐지 엄마는 그 바보랑 관련된 일만 되면 저렇게 좋아라 하는 것 같단 말야.'
이전 기레스와 함께 '둘이서' 히벨리에로 여행을 떠나며 행복해 하던 소피아를 떠올리자, 티나는 어쩐지 괜히 속이 욱씬거려 입을 삐죽였다.
'잠깐만, 수면제라고..?'
예쁜 소피아의 손에 닦여지고 있는 물병을 빤히 쳐다보면서 티나가 물었다.
"그런데 이거 그렇게 효과가 좋아요?"
"그럼. 전설의 수면의 비약이라고 불리는 물건인걸. 불면증인 사람들한테는 부르는 게 값인 물건이라던데? 엄마는 아는 지인이 있어서 그나마 이렇게 구할 수 있었던 거고, 원래는 구경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물건이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고.."
소피아의 설명을 들은 티나는 목젖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저, 저기 엄마. 정말 죄송한데.. 저도 요즘 정말로 자기가 힘들어서 그런데 저도 그 수면제 좀 이용해봐도 돼요?"
"티나도? 그러고 보니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네. 무슨 일 있어?"
"그, 그냥 좀 잠을 자기가 힘든 것 뿐이에요. 얼마 뒤에 사관학교 시험이 있어서 부담이 되는가 봐요."
"어려서부터 하일즈를 따라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더니.."
"네? 아... 뭐, 그렇죠."
사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형편 좋은 변명을 한 것 뿐이었기에 티나는 약간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티나가 리움 사관학교를 가고 싶어 했던 이유는 소피아의 말처럼 사랑하는 하일즈가 지망하고 있었기 때문이 맞지만, 어쩐지 티나는 그 동기가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일즈 오빠는 클로에 언니랑 리움 사관학교에 갈 거고.. 어차피 내 사랑은 이루어질 수도 없을텐데.. 그냥 나도 앗싸리 시험에 떨어져 버리는 게 나으려나..?'
제 딴에는 리움사관학교에 가겠다고 쓸데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기레스가 세프람 제국 명문 중의 명문 리움 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사이 좋은 커플인 하일즈와 클로에는 리움사관학교로 보내버리고, 자신은 그냥 사이좋게 기레스와 리움사관학교를 떨어지면 집에서 더 끈적하고 질척하며 음탕하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티나는 소피아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헤벌쭉한 표정으로 망상했다.
"아직 시간은 좀 남아 있으니까 열심히 하면 합격할 수 있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렴."
"네? 아 네에.. 어쨋든 저도 요즘 잠을 못자서 고민인데, 저도 그거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잠시만 기다려."
소피아는 컵에 찬물을 담고 물병에 담긴 물방울을 떨어 뜨려 잘 섞은 뒤, 티나에게 건네 주었다.
"마시면 바로 효과가 날 거니까 자기 전에 마시렴. 아마 6시간 정도는 푹 잘 수 있을거야."
'6시간? 엄청 구체적이네..?'
"네. 고마워요 엄마."
오히려 잘됐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티나는 소피아에게 감사를 표하고 쏜살 같이 달려 자신의 방 안으로 돌아왔다.
'일단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확인해 보는거야..'
"꿀꺽 .... 우응..."
자명종을 맞춰두고 소피아가 준 수면제를 단번에 들이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나른해지고 눈이 천근 같이 무거워진 티나는 꾸물꾸물 침대로 기어 들어가 눈을 감았다.
"........ 핫."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마치 잠들고 깨기까지의 시간이 삭제라도 되어버린 것만 같이, 깊은 잠을 자고 난 티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잠을 잘 잤는지, 피로는 그야말로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아 오랜만에 개운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티나는 잘 잤다고 좋아하기보다 먼저 자명종의 시간을 확인했다.
'좋아!'
이른 밤에 잠을 방해하기 위해 맞춰둔 알람이 지나 있는 것을 확인한 티나는 그제서야 해맑게 미소지으며 좋아라 했다.
최근, 예민하기 짝이 없어 자신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놀라 일어나기가 일쑤였는데, 무려 자명종 소리도 듣지 못하고 깊게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소피아의 말마따나 대충 약을 마시고 6시간쯤 지난 상태였다.
'이거라면... 할 수 있겠어..!'
오랜만에 싱글벙글 행복이 가득한 미소로 티나는 기운 찬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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