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73화 (173/238)

〈 173화 〉 티나(65)

* * *

'다 떨어져...?'

분명 처음에는 기레스가 최대한 돈을 절약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던 티나였던만큼,언젠가 돈이 떨어질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기레스와의 음락에 한껏 취해 달콤한 나날을 즐긴 나머지, 언제부턴가 티나는 기레스의 돈이 마른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을 마음껏 불러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고민도 없이 돈을 꺼내는 기레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티나에겐 숨을 쉬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일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티나에게 기레스가 돈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해야만 했다.

그렇게 현실에서 눈을 돌린 결과가 이것이다.

"일주일 만에 나타나서는 뭐? 돈 달라고? 네 눈에는 내가 돈줄로 밖에 안 보이지?"

특유의 열등감과, 정색이 뒤섞인 기레스의 싸늘한 말투에 티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제 돈이 없어서 섹스를 하지 못한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그것보다 먼저 자신에게 질렸다는 듯한 기레스의 저 표정에 더욱 충격을 받는 티나였다.

'아, 아냐......'

마음 같아선 받은 돈 같은 건 도로 다 돌려주다 못해,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라도 기레스에게 안기고 싶은 티나는 속으로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당연히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변태적인 사고에 함몰되었다지만, 사실은 자신을 능욕했던 기레스에게 다시 육변기 취급을 받아보고 싶어서 돈을 핑계 댔다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어떠냐?"

"뭐?"

"지갑처럼 써먹을 수 있는 호구새끼 돈이 거널난 기분이 어떠냐고? 이제 나같은 놈한테는 관심도 없겠지?"

어쩐지 마음의 상처라도 받은 듯한 기레스의 태도에 티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야....'

신랄하기 짝이 없는 기레스의 말투에 티나는 대꾸도 못하고 울먹거릴 정도로 정신이 몰려 있었다.

기레스의 생각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헛다리를 짚고 있었지만, 티나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행동을 객관적으로 곱씹어 보면, 기레스가 저런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기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봐도 자신은 돈을 위해 억지로 몸을 파는 사람이다.

제 딴에는 기레스에게 안기고 싶어서 돈을 핑계로 댄다지만, 기레스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티나의 그런 숨은 의도까지 알 수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티나는 평소 틱틱대는 것처럼 기레스에게 대들어 가볍게 쏘아붙히면서 넘어가고 싶었지만, 기레스의 질렸다는 듯, 정색하며 싸늘하게 노려보는 눈빛을 보니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도 돈줄이 사라지니까 친구 걱정은 되나보네?"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되어 표정관리를 전혀 못하고 울상 지은 티나의 얼굴을 보고 기레스는 또 얼토당토않는 오해로 티나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기레스의 입에서 돈줄이라는 말이 한번씩 튀어 나올 때마다 티나는 가슴에 대못이 하나씩 박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안 부르는지 알았으면 꺼져."

"아.."

목각인형처럼 넋이 나간 티나를 밀치고 기레스는 뒤도 하나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흐윽.."

아무리 표면적으로는 원수사이였다고는 하나, 이전과는 너무 다른 칼 같은 태도에, 기레스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감정의 둑이 터져 티나의 눈에선 꾸역꾸역 참았던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훌쩍. 아니란 말야...."

세상 무너진 것처럼 서럽게 울면서 티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 날 이후, 티나의 하루하루는 지옥으로 변모해 있었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고, 그렇기에 행복은 덧셈과 뺄셈으로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

100의 행복을 얻었다가 100의 행복이 사라지면, 어차피 본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100의 행복이 사라졌다는 것에 절망하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몸에 새겨지고, 깊숙히 스며든 쾌락은 마치 저주처럼 티나의 몸와 마음을 곪게 만들고 있었다.

밤이 다가오면 기레스와 속살을 부비던게 생각나 미칠 것만 같았고, 한밤중이 되면 기레스의 품 안에서 단 잠을 자던 게 떠올라 안타까움에 마음이 시려 잠들지 못했다.

겨우겨우 눈을 붙혀도 새벽이 되면, 소리 하나 없이도 흠칫흠칫 깨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아무 것도 없어 허전함을 느끼는 건 예삿일이다.

이보다 더 충실한 나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던 게, 일장춘몽처럼 느껴져서 티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정신이 메말라 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메마른 마음은 바작바작 부서져내려, 나중에는 육변기고 섹스고 애무고 다 필요 없으니 그냥 자고 일어나니 기레스가 옆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기만 해도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 뿐이랴, 왜인지 소피아는 이전보다 더 눈에 불을 켜고 순찰해대는 바람에 티나는 여전히 기레스의 속옷은 구경조차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드는 갖가지 욕구불만보다 더 서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

"......"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도 없이 차갑게 무시하고 지나가는 기레스를 보자, 티나는 서슬퍼런 칼날에 속이 도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능욕이 끝났을 때에도 기레스는 자신을 피해다니곤 했지만, 일일히 '흥분하거나' '당황하거나' '피해다닌다는' 반응 정도는 있었지만, 지금의 기레스는 땅바닥을 기는 개미를 보고 지나가는 것처럼 그런 자잘한 반응조차도 없다.

마음 같아선 살살 도발하는 척, 기레스를 유혹하면서 장난치고 싶지만, 사람을 놀리거나 농담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것이 허용될 분위기라는 게 있다.

능욕이 끝난 직후에는 기레스가 어느 정도 미안해 하는 것도 있고, 서로 간에 빚을 진 상태이기도 하겠다, 어느 정도 도발하고 놀려도 알음알음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지만, 지금 자신에게 실망하다 못해 경멸하다시피 정색하고 있는 기레스를 상대로는 색기를 은근히 내비치며 놀리는 것이 허용될 리가 없었다.

박수도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것이라고, 저렇게 질색하며 정색하는 기레스를 상대로 눈치도 없이 도발해댈 수는 없어서, 티나는 기레스와 최근 접촉은 커녕 말 한마디도 나눌 기회를 얻지 못했다.

섹스나 속옷을 훔칠 수 없다는 것 보다도, 그 점이 가장 서러운 티나는 방 안으로 들어와 죽은 자식 불알이라도 만지는 듯, 이미 냄새가 빠질대로 빠진 기레스의 속옷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스읍]

"흐흑.."

방금 전에도 벌레 보는 듯한 시선으로 지나가는 기레스를 본 티나는 기레스의 팬티에 눈물을 훔쳤다.

쾌락이고 나발이고, 자신의 몸에 흥분하거나 건방지게 거들먹 거리는 기레스의 모습만 볼 수 있어도 티나는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도대체 왜 그리 화난걸까?'

어차피 시간은 썩어날 만큼 있었기에 침대 위에서 기레스의 속옷을 반찬삼아 애써 자신을 달래던 와중, 티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한동안은 잘만 사댔으면서..'

"흑.."

분명 처음에는 기레스도 좋다고 티나의 몸을 사대며 좋아했던 것을 떠올리자,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티나의 눈망울에 눈물이 고여버린다.

'돈이 떨어져서 못 안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정색하는거야... 처음에는 돈줄이든 뭐든 좋다는 듯이 줘놓고선..'

돈이 없어서 자신을 사지 못하는 것 까지는 좋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기레스에게 안기고 싶어서 돈으로 흥정해대고, 돈을 받겠다는 명분으로 유혹했다지만, 애초에 그런 계약이었는데 저렇게 원수 대하듯 할 건 뭐란 말인가?

'맨날 이렇게 뜬금없이 삐지기만 하고... 응?'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티나는 언젠가 능욕을 당할 때도, 이렇게 기레스가 뜬금없이 정색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스으읍]

눈을 감고 한번 속옷을 반찬삼아 심호흡 한 뒤에, 티나는 일전 능욕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기레스의 열등감이 폭발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아니, 아니지.. 이젠 날 몇번이고 가버리게 만들고 있으니까 딱히 성적인 열등감 같은 것도 없을텐데 왜..'

티나는 곰곰히 기레스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네 눈에는 내가 돈줄로밖에 안 보이지?]

'돈줄.. 아냐.... 아니긴 한데... 돈줄로'밖에' 라는 건...'

당시에는 울음이 터질 정도로 당황해서 잘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곰곰히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기레스의 발언은 돈줄로만 자신을 보지 말고 그 이상으로도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여지도 있는 발언이어서, 티나는 갑자기 몸이 후끈 달아올라 버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최근 기레스의 행보들이 상당히 신사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티나였다.

[떡정도 정이라고 이렇게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까 이런 걸 기회로 더 늘리지는 못하겠더라..]

노예 기간을 늘리려고 마음만 먹으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뽑아낼 수 있을텐데도, 복수하겠다고 육변기 취급까지 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편의를 봐줬던 기레스의 말이 티나의 머릿 속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설마..'

지금까지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기라도 하는 듯, 티나는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혹시... 날...?'

능욕이 끝나면 그냥 대등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배려인지 미안함 때문인지, 발정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전부 때문인지, 철저하게 자신을 피해 다녔던 기레스의 모습도 떠오른다.

'..... 음.. 그 색골 오빠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태어날때부터 열등했고, 마을단위로 철저히 배척 당해왔으며, 배척이 끝난 이후에도 괴롭힘만 없다 뿐이지 왕따를 당하는 건 마찬가지라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을 기레스다.

우연찮게 약점을 잡아 겨우겨우 안을 수 있었던 자신을 제외하면,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섹스는 구경도 못할 기레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과 섹스했는데 떡정이 얼마나 들었겠는가?

'맞아... 그렇게 생각하면... 돈줄로만 생각한다고 저렇게 정색하는 것도 맞아 떨어져....'

기본적으로 티나가 생각하는 기레스는 열등감 덩어리의 화신 같은 남자였다. 돈이 있을 때는 떡정이 든 자신을 안을 수 있어 마냥 좋았겠지만, 돈이 없을 때의 자신은 티나에게 무가치하다고 열등감을 느낀다면 저런 뜬금없는 정색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뭔가 한번 그렇다고 생각하니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딱 드러맞는 기분이다.

'나만해도 하일즈 오빠를 그렇게 좋아했는걸.. 동생이라곤 해도 그렇게나 날 안아 댔는데, 그 색골 오빠는 오죽 하겠어? 사... 사... 사랑까지는 아니어라도 최소한 돈줄 취급보다는 좋아해 줬으면 했겠지.. 아니.. 의외로 정말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

생기가 돌다 못해 얼굴을 홍당무처럼 발갛게 물들이곤 티나는 싱글벙글 소리 없이 꺄르르 거리면서 뒹굴 거리며 생각했다.

'그런데 난, 돈을 가지고 그렇게 흥정만 해대면서 유혹 해댔으니... 아니, 하지만 안기려면 어쩔 수 없잖아..!'

이미 기레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반쯤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티나는 뺨을 부풀려가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생각해 보면 너무 돈만 따지고, 칭찬 같은 건 안해준 것 같기도 하긴 하지만.. 그정도로 신음해 주면 척하면 척, 눈치 채야되는 거 아냐..?'

그렇게 불만과 후회를 번갈아가면서 되새김질 하던 중, 문득 기레스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능욕 늘릴 수 있는데도 그냥 끝내 줬으니까, 딱 한번만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되냐?]

'으읏...!'

그야말로 제멋대로 폭주하는 망상에 쐐기를 박아주는 말이었는지라, 티나는 기레스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따위, 싫어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속옷에 얼굴을 파묻고 헤실거렸다.

"이.. 바보 오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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