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티나(59)
* * *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냐?"
뭔가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 듯, 머뭇 거리는 태도로 기레스는 조심스럽게 티나에게 물었다.
"뭐, 뭔데.."
왜 말을 걸어 오냐는 듯한 불만스러운 어투로 툴툴 거리면서도 혹여나 기레스의 마음이 변할까, 재빨리 발을 놀려 기레스의 방 안에 쏙 들어온 티나였다.
'으으으~!'
기레스의 방에 오랜만에 들어서자마자 방금까지 저기압이었던 티나의 속은 흐무지게 풀어져 버렸다.
'좋아♥'
마치 오랜 시간 떠나 있던 고향에라도 되돌아 온 듯한 기분으로 부드럽게 숨을 들이키자, 사방팔방에서 풍기는 기레스의 체취에 티나의 몸은 달콤하게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으음.."
'뭔가 엄청 뜸들이네..'
평소 같았으면 뭐하냐고 사납게 따졌을테지만, 어차피 지금 자신의 방에 빨리 돌아가봐야 기다리고 있는 건 욕구불만의 스트레스 뿐이었기에, 티나는 군말 없이 기레스의 말을 기다렸다.
'음..'
그렇다고 해도, 아무 말도 없이 서서 기다리는 건 뭔가 뻘쭘한 일이어서 시선을 돌리자, 기레스의 침구가 티나의 눈에 들어왔다.
[꿀꺽]
슬쩍 머뭇대는 기레스의 눈치를 살피고 티나는 슬그머니 침대로 다가가 몸을 날려 누웠다.
'아아~!'
기레스의 체취로 듬뿍인 침대에 몸을 담그자 마자, 티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좋아 죽을 것만 같은 함박미소를 지었다.
"뭐, 뭐하는 거야?"
티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듯 따지는 기레스에게 티나는 입을 삐죽이면서 변명했다.
"불러놓고 이야기를 안하길래, 계속 서 있기도 뭐해서 누운건데.. 왜?"
"그래도 보통 내 침대에 눕냐? 알았어. 일단 여기 앉아."
기레스는 바닥의 탁자 옆에 방석을 깔면서 티나를 유도했다.
"방석을 깔 시간이 있으면 그냥 얼른 하려고 했던 말이나 얼른 하시지 그래?"
기레스의 침대에서 가급적이면 나가고 싶지 않은 티나는 어느새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가선 기레스에게 쏘아붙혔다.
"아니, 그러니까 왜 자꾸 들어가냐니까?"
"피곤한 사람 잡아 세운 게 누군데..?"
이불 안으로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눈이 뻑뻑해 지는 게 조금만 방심하면 기레스의 체취 속에서 바로 단잠이 들 것처럼 노곤해진 티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서 기레스를 탓하기 시작했다.
"알았어. 말할테니까 일단 일어나. 아무리 그래도 누워 있으면 나도 이야기 하기 힘들잖아."
'칫...'
티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나른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좆같이 뜸을 들이는 거야?"
침대 안의 즐거움을 방해 받아 짜증스럽게 쏘아 붙히는 티나의 눈 앞에서 기레스는 방바닥에 고개를 쳐박고 엎드렸다.
"!?"
"티, 티나.. 이런 부탁할 처지가 아닌 건, 아는데.. 몸 좀 만지게 해주지 않을래?"
"모, 몸이라니.. 미쳤어?"
말은 그렇게 해도 티나의 죽은 생선 같이 퀭했던 눈은 삽시간에 생기를 되찾아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몸을 만지고 싶다고..!?'
듣자마자 소름이 돛아야 할 기레스의 염치 없는 부탁에 티나의 온몸은 꿀이라도 발리는 것처럼 달콤한 쾌락으로 절여지기 시작했다.
"나도 최대한 참아보려고 했는데, 너는 매일 같이 도발해대지, 엄마는 저런 옷을 입지. 시발 꼴려서 어디 버틸 수가 있어야지."
"짐승새끼.."
그렇게 매도하면서도 티나의 마음은 그래서 좋다고 설레기만 하고 있었다.
"시발년아. 따지고 보면 네가 매일 같이 도발하지만 않았으면.."
그런 기레스의 원망섞인 푸념에 티나는 반성은커녕 지금까지 기레스에게 속살을 노출하며 유혹한 보람이 있다고 속으로 시시덕 거리며 좋아했다.
'후훗! 하긴 저 색골바보오빠인걸..'
피해자인 자신도 이렇게 기레스의 능욕을 잊지 못해서 반쯤 미쳐서 안달복달 하고 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몸을 맛 봤던 가해자인 기레스는 오죽 했겠는가..
'이렇게 얼굴에 철판까지 깔면서 나한테 사정해 올 정도면..'
기레스가 얼마나 발정나, 심적 고통이 심했을 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티나였다. 바로 자신만 해도, 어떻게든 기레스에게 은근히 범해지려고 이것 저것 온갖가지 시도를 다 해본 터였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욕실에서까지 자위 했겠어.'
그냥 냅뒀어도 원숭이처럼 자위해댔을텐데 자신이 유혹까지 했으니 기레스가 이렇게 폭주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헤헤.'
기레스가 자신 때문에 흥분했다는 생각을 하니 티나의 몸도 절로 달아올라서 살짝 젖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부탁 하나 했다고 받아주긴 힘든데..'
기레스와의 사이가 하일즈만큼 좋았거나, 혹은 기레스가 강제로 협박이라도 해주면 어떻게든 지는 척, 받아 들일 수 있었을테지만, 이렇게 부탁만으로는 어딘지 받아주기 힘든 게 기레스와 티나의 관계였다.
'으.. 하지만...!'
그렇다고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도 없어서 티나는 침대 위에서 눈썹을 꿈틀거리며 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해주겠다고.. 말해야 돼? 안된다고 잡아 떼?'
후자는 절대로 선택하고 싶지 않지만, 아무리 쾌락에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어도 전자도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대체 뭐가 이쁘다고 기레스의 부탁을 들어서 몸을 내주겠는가?
그렇게 이도저도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티나에게 기레스가 말했다.
"싫어 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나, 나도 맨 입으로 해달라는 건 아냐."
"응?"
"그.. 한번 만지게 해 줄 때마다, 돈을 줄게. 20만 에보나 정도면 어때?"
"20만...!? 그런 돈이 있어?"
"클로에 협박하다 남은 돈이 좀 있거든.."
"20..."
이미 속에선 답을 다 내놓은 티나는 괜히 망설이는 척을 하면서 숫자를 되뇌였다.
'10... 아니, 5여도 괜찮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 이하는 너무 싸지만.. 저 바보는 도대체 왜 저렇게 높게 부른 거람. 돈이 썩어 넘치나?'
돈이라는 명분 덕에 기레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금액을 너무 높게 부른 기레스가 티나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아, 안되면 3.."
"할게!"
기레스가 금액을 더 높히려는 기색을 보이자 마자 티나는 단칼에 기레스의 말을 가로 막으며 허락했다.
"뭐?"
"나, 나도 요즘 급하게 돈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꽤 곤란하던 참이었어. 사실은 너같은 놈한테는 정말 만져지기 싫지만, 돈을 그렇게나 주겠다면 어쩔 수.. 없지 뭐.."
'휴우..'
하마터면 늦을뻔 했다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티나를 따라하기라도 하듯, 기레스도 이마에 땀을 닦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휴우.. 다행이다."
"원숭이 새끼. 그렇게 안심할 정도로 발정 났어?"
"뭐, 그것도 있고.. 난, 여자랑 인연이 없잖아?"
'어?'
이미 티나 못지 않은 여자를 둘이나 데리고 질펀하게 노는 주제에 기레스는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술술 티나를 속여 나갔다.
"100만 에보나를 쏟아 부어도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너 말고는 없었단 말이지."
"우으.. 그게 여동생한테 할 소리야?"
자신밖에 없다는 기레스의 말에 티나는 뺨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틱틱 거렸다.
"여동생이면 그딴 도발이나 하지 말지. 복수에 눈이 멀어서는 그렇게 매일 같이 속살을 보여대는데.. 내가 시발 얼마나.."
그렇게 힘들고 서러워 죽겠다는 듯이, 욕지꺼리를 하는 기레스의 바지는 뚫릴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아..."
'후훗..'
기레스의 발기를 확인한 티나는 요망하게 눈웃음 지으면서 기레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그냥 몸을 만지기만 하는 걸로 만족 하겠어? 그 조건이면 난 가만히 있을건데?"
슬그머니 옷을 깔딱 거리면서 도발하는 티나에게 기레스는 침울한 어투로 말했다.
"만족해야지 어쩔 수 있냐? 전처럼 노예 취급 하면서 애무하라고 할 수는 없잖냐. 애초에 들어주지도 않을 게 뻔하고.."
"...... 돈.."
그런 기레스에게 티나는 예쁜 입술을 우물 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돈.. 조금만 더 주면.. 해줄게."
"저, 정말!?"
흥분해서 정신 못차리고 좋아하는 기레스에게 티나는 눈을 슬쩍 돌리면서 샐죽한 척하며 말했다.
"마, 말했잖아. 나도 돈이 필요한 일이 있다고.."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그, 그럼 애무는 시,"
"'5만' 에보나 늘려주면.. 애무도.. 해 줄게."
티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기레스의 말을 잘라내며 먼저 금액을 선제시해 버렸다.
이렇게 '먼저' 못 박아 두면 기레스가 금액을 더 늘릴 수가 없다는 것을 티나는 지난 날, 능욕을 당했을 때의 교훈으로 뼈져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오늘부터... 할거야?"
살짝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티나는 서 있는 기레스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 고혹적이면서도 귀여워, 여성의 아리따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티나의 자태에 기레스는 흥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런 자신의 매력에 안달 난 기레스를 보는 티나의 마음도 덩달아 쿵쿵 거리며 떨려온다.
"당연히 해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