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티나(44)
* * *
결국 소피아와 클로에의 승부는 무난하게 클로에의 패배로 끝났다.
'음?'
소피아에게 패배 했음에도 클로에의 표정은 어둡기는커녕 되려 상쾌한 느낌까지 들 정도로 후련해 보인다.
"후우... 하아.."
클로에의 새하얀 피부는 땀에 축축히 젖어 반들 거리고 있었다. 땀에 젖은 청은색의 생머리와 뺨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을 본 기레스는 순간 그 모습이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클로에가 이정도로 땀을 흘리다니..'
기레스는 자신을 단련 시킬 때는 얄미울 정도로 지치지 않았던 클로에를 떠올렸다.
자신과 달릴 때는 체력이 마르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클로에가 저정도로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일 정도면, 얼마나 열정적으로 노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소피아는 어떨까?'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클로에에 비하면 소피아의 상태는 상당히 여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소피아라고 이 더운 날, 클로에를 상대로 땀 하나 흘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는지, 입고 있는 흰색의 면 옷은 비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속살에 달라 붙어 있었다.
음란함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 클로에와는 정반대로, 몸매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소피아의 몸뚱아리에 벌어진 요염한 자태에 기레스의 아랫도리에는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안되지. 일단은 클로에한테 집중하지 않으면..'
하지만 소피아의 알몸 따위야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저렇게 아슬아슬한 소피아는 쉽사리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어서, 기레스는 몇번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고개를 딱딱히 고정 시키고 기레스가 다가오자, 클로에는 숨을 고르면서 기레스의 이름을 불렀다.
"후우... 기레스."
"클로에. 수고 많았어."
"응. 역시 아줌마는 대단하시네."
클로에가 기레스의 앞에서 순순히 소피아를 칭찬하자, 기레스는 작은 목소리로 클로에에게 속삭였다.
"아쉽게도 후려주지는 못하겠네."
"으... 졌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뺨을 물들이며 살짝 귀엽게 불만을 내비치긴 했지만, 소피아의 모성애로 호감이 올라간 클로에에게선 이전만큼의 독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클로에의 태도를 보고 기레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역시 같이 승부를 벌이는 사이에 뭔 일 있었나?'
절벽 위에서 기레스에게로 돌아가는 2회전을 시작하고 클로에는 클로에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소피아를 잡아 보려 했지만, 결국 끝끝내 소피아를 잡아내지 못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냈음에도 속도로도, 기술로도, 체력으로도 무엇하나 따라잡을 수 없는 벽을 느낀 클로에는 순수하게 소피아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했어.'
소피아의 기레스를 향한 모성애를 보고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꽤나 순수하게 질투심을 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소피아의 능력은 압도적이었다.
클로에는 머릿 속으로 다시금 소피아를 쫓았을 때를 되새김질 해보았다. 지금까지는 타고난 재능만으로도 모든 것들을 수준 이상으로 해낼 수 있었기에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클로에는 소피아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그런 경지를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클로에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흐음~ 역시 클로에네.'
살짝 떨어진 곳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소피아는 클로에가 명상하는 것을 보고 재능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알려줘도 하나를 배울까 말까한 인간은 삼류요, 알려주면 그 중 몇가지라도 제대로 익힐 수 있으면 이류, 알려준 것을 알려준 만큼 배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일류라 할 수 있다. 그리고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해답을 찾아 더한 경지에 오르는 인간은 그런 구분으로 묶어두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천재라고 불리운다.
물론 스스로 답을 찾아내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천재라고 무조건 대성하는 것은 아니다.
기레스가 하일즈에게 잘못된 안마를 알려줘서 하일즈와 클로에의 사이가 나락까지 굴러 떨어진 것처럼, 그럴 마음은 없지만 여기서 소피아가 클로에에게 잘못된 버릇을 만들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천재는 순식간에 범재보다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음.. 이제 클로에의 실력도 어느 정도 알았고.. 어떻게 가르치면 좋으려나..?'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가르칠 생각이에요?"
클로에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후, 기레스는 소피아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기레스는 클로에에게든, 소피아에게든 1:1로 강습을 받는 방식으로 배워 왔지만, 이렇게 소피아의 수업 아래에 클로에가 끼게 되면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할 수는 없다.
소피아는 클로에든 기레스든 가르칠 능력이 되지만, 클로에를 기준으로 단련을 하게되면 술래잡기때 자연스럽게 열외된 것처럼 기레스가 따라갈 수가 없게 되고, 기레스를 기준으로 단련을 하게 되면 클로에 쪽이 단련이 되지 않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조금 생각해 봤는데, 일단 기레스의 기초 체력 단련은, 나랑 클로에가 번갈아 가면서 도와 주는 게 어떨까 싶어. 예전에도 기레스을 가르쳐 줬다고 했으니까.. 기초 체력 단련 정도는 클로에도 도와줄 수 있지?"
"네!"
당연히 클로에로서는 바라는 바여서 칼같이 대답했다.
'기레스와 더 사이 좋아지라고 기회를 만들어 주시나 보네.'
클로에는 벽 위에서 잘 부탁한다고 했던 소피아의 말을 떠올리면서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저런 식으로 구워 삶았구만..'
옆에서 소피아든, 클로에든 내막을 다 알고 있는 기레스가 보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각이 보여서 기레스는 나중에 소피아한테 상을 줘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누가 단련 시키든, 다음은 적당히 클로에의 체력 단련을 하도록 하고..그 뒤에는 삼각 대련을 할까 싶어."
"삼각 대련이 뭔데요?"
"방금 말했던 번갈아 가면서 단련하는 것과 비슷한데.. 항상 하던 나와 기레스의 대련은 고정. 그 뒤에는 클로에와 내가 대련할 거야. 그리고 마지막은 기레스와 클로에가 대련함으로서 세명이 각자 다른 한명과 겨뤄보는거지."
"굳이 세명이서 그렇게 번갈아 가면서 할 필요가 있어요? 사실 저야 방어기술만 배우고 있는 거니까 지금처럼 엄마한테 배우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 싶은데.."
기레스는 소피아와 대련해야 하는 건 필수지만, 클로에와 대련 하는 건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클로에와 한번 합을 섞었을 때의 기분은 확실히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죽을뻔 한데다'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 일과에 클로에와의 대련까지 더해진다고 생각하니 기레스는 살짝 머리가 아득해 졌다.
"충분하지 않아. 아마 이걸 하게 되면 기레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실력이 늘어날 수 있을테니까."
"진짜요?"
지금도 눈을 감고도 공격을 막고 피하고 흘리는 달인 같은 느낌에 살짝 붕 뜬 기분인데, 지금보다 더한 실력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기레스는 우는 소리가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맛있는 과실을 따먹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있다.
"기레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그리고 클로에는 기레스와 대련할 때는 기레스의 수준에 움직임을 맞춰서 공격할 것."
"?? 강하게 와야 서로 단련이 되는 거 아니에요? 죽고 싶지는 않지만.."
"기레스!"
묵묵히 소피아의 설명을 듣고 있던 클로에는 답지 않게 와락 소리치며 따지고 들었다.
"농담이야. 농담."
"후훗. 사이 좋네."
소피아는 둘이 친해 보여서 좋다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반대야. 기레스. 클로에가 진지하게 해주면 기레스 너는 단련이 되어도, 클로에한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반대로 클로에가 기레스의 움직임에 맞춰서 공격해 주면 둘 다, 상당히 대련하는 효과를 볼 수 있을거고. 이왕 같이 단련하기로 했으니까.. 서로가 서로한테 도움이 되는 쪽이 낫지 않겠어?"
"그렇죠."
'나야 뭐 살살하면 나쁠 건 없겠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는 기레스를 보고 소피아는 싱긋 거리며 말했다.
"자..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오늘부터 한번 시작해 볼까?"
그렇게 클로에와 함께하는 대련의 첫 날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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