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티나(38)
* * *
"그럼 규칙은 어느 한 쪽이 전투불능이 되거나 항복을 할 때까지인걸로 하고.."
"잠깐만요. 엄마. 전투불능이면 기절할 때까지 싸우라는거에요?"
기레스는 소피아가 하라는 대로 어울려 줄 생각이었지만 규칙에 살짝 불안해 하며 물었다.
"꼭 기절하거나 죽어야 전투불능은 아니니까. 단순하게 제압 당하거나 승부가 났다 싶으면 내가 알아서 제지하려고 해. 하지만 기레스가 걱정하는 것도 일리는 있네. 대련이니까 심하게 다칠 정도의 공격은 하지 않는 걸로 하자. 괜찮지? 클로에?"
"괜찮아요."
클로에는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하곤 기레스와 마주섰다. 무심한 듯, 평범하게 서 있는 것 같지만 어째선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클로에 녀석 어째 의욕이 넘치는 거 같아 보이는데..'
"그럼 기레스. 잘 부탁해."
"후우... 살살 좀 부탁한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기레스도 클로에 앞에 섰다.
"자, 그럼.. 시작!"
'어쩔 수 없지.'
소피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기레스는 장단을 맞춰주기로 이미 결정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것이 끝나기도 전에 한달음에 클로에는 기레스와의 거리를 좁혀 버렸다.
'우왁.'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적잖게 당황하는 와중에도 기레스는 능숙하게 클로에의 공격을 받아 흘려 넘기고는 거리를 벌렸다.
"어..?"
클로에는 그녀답지 않게 놀란 토끼 눈을 하곤 기레스를 빤히 바라본다.
'클로에 녀석 너무 얕보는데?'
소피아의 대련은 무자비한 편이다. 다칠 가능성은 0에 수렴할 정도로 안전하게 대련하지만 안전의 범주 내에서는 귀신 같이 한도 끝까지 쥐어짜는 타입이어서, 수련을 할때면 기레스는 시도 때도 없는 소피아의 공격을 받아 넘겨야만 했다.
언제 어느 때든 '합법적 안전기'인 젤가의 고문기로 지옥같은 조교를 당한 기레스는 어지간한 기습 공격 정도는 이제 쉽사리 반응할 수 있었다.
'저렇게 힘을 뺀 기습을 하다니.. 나야 살살해줘서 고맙기야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병신 같은 자신을 얕보는 것도 이해하고, 살살해준 것에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감성적인 소감은 조금 달랐다.
배가 고플 때와 배가 부를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클로에의 저정도 공격은 쉽게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니 어쩐지 너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든 것이다.
"후우.. 읏!"
클로에는 한차례 숨을 고르고 아까보다 더 빠르게 기레스에게 달려들었다. 쇄도하는 공격은 이전의 기레스라면 단 한차례의 공격조차도 눈으로 파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거센 맹공이었지만 지금의 기레스는 다르다.
'아까보다 좀 빡빡하긴 해도 이정도라면..'
기본적인 속도가 확연히 차이나도 기레스는 어찌저찌 요령좋게 클로에의 공격을 대처해 나간다.
'살살하라고 했더니 진짜로 힘을 빼주긴 하는가 보네.'
기레스와 클로에가 체력훈련을 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당연히 기레스는 클로에가 자신보다 몇배는 더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한번 행동할 때 클로에는 3~4번을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신체능력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당연히 기레스가 막을 수 있어도 연달아 공격해 오면 결국에는 뚫리게 되어 있다. 소피아는 기레스의 단련을 위해 의도적으로 공격을 맞춰주고 있었지만 지금의 대련은 어디까지나 승부로 성립되어 있기에, 작정하고 클로에가 공격을 들어오면 기레스가 당해내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클로에는 강맹하게 기레스가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횟수로 공격은 해와도 연격으로 찍어 누르지는 않고 있었다.
'하일즈와는 다르게 나는 정확한 공격 하나만 맞아도 황천길이니까 힘을 빼고 싸워주고 있기라도 하나? 소피아가 덧붙힌 룰 때문에 생각보다는 싸움이 되는데?'
대련이니까 너무 심한 상처가 나지 않는 선에서 기레스를 전투불능으로 만들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일즈와 다르게 기레스는 너무 연약하기 때문이다.
하일즈에게는 다소 강한 공격을 해거나 정통으로 공격을 먹여도 큰 상처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레스가 상대라면 다르다.
생각보다 기레스가 잘 막고 피한다고 하일즈를 대하듯 대하다가 정통으로 어디 하나 맞춰 버리게 되면 기레스가 반병신이 되는 건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런 배려해 주는 공격 덕분에 기레스는 마치 영화의 액션 씬을 찍는 것처럼 쇄도하는 클로에의 공격에 맞춰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나 대련 한답시고 대련하긴 했지만, 소피아한테 공격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네. 어찌해야 되나?'
소피아와의 대련은 항상 소피아가 공격하고 기레스가 거기에 반응해 막는 것으로 진행되어 왔다. 때문에 기레스는 클로에의 공격에 꽤나 능숙하게 대응하면서도 공격다운 공격은 무엇하나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로에를 상대로 나름대로 싸움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건 좋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대련의 승패는 시작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거나 다름 없었다.
"하아.. 허어. 후우.."
기레스는 클로에의 공격을 흘려내고 숨을 고른 후 한차례 미소지었다.
클로에가 손대중 해주고 있다곤 하지만 기레스는 이정도면 꽤나 선방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항상 낙제점을 면하지 못한 아이가 60점을 넘어 향상심에 다음 시험을 기대하는 것처럼, 시작은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지친 와중에도 기레스는 조금만 더 클로에와 대련의 합을 겨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칫.."
'응?'
클로에는 짧게 혀를 차고는 기레스와 거리를 벌렸다. 어딘지 성에 안차는 듯, 매사 무표정 했던 클로에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서려 있었다.
'쉽게 제압하지 못해서 짜증이 났나? 생각보다 승부욕 있네.'
매사 고지식해서 어떤 일이든 진지한 클로에 답다면 답지만, 설마하니 자신을 상대로 클로에가 저런 반응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기레스는 짐짓 놀라고 있었다.
'좋아. 여기서는 조금 클로에의 자존심을 세워줄까?'
그렇게 마음 먹고 기레스는 클로에의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물론 의도적으로 져줄 생각은 없다.
애초에 클로에가 전력을 다하면 당연히 이길 수 없는 승부이니만큼 져준다가 성립되지도 않을 뿐더러, 저 고지식한 클로에라면 고의로 질 경우 더 기분이 상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흡! 후우우.. 허억.."
클로에의 다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기레스는 종이 한장 차이로 피하면서 심호흡 했다. 한땀 한땀 클로에와 합을 교환한 기레스는 소피아 때와는 다르게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연기는 아니다. 클로에와의 어딘지 실전 같은 대련은 평소 소피아와 겨룰 때와는 다르게 굉장한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충분히 버틸만한 여력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아질 것은 분명해 보였다.
'좋아.'
의도적으로 져줄 생각은 없지만 기레스의 예상 외 저항에 클로에가 기분이 언짢아졌다면 기분을 풀어주는 것은 간단하다.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밑천을 까발려 주면 되는 것이다.
체력이 없는 와중에도 기레스는 클로에의 공격을 놓치지 않고 흘려낸다. 이대로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막다가 져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기레스는 여기선 클로에의 자존심을 챙겨주기로 마음먹었다.
"허억.. 허어. 읏!"
마침 체력도 없겠다. 이대로는 말라 비틀어질게 뻔하니 상황적으로는 딱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기레스는 기교 없이 정면으로 날아드는 클로에의 쇠망치 같은 공격을 종이 한장 차이로 피해내고 그대로 클로에의 빈틈처럼 보이는 얼굴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흐아아아앗!"
클로에라면 당연히 피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기에 연기도 뭣도 없는 진심을 다한 시원한 풀스윙이다.
누가봐도 기레스 나름의 최선을 다한 일발 역전을 노린 회심의 공격처럼 보였지만, 당연히 소피아에게도 클로에에게도 배운 적 없는 공격이 제대로 일리가 없어서 엉망으로 휘둘러진 공격은 그대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몸의 자세가 완벽하게 무너진 기레스는 다음 있을 클로에의 공격을 각오했다.
'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소피아에게 조교당한 몸은 클로에의 다음 공격이 어디로 날아올지 알아 버린다. 하지만 방금 전 꼴사나운 공격 덕에 물리적으로 막아낼 시간이 없다.
분명 전광석화처럼 쇄도하는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클로에의 주먹이 느릿하게 느껴진다.
'뭐지.. 뭔가 시간이 느리게 가는거 같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으로 클로에의 궤적을 쫓으니 식은 땀이 흐른다.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멈춘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기레스는 클로에의 표정을 보았다.
클로에라면 당연히 살살 쳐주겠거니 싶었지만 기레스를 가격하기 위해 준비한 클로에의 자세와 차가운 눈빛은 봐주려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어... 어어? 이거 위험한 거 아냐?'
1초가 아득하게 느껴질 시간동안 몇가지 생각이 멤도는 기이한 감각 속에서 기레스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예감했다.
"으아아아.... 어..?"
기레스는 클로에를 향해 풀스윙으로 공격한 자세 그대로 잠시 멈춰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자.. 자.. 클로에, 승부는 이걸로 끝이야. 이런 공격을 기레스가 받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구."
언제 사이에 끼어들었는지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클로에와 기레스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정확하게 클로에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앗.. 아.. 아아....!"
소피아가 자신의 주먹을 받아쥔 손을 풀어주자 클로에는 그녀답지 않게 안절부절 못하고 혼란해 하다가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엉?"
책임감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클로에의 행동이 아니었는지라 기레스는 벙찐 와중에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쩍 어찌된 일인지 소피아를 돌아보면 소피아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클로에가 사라지고 잠시, 정적이 지나고 소피아는 난처한 듯 머뭇거리면서 기레스에게 말했다.
"으... 미안. 기레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뭐?"
"클로에의 반응이 귀여워서 조금 놀려본 건데.. 설마 클로에가 저렇게까지 이성을 잃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항상 서글서글하니 여유로웠던 소피아도 오랜만에 진심으로 당황했는지 쭈뼛쭈뼛 거리고 있었다.
다소 짓궂게 클로에를 놀리기는 했지만, 매사 냉정 침착하기로 소문난 클로에가 저런 돌발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음..."
비단 소피아 뿐 아니라 기레스도 클로에의 행동에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일전에 클로에가 자신의 앞에서 애액을 지린 후 이성을 잃었던 것을 떠올린 기레스는 클로에라면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매사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해 보이는 클로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 때의 일이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는 클로에가 한없이 약해진다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전전긍긍하며 미안해 하는 소피아를 앞에 두고 기레스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기레스?"
"하여간 쓸데 없는 짓을 해대기는.. 어쩔 수 없지. 일단 클로에를 만나고 올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말하곤 기레스는 냅다 클로에가 사라진 방향 쪽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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