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45화 (145/238)

〈 145화 〉 티나(37)

* * *

기레스와 화장실에서의 밀회 후, 클로에의 마음은 심란해졌다. 본방도 없는 잠시의 희롱이었을 뿐이었지만, 여자 화장실에서 잠시나마 즐겼던 그 은밀한 유희는 클로에의 욕망의 둑에 금이 가게 만들어 버렸다.

차라리 금식을 하면 참을 수 있어도 어중간하게 맛있는 음식을 담기 시작하면 참을 수 없다고,기레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잘 참아왔지만밀회의 달콤함에 취한 클로에의 욕망의 구멍은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벌어져 나갔다.

욕망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이 팽창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 이성을 잃을 수는 없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고, 여기서 아집을 부려가면서 기레스에게 접근하다가 일이 틀어지면 몇 달 못 볼 것을 평생 못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피아에게 역할을 빼앗겨 버리긴 했지만 원조 과외선생이었던 클로에는 기레스와 겹치는 수업이 많았다.

따로 만나거나 같이 있을 수는 없지만 같은 장소에 있을 기회는 많다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클로에한테 다시금 은밀한 취미를 만들어 주었다.

한창의 수업, 누가 봐도 열심히 공부한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성실히 수업을 듣는 척 하는 클로에의 눈동자는 은밀히 기레스를 쫓고 있었다.

한여름이라 반팔을 입어 노출된 기레스의 팔에 시선을 고정한 클로에는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살짝 이를 갈았다.

[으득]

기레스의 몸은 날이 가면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물론 좋아져봐야 내로라 하는 이세계 사람들과는 아직 비교할 꺼리조차 되지 못했고 학급의 누구도 기레스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에 불과했지만, 기레스와 수업만 겹쳤다 하면 수업은 뒷전으로, 기레스를 감상하기 일쑤인 클로에의 눈에는 하루하루 그 변화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레스의 변화를 볼때면 볼때마다 클로에의 속은 시큰거린다.

'내.... 역할인데...'

기레스가 성장하는 일이라면 진심으로 쌍수를 들어가며 반겼어야 정상이었을 클로에의 표정엔 역력히 불만이 기색이 서려 있다.

비밀스레 자신만이 기레스에게 해줄 수 있었던 역할을 빼앗긴 듯한 느낌에 기레스의 몸이 좋아지면 좋아 질수록 클로에의 마음은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기레스를 만나는 모습만 보이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티나든, 티나의 친구든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감시할 수는 없다.

설사 감시하고 있다고 해도 클로에 본인이 기레스에게 접근하거나 기레스가 클로에에게 접근하지 않는 한,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 되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클로에는 그 날 이후 티나도 은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뭔가 울그락불그락거리거나, 신경질적이 되거나, 상쾌한 얼굴이 되었다거나, 안절부절 못하는 티나의 변화를 보면서 클로에는 은근히 동질감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은 티나의 갖가지 반응을 봐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지만, 기레스의 손맛을 아는 클로에는 티나의 반응 하나하나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납득이 되었다.

'보아하니 나는 이미 까맣게 잊은 모양인데..?'

기레스에게 처음 능욕을 당할 무렵, 티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클로에를 감시해댔지만, 기레스의 손에 길들어져서 쾌락에 온 정신이 팔린 지금의 티나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없다.

그렇게 티나의 미행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에는 학교 내에서 기레스를 만나는 것은 보는 눈 때문에 무리여도, 따로 움직이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흐음..'

발그스레한 홍조를 띄우고 이 더운 여름에도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쌕쌕이며 은근히 안절부절 못하는 티나를 보면서 클로에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부러워..'

그로부터 얼마 후, 티나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확신한 클로에는 방과 후, 티나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곤 기레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변을 살피고 남들의 시선에 띄지 않도록 은밀히 이동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마을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기레스나 소피아한테도 들키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에, 클로에는 기레스의 시야 밖에서 관계 없는 사람인양 기레스의 발자취만을 추적해 미행했다.

'찾았다.'

마을에 수년 간을 살아오면서도 한번도 와보지 못한 마을의 변두리의 숲에 와서야 클로에는 기레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천천히 기척을 지우고 클로에는 소피아와 기레스를 향해 다가갔다.

'읏..'

여자인 자신이 봐도 너무 아름다운 소피아를 보면서 클로에는 고운 미간을 구겼다. 티나만 아니었어도 저 위치에 있을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따끔따끔 거린다.

그렇게 클로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소피아는 헐거워서 소박하게만 보였던 옷을 싸매 맵씨 있게 가꾸었다.

움켜쥐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모양 좋게 솟은 가슴으로부터 시작해 우윳빛 피부를 훤히 드러낸 아리따운 허리를 지나, 착 달라붙어 잘록한 굴곡에 화룡점정을 찍어주는 풍만한 골반에 이르는 소피아의 몸매는 지켜보는 클로에의 마음을 한껏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빠직]

그것 뿐이랴, 그런 소피아를 앞에 둔 기레스의 반쯤 홀린 표정까지 더해지자 클로에가 몸을 숨기고 잡고 있던 나무는 그대로 악력에 뜯겨져 나갔다.

'으.... 기레스으..!'

차마 나설 수는 없어 속으로 발만 동동 굴렀지만 클로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레스가 소피아를 만나기 전에 몰래 기레스만을 따로 만났다면 모를까, 이제와서 하일즈의 약혼자인 자신이 뜬금없이 이런 변두리까지 찾아와 소피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괜히.. 왔나..?'

모르는 게 약이라고, 기레스가 어떤 수업을 받는지 알아봐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염장질만 당하는 기분이 된 클로에가 살작 후회하고 있을 때, 기레스를 향한 소피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소피아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 기레스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의 폭력을 보면서 클로에가 바로 떠올린 것은 '괴롭힘'이었다.

살면서 클로에는 크게 후회를 해본 적이 많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특유의 책임의식과 재능을 가지고 대부분 극복해 내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한가지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무어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기레스의 괴롭힘을 막지 못한 것을 꼽을 정도로 클로에는 과거 주변에, 특히 기레스에 무심했던 자신을 후회하고 있었다.

기레스와 어울린 이후로 클로에는 항상 그런 죄의식을 마음 속에 간직해 왔다. 그런 클로에가 흡사 소피아의 장난감이라도 된 것처럼 정신없이 바닥을 나뒹구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기레스를 두 눈으로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으윽.."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던 기레스의 몸이 휘청이는 것과 그것을 잔혹하게 걷어차려는 소피아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클로에는 이성 따위는 내다 버리고 몸을 날렸다.

"어라? 클로에잖니?"

소피아는 마치 의외의 상황에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질렀던 다리를 황급히 회수했다. 그 순박하게 뻘뻘 거리는 소피아의 태도는 아랑곳 하지 않고 클로에는 소피아의 다리를 막아 시큰거리는 손을 보고는 생각했다.

'막지 않았으면 기레스의 얼굴은..'

클로에는 원수라도 보는 듯한 차가운 눈으로 소피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지금.. 뭘 하고 있는겁니까!"

"뭘 하다니..?"

"기레스를 괴롭히고 있었잖아요!"

"괴롭히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나는 기레스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대련하고 있었던 것 뿐인데.."

"거짓말 하지 마세요. 이미 진작부터 다 보고 있었으니까.. 기레스를 그렇게 괴롭혀 가면서 아줌마는 웃고 있었잖아요."

'엥.. 그랬던거야?'

막기에 급급한데다 오싹한 두려움까지 느꼈기에 기레스는 소피아의 표정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클로에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확실히 하일즈나 티나를 괴롭힐 때의 미소를 느꼈던 것도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클로에는 뒤돌아 보면서 안도한 듯, 누그러진 표정으로 기레스에게 물었다.

"기레스 괜찮아?"

"어? 어.."

'역시 여기선 내가 소피아의 해명을 해줘야 되나?'

기레스가 어떻게 해명할지 변명을 살짝 고민하고 있을때 소피아는 방금까지 지독하게 기레스를 굴렸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했다.

"클로에 그건 오해야."

"뭐가 오해라는거죠?"

답하는 클로에의 말투에는 냉기가 풀풀 휘날린다.

"난 기레스를 괴롭힌 적이 없거든."

"무슨.. 방금까지 웃으면서.."

"흠.. 그러니까 클로에 네가 오해한 건, 내가 기레스와 '대련'하면서 웃었기 때문이라는거네?"

"네? 아니.. 뭐.."

소피아의 물음을 듣고 이성을 되찾고 보니 기세좋게 나오기는 했지만, 클로에는 사실상 심증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레스가 그렇게 괴로워 하고 있는데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잖아요."

"충분히 봐주고 있었어. 힘들지 않으면 성장도 없으니까 조금 몰아붙힌 것 뿐이야."

"하지만.. 제가 막지 않았으면 기레스의 얼굴은.."

소피아는 대답 대신 클로에의 얼굴을 향해 발을 날렸다. 순간 머리가 날아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맹렬하게 쇄도한 소피아의 다리는 종이 한 장 차이로 클로에의 눈 앞에서 멈춰 있었다.

"읏..!?"

"막지 않았어도 멈출 생각이었어. 상식적으로 기레스를 그런 식으로 걷어찰 리가 없잖아."

하나 하나 차분히 반박하는 소피아의 알리바이에 클로에는 말문이 막히면서도 소피아가 기레스를 괴롭혔다는 그 느낌은 전혀 가시질 않았다.

"그럼.... 어째서 기레스가 그렇게 괴로워 하는 것을 보면서 웃은건데요?"

"그거야 기레스가 멋지게 성장한 게 기뻐서 웃은거지."

'뻥치시네..'

소피아의 그 변명에는 기레스마저도 기가 차서 콧방구를 낄 정도였다.

"그런.."

괴롭힘의 정체는 대련, 웃음의 정체는 아들의 성장이 기뻐서라고, 하나하나 끼워 맞춰서 우기면 클로에는 아니라고 강력히 따질 수 없다.

'아무리 봐도 기레스를 괴롭히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기레스 본인도 괴롭힘 당한다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클로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괴롭힌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뭔가 석연찮아 보이는 표정이네. 그럼.. 확인해 볼래?"

"네?"

"클로에. 네가 직접 기레스가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확인해 보면 어때?"

'.....'

방금 전 기레스를 괴롭힌다고 착각했을 때와는 다르게 소피아의 어조는 책 잡을게 전혀 없을 정도로 상냥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클로에는 소피아의 그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듣자하니 고맙게도 기레스의 면학과 단련에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하던데.."

[으득]

기레스와 자신만의 비밀이라면 비밀인 개인보습관계를 소피아가 알고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소피아의 입에서 들으니 클로에의 마음은 무언가로 꽉 틀어막힌 것처럼 답답해진다.

"어떻게 확인하라는건데요?"

"음.. 기레스와 직접 대련해 보는 건 어떨까?"

"뭐?"

소피아의 제안에 놀란 건 그다지 자신의 실력에 자신 없는 기레스였지만, 기레스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클로에는 동의하며 말했다.

"..... 알았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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