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티나(26)
* * *
단란한 식사시간, 티나는 흙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묵묵히 음식을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첫 키스를 빼앗긴 것도 빼앗긴 것이지만, 기레스가 주는 쾌락에 흠뻑 젖어버린 티나의 몸은 이미 자신의 어설픈 자위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미칠듯이 자위해 절정을 맞이하고 내려왔음에도 가슴은 시리고 머리는 어질거리는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냄새라도 있었다면..'
그런 누가봐도 변태 그 자체나 다름 없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티나에게 소피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티나.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니?"
걱정스러운 어투와는 달리 자신의 딸의 퀭한 모습을 보는 소피아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벼, 별일 없어요."
'훗.'
클로에와는 달리 기레스로부터 티나의 조교를 전부 들어 알고 있는 소피아는 티나의 대답과 태도가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가는 눈웃음을 지으며 소피아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네. 그냥 잠을 좀 설쳐서 피곤한 것 뿐이니까요... 걱정 마세요. 엄마."
'가족들에게 걱정을 하게 만들 순 없지. 쓸데없이 의심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티나는 눈에 힘을 주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식사가 끝날때까지 티나는 소피아가 기레스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맛있는 음식들의 맛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티나!"
"어..? 오빠?"
학교에 등교하기 전 하일즈는 티나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야?"
하일즈는 살짝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어머니는 조금 가볍게 넘기신 모양이지만..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하일즈의 조각같은 얼굴에선 걱정의 기색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일즈라는 인간은 기레스에게는 한없이 끔찍한 동생이지만, 티나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오빠였다.
'역시 하일즈 오빠라니까..'
티나는 기레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푸근하게 녹아내린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 하일즈라는 존재는 자신에게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지금까지 보아온 누구보다도 완벽한 남자였다. 설사 그것이 해서는 안될 연모라 할지라도 연모하는 남자의 진심어린 걱정을 좋아하지 않을 여인은 있을 리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로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 것 뿐이야. 오빠."
연모하기에 숨겨야 할 비밀이 있다.
자신을 팔아서라도 하일즈의 마음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현실은 티나의 거짓말에 기름칠을 해버리는 것이다. 하일즈가 티나를 진심으로 염려하면 염려할 수록 티나는 더더욱 자신의 능욕은 물론이거니와 기레스와 클로에의 진상을 밝힐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 오빠는 내가 지켜야 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정말로 뭔가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요즘 매일 같이 저녁에는 외출하곤 하잖아."
'위험해. 여기서 의심을 사게 되면..'
하일즈가 조금 더 걱정을 해 미행을 하게 되면 기레스의 능욕이, 더 나아가서는 클로에의 비밀이 발각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티나는 미리 생각해 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후우.. 조금 신경을 많이 써버렸나봐."
"뭐?"
"저녁에 외출하는거.. 친구를 만나서 공부를 봐주고 있는거거든."
'그러고 보니..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아버지에게 들었었지. 그게 놀러가는 게 아니었던건가?'
"그래? 그런데 신경이라니?"
"요즘 리움 사관학교로 온 마을이 들썩거리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 친구들 중에 조금 떨어지는 친구에게서 공부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 받았거든. 가르쳐 주고는 있는데 가르쳐 줘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 피곤했나봐."
"흐음.. 그렇군. 그런데 누구야 그 친구는? 나도 아는 사람인가?"
"응? 아, 있어. 오빠는 모르는 친구."
기레스가 사는 마을은 도시급에 준할 정도로 컸기에 자연히 학생 수도 여타 시골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여동생을 끔찍히 아끼는 오빠인데다 마을의 유명인사인 하일즈는 티나의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지위에 편집증적인 신경을 쓰는 하일즈는 어디까지나 지켜야 할 선은 지키는 선에서 티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아니겠지?"
반쯤 걱정이 풀어진 하일즈는 장난스레 티나에게 물었다.
'으읏..'
하늘이 쪼개져도 여기서 진실을 고할 수는 없다. 의심을 살만한 아주 조그마한 틈조차도 보이지 않도록 티나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기레스를 속이기 위해 자연스럽게 단련된 연기를 선보인다.
"남자라니..!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오빠는 날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거야?"
지그시 불만스럽게 쳐다보면서 쏘아붙히는 티나의 대처는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남자를 만나는 게 뭐 그리 날선 반응을 보일 정도의 일인가 싶지만, 티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하일즈의 앞에서만큼은 하일즈 외의 남성에 대해서 자주 부정적인 의도를 내비치곤 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남성 혐오가 느껴질 정도의 티나의 태도 때문에 하일즈는 단순히 알고 지내는 친구정도라면 모를까, 티나가 남자에게 연정을 주는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까지도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여동생이니만큼 아직 티나가 남자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것은 하일즈로서는 기쁜 소식일 뿐이다.
"아, 아니.. 이건 오빠로서의 당연한 관심으로..."
"그런 관심은 클로에 언니한테나 잘 챙겨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언니와는 요즘 잘 지내고 있어?"
"뭐.. 그럭저럭이지. 네 말대로 요즘 리움 사관학교의 시험에 집중한다고 자주 만나서 놀지는 못하고 있지만.."
'미안하신걸까?'
하일즈는 모르는, 기레스와 클로에의 사정을 알고 있는 티나는 멋대로 클로에가 하일즈에게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레짐작 해버렸다.
"아무튼 오빠가 걱정할 일 따위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말야."
"그래. 다행히 그런 모양이네. 하지만 친구를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건강이니까.. 너무 힘들면 친구에게 양해를 구해서라도 그만 두는 게 나을지도 몰라. 원한다면 공부 정도는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응. 하지만 괜찮아. 그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고.. 친구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서.. 걱정해 줘서 고마워 오빠."
"하핫. 남매 좋다는 게 뭐냐. 그럼 갈까?"
"응."
'앞으로 2주...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는 내가 지켜보이겠어.'
그렇게 티나는 욕구불만으로 메마른 육체를 감싸며 다시한번 다짐했다..
"끄으.. 으.. 으으으.."
"수고했어."
소피아의 무릎에 누워 기레스는 지끈거리는 의식을 살짝 놓았다. 분명 이전까지의 단련도 지옥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소피아의 기술을 익히기 위한 수련은 일전의 고통조차도 따위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혹독한 것이었다.
산 위에 산이 있고, 쾌락 위에 쾌락이 있는 것처럼, 고통 위에는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기레스 여기 준비해 둔 물건."
소피아는 기레스에게 무언가를 건네 주었다.
"음? 오늘 아침에 말한 건데 벌써 구했어?"
"이정도야 내가 손수 구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으니까.."
"마침 시간도 빠듯한데 잘 됐구만. 바로 시작할 수 있겠어."
'오늘은 나도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아무래도 보고 싶다고 기레스에게 전하면 방해가 될까 싶어 소피아는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고 조용히 생각했다.
'후훗. 티나의 표정이 기대되네.'
"좋아.."
하루 온종일 욕구불만으로 심신이 바짝바짝 메말라 버린 티나는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라도 본 것처럼 오두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하일즈 오빠를 지켜야 하기도 하고..'
낮의 일 때문인지 티나는 자연스레 하일즈를 팔아가면서 자신의 저열한 욕망을 변호했다.
물론 변호를 했다고는 해도 그 마음에 거짓은 없다. 하일즈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기레스를 싫어하는 것도 사실이며 지금 현재 변태같은 욕구불만으로 미칠 것 같은 것은 것도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문고리에 손을 걸자 욕구불만으로 꽉 막혀 썩어가던 마음은 물고라도 트인 듯 서서히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어! 왔냐?"
'뭐지?'
뭔가 자신 이상으로 지쳐 보이는 기레스의 몰골에 티나는 살짝 의아해 하며 옷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얼른 하고 끝내자고."
'얼른 하시고 싶으신가보지?'
티나의 상태 따위야 이미 기레스의 손바닥 안이다. 저항감이 없다 못해 조금은 다급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티나는 옷가짐을 훌렁훌렁 벗어 의자에 던져 버렸다.
"좋아.. 그럼 오늘도 한바탕 해보실.... 어...?"
일어나 실실 쪼개면서 티나에게 다가가려던 기레스는 순간 휘청거리며 자신의 코를 손으로 다급히 가렸다.
"으읍...!"
뭔가 넘쳐서 주체할 수 없다는 듯한 행동과 함께 기레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으..!"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린 손에서는 피가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아무리 싫어한다 싫어한다 노래를 부르며 되뇌이는 티나라고 해도 얼굴에서 쏟아지는 기레스의 혈흔에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욕구불만이라는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인지, 이제는 쾌락 때문에 기레스에 대한 미움이 많이 옅어졌기 때문인지 마음 한 켠에서는 기레스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일 정도였다.
"머.. 멍하니 있지 말고 닦을 거라도 좀 가지고 와.."
"아... 알았어."
티나가 휴지를 챙겨오자 기레스는 얼굴을 한동안 열심히 수습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표면적으로든 내심으로든 기레스를 싫어하는 티나가 나설 일은 전혀 없었다.
"후우..."
"괜찮아?"
"요즘 너무 몸을 혹사 시켰나.. 뭔 놈의 코피가 이렇게.."
기레스의 한마디에 티나는 어쩐지 속이 불안으로 시큰 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혹사는.. 뭘 얼마나 했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나도 리움 사관학교에 가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다고.."
아침에도 티나 스스로가 하일즈에게 써먹었던 낯익은 변명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자고 있었지.. 하여간 천치같은 게 무슨 리움 사관학교를 가겠다고..!'
"거기에 널 능욕한답시고 그렇게 매일 같이 정액을 빨렸으니.. 하아.. 아우.. 안되겠다."
피를 멈추기라도 하려는 듯 기레스는 고개를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뭐가 안된다는 거야?"
"운 좋은 줄 알어. 이년아. 오늘 능욕은 넘어가 줄테니까."
티나는 기레스의 앞에서 표정관리도 못하고 정말적인 표정을 지었다.
'어.. 어어?'
기레스의 그 한마디로 티나의 머릿 속은 혼란으로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기레스의 능욕을 하루 거르게 되어서 잘됐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마음과, 욕구불만으로 기레스의 능욕을 기대했던 변태성이 정신없이 뒤엉켜 머릿 속을 휘저어 버린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 진심인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 정말이야? 앞으로 2주도 안남았는데 하루를 이렇게 날려도 되는거야? 오늘 건너 뛰었으니까 나중에 따로 추가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기레스가 입 밖에도 꺼낸 적이 없는 하루를 걸러 추가한다는 이야기까지 스스로 술술 꺼내는 티나의 모습은 관점을 조금만 돌려서 보면 능욕을 안할거냐고 은근히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였다.
"아무리 너한테 복수를 해야 한다고 해도 몸이 우선이지. 하긴 지금까지 나 치고는 너무 무리하긴 했어."
'으긋..'
기레스는 실제로는 피가 흐르지도 않았던 코를 메만지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흘끗 곁눈질 해보면 오늘 능욕을 거르게 되어 전전긍긍하는 티나의 모습이 보인다.
"으... 음."
'그나저나 어지간히도 무시하고 있구만.'
딴에는 숨긴다고 숨기는 연기를 하고는 있지만, 오늘 능욕을 거른다는 말에 은근히 안절부절 못하며 우물쭈물 거리는 티나의 모습은 필사적으로 하일즈에게 거짓말을 할 때와는 다르게 조금이지만 확실하게 티가 났다.
'뭐 그렇게 만든 건 나긴 하지만..'
이 둔해빠진 기레스라면 이정도 감정을 내보이는 것 정도는 상관 없다라고 무시하는 생각이 골수에 박혀 있지 않다면 티나는 하일즈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바탕 화내거나 울면서 감정을 내비치면 속이 얼마간 후련해 지는 것처럼 어찌보면 화풀이에 가까운 어린애 같은 투정을 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된다는 거야...?"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반겨야 할 상황에도 항상 사납기 그지 없었던 티나의 눈은 맥아리 없이 축 쳐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기레스는 티나의 심정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것처럼 혼자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을 하며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흐음... 잘 생각해 보니 사정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기는 하네."
"뭐!?"
그 말에 촛점을 잃고 멍하니 죽어 있던 티나의 눈빛은 삽시간에 생기를 되찾았다.
"바, 방금까지는 오늘 능욕은 안한다고 했잖아!"
마치 기레스의 변심으로 능욕을 당할지도 몰라 당황이라도 한 듯, 따지는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티나의 눈은 은근한 기대로 초롱초롱해졌다.
"그러려고 했는데 누구 좋으라고 하루를 공짜로 내주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야."
"으윽... 그래서? 빨면 되는거야?"
"후우... 어쩔 수 없지. 일단 오늘은 승부는 생략하고 봉사만 받아보도록 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