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티나(22)
* * *
"그나저나 기레스가 열의를 가지게 된 건 좋은데.."
소피아는 실실 거리던 미소를 거두고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사실 조금 불안하단 말야."
"뭐가?"
"기레스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어서."
"그렇게 힘들어?"
평소 받아오던 지옥같은 훈련을 떠올리고 기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힘이 드냐면 그런 건 아니지만.."
소피아는 눈을 흘기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고통스럽거든."
"윽.."
기본적으로 뒤떨어진 인간인지라 자신을 비하하기 일쑤인 기레스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소피아가 자신의 정신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소피아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
"얼마나 고통스럽길래.."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기레스는 털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한겨울 밖에 꺼내 둬서 한기가 잔뜩 시린 철을 심장에 가져가기라도 한듯 가슴은 철렁 가라앉는다.
"음?"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소피아를 바라보면 어쩐지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흐릿한 소피아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끄아아악!"
그와 동시에 기레스의 팔에선 낯익은 격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건..?'
격통이 조금 가시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을 공격한 소피아와 그 보이지도 않았던 공격을 막은 자신이 있다. 고통이 완전히 가라앉아 소피아에게 무슨 일인지 물으려고 시선을 돌린 찰나의 순간 기레스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잊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한번 스쳐 지나가듯 봐도 자연스럽게 뇌리에 각인이 될 정도로 또렷한 이목구비를 담고 있는 소피아의 얼굴은 아까처럼 흐릿한 잔영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으, 으으.."
직감적으로 기레스는 바로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날 지를 알아 차렸다.
"끄윽..."
이번에는 반대쪽 팔이 소피아의 매끄러운 다리를 멋드러지게 막아낸다. 기레스는 소피아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다. 흐릿해진 잔영이 가시기도 전에 나타난 소피아의 공격은 기레스의 눈에는 말 그대로의 순간이동처럼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기레스의 팔은 멋대로 소피아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시발.....'
"으아아아악.."
당연히 막은 팔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격통이 후끈 거리며 치밀어 올라온다.
'역시 이거..'
몇년 간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맞아본 적이 있는 아픔. 그것은 틀림없는 젤가의 고문술이었다.
"크헉.. 끄윽.."
'뭐 이리 아픈거야.'
고통의 종류는 하일즈나 티나와 다르지 않지만 그 질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복부나 얼굴 같은 곳도 아닌 팔을 노린데다 고작 두어번 느꼈을 뿐인데도 차라리 하일즈에게 하루종일 밟히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피아의 기술은 하일즈와 티나와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이게 소피아..'
위에는 위가 있다는 말이 질려 버릴 정도다.
싸늘한 미소를 띠며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소피아의 시선을 보고 있자면 그녀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두려움에 심장이 저려온다.
"소피아?"
"이런 식으로 해나갈 생각인데.."
기레스의 부름에 소피아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표정을 사르르 풀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쳇..'
그에 기레스는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곤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떻게 생각해?"
"조교구만."
"아... 눈치챘어?"
소피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 거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단순히 가르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기레스는 소피아가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같은 조교를 하려 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도가 서툴러."
어지간히도 고통스러웠던 기레스는 선배의 입장이라도 된 것마냥 쯧쯧거리며 소피아를 가볍게 놀린다.
"으으.. 눈치채 버리다니.."
그런 기레스의 놀림은 신경도 안 쓰고 분한 듯 소피아는 입술을 질끈거리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왜?"
"나도 기레스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술을 익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런 건 어지간히 시간을 들이지 않는한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건 힘들지. 하도 급하게 티를 내면서 유도하길래 알아달라는 건 줄 알았더니만.. 모른 척이라도 해줄 걸 그랬나..?'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해."
"응?"
"조교하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아직 뭘 가르치고 있는지는 모르니까. 묻지 않을테니 앗 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해 보라고."
앳된 얼굴로 초연한 척 겉멋을 부리며 소피아를 위로하는 기레스의 어투는 평소와 다름 없어 포기할 생각 따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 응! 역시 기레스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기에 아무리 기레스라도 포기할 가능성도 있겠다고 생각해 슬그머니 기레스를 살살 구슬리는 노력까지 했던 소피아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은 기쁜 오산에 불과했다.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소피아를 보면서 기레스는 생각했다.
'솔직히 엄청 궁금하지만 여기선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모르는 쪽이 나을 수도 있을테고..'
무엇을 배울 지 아는 것이 꼭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여자를 후리는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레스가 클로에나 티나를 꺾겠다고 정면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듯, 돌아서 가는 것이 도리어 지름길인 경우는 꽤나 흔히 있는 일인 것이다.
기레스는 소피아가 자신의 조교에서 배운 게 있다면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이용할 것이라 믿고 여기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소피아에게 일임하는 쪽이 정답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멋 부린다고 괜찮은 척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힘든데..'
한방 한방 소피아의 공격을 막을 때면 자신의 입장도 잊고 어린애처럼 바닥을 뒹굴며 목놓아 울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칠 정도로 소피아의 기술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기레스는 기뻐하는 소피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근데 조금만 살살 해주면 안될까? 그.. 하일즈나 티나가 했던 수준 정도로.."
"안돼~ 그정도로는 기술을 제대로 익히기 힘들테니까."
기레스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인지 여유를 되찾은 소피아는 콧소리를 흥얼거리면서 잔망스러운 미소로 기레스의 부탁을 부드럽게 흘려 넘긴다.
"크윽.."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약점'이라도 잡혀 버린 듯한 어딘지 친숙한 기분을 느끼면서 기레스는 생각했다.
'설마.. 아까 약한 모습도 날 유도하기 위한 연기는... 아니었겠지?'
그런 등골이 오싹해지는 의문을 품으면서 기레스는 드디어 소피아에게 기술을 배우기 위한 조교를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욱. 죽겠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기레스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오두막집에 도착했다. 육체적으로는 겉으로나 속으로나 작은 생체기 하나 없을 정도로 멀쩡했지만, 잇따른 고통으로 기레스의 정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마모될대로 마모되어 있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티나의 조교를 그만둘 수는 없다. 티나를 조교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으로 티나가 용인해 주고 있는 지금, 기레스는 부지런히 티나는 떨어뜨리기 위한 발판을 다져두어야만 했다.
'시간도 조금 있으니 잠시 쉬고 있을까..'
그렇게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기레스는 침대 뒤의 흔들 의자에 앉아 눈을 붙혔다.
"어라?"
사뿐한 걸음으로 숲을 지나던 티나는 멀리 오두막에 불빛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뭐지? 아직 안 왔나?"
티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내가 먼저 왔다고 생각되기는 싫은데..'
지각해서 페널티를 입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레스의 능글맞은 도발을 듣게 되는 것도 사절이었는지라 그간 티나는 가급적이면 제시간에 맞춰 도착해 왔다.
"푸우우.."
"음?"
기레스의 지친 숨소리에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티나는 마력을 집어 넣어 오두막 안에 불을 켰다. 퀴퀴한 잔향을 맡는 것만으로 티나의 몸은 저도 모르게 은근스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뭐야 와 있었잖아. 하긴 저새끼가 거를 턱이 있나."
멀리 흔들의자에 몸을 젖혀 앉아 있는 기레스를 보면서 티나는 흥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곤 다가갔다.
"얼른 하고 끝내야.."
그렇게 말하며 기레스를 깨우려는 순간 낯익은 냄새에 티나의 몸은 살짝 멈추었다. 오늘 소피아의 조교에 식은 땀으로 범벅이 된 뒤, 너무 지쳐 집에서 씻지도 못한 기레스의 체취를 그녀의 예민한 코는 놓치지 않았다.
"으읏.."
이성적으로는 얼른 끝마치고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다 이대로 기레스를 깨워서 능욕을 받는다면 어쨋든 기레스의 체취를 잔뜩 느낄 수 있음에도, 티나는 선뜻 기레스를 깨우지 못했다.
'뭘 했길래 이렇게 골아 떨어져 있는거야?'
괜히 자고 있어서 망설이는 자신에 짜증스레 그리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티나는 기레스를 건드리지는 않고, 의자에 축 널브러진 기레스의 신체를 흘깃거리며 천천히 접근해 나간다.
"핫?"
어느샌가 기레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가 킁킁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티나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황급히 당황하며 얼굴을 떼었다. 기레스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파묻은 적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상반신은 아직 맛본 적이 없는 티나는 어쩐지 아쉬움이 감도는 욕망서린 눈빛으로 기레스를 내려다 보았다.
'꽤 깊게 잠든 것 같네..'
티나는 기레스의 눈앞을 손으로 저어가며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축 늘어진 기레스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조금 쯤은... 괜찮겠지..?'
자신이 냄새로 발정하는 변태라는 사실을 이미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티나는 아주 자연스레 걸리지만 않으면 기레스를 자신의 쾌락을 위한 반찬으로 삼아도 상관 없지 않을까? 하는 정신나간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꿀꺽]
입 안을 가득 메운 침을 삼키고 티나는 천천히 기레스의 목덜미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인상을 찌푸리고도 남았을 시큼한 체취는 티나의 몸을 환희로 떨리게 만든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티나는 그것을 선뜻 내버릴 수가 없었다.
"킁킁.. 스읍."
기레스의 목덜미를 따라 겨드랑이로 천천히 향하는 티나의 고운 얼굴에는 기레스에게는 절대로 보일 수 없는 녹아내릴 듯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하아.. 흐응."
자위는 할 수 없어서 몸만 배배 꼬면서 체취에 더욱 빠져들던 찰나 기레스가 몸을 부시럭 거린다.
"크음.. 음... 으음?"
'읏..!'
천천히 기레스가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들자 티나는 흡사 소피아의 잔영을 보는 것 같은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기레스에게서 떨어졌다.
"하암.. 뭐야. 왔냐?"
"그, 그래.."
"왔으면 왔다고 깨우지?"
"누, 누구 좋으라고? 능욕을 해달라고 조르기라도 하란 말야?"
"하긴 그것도 그렇구만.. 그럼 시작해 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