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29화 (129/238)

〈 129화 〉 티나(21)

* * *

"뭐? 확인?"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말한 수치는 강함이 아냐."

"무슨 소리야?"

"다른 외부 요인들은 제쳐두고 신체능력만을 수치화 했을 뿐이라는거지."

"그거나 그거나? 강한 게 강한 거잖아?"

"어떻게 싸우느냐. 기술이 빠졌잖아."

소피아의 말에 기레스는 은근히 소피아가 신나 하는 이유를 눈치챘다. 기레스가 열등해서 좌절하면 좌절할수록 소피아가 가르칠 기술에 대한 가치는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말은 좋지.'

전생에서도 격투기를 전문으로 배운 사람과 배우지 않은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슷한 체급일 때의 일이다. 덩치가 커지는 것만으로도 그 차이를 기술로 메꾸는 것은 한쪽이 아주 격투에 문외한이 아닌 이상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의 기술은 상식을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때리고 상처없이 고통만을 남기는 기술 같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술 같은 게 존재하는 세상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기레스는 기술로 몇 배, 나아가서는 열배도 더 차이나는 괴물들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정도란 게 있지. 나보다 열 배도 넘게 강한 녀석을 상대로 기술 같은 게 무슨 소용이야?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거고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그대로 뼈가 부서져 버릴텐데."

"기레스. 신체능력의 수치가 열 배 이상 차이 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게 힘이 수십 배라거나 빠르기가 수십 배 차이가 난다는 건 아냐."

"뭐?"

"모든 신체능력을 수치화 했을 때 총점이 그만큼 차이난다는 거지. 시야라던가 청각이라던가 지구력이라던가 딱히 힘만이 신체능력은 아니잖아?"

"그건 그런가.."

"그렇다 해도 지금의 기레스라면 하일즈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을테고, 공격도 막으면 막는대로 몸이 부서져 버리기는 하겠지만.."

기레스를 위로하는 듯 오해를 풀어주면서도 소피아는 현실을 직시시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자신을, 그리고 클로에를 손에 넣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빈틈없이 이용해서, 상대의 빈틈을 꿰뚫었던 기레스에게 어설픈 아부 따위는 필요 없다.

이걸로 포기할 기레스도 아니겠지만, 설사 포기한다고 해도 여기서는 현실을 알려주는 것이 기레스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설사 그것이 기레스가 질색하는 것이어서 미움을 받게 되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는 직언을 하는 쪽이 옳은 것이다.

'기레스라면 이런 걸로 미워할 리도 없고.'

그 어린 나이에도 이미 인간일까 싶을 정도로 자신을 내놓으면서 사리분별을 했던 기레스다.이런 직언에 순간은 달갑지 않을수는 있어도 일일히 연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싱글거리는 소피아와 시선을 마주 친 기레스는흙 씹은 표정으로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래서? 확인이라는 건 뭔데?"

"기레스가 불신하는 기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확인. 음.."

그렇게 말하곤 소피아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마땅한 게 없네. 기레스 잠시만.."

그렇게 말하곤 소피아는 숲 근방으로 사라졌다가 곧 돌아왔다. 가녀린 손에는 목검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럴싸하게 다듬어진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설마 맨손으로 저런 걸 만들어 온 건 아니겠지..?'

라고 의심하면서도 기레스의 마음 한 켠에는 소피아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

소피아는 그 나무 막대를 기레스에게 건네 주었다.

"이걸로 어쩌라고?"

"전력으로 나를 쓰러뜨려 봐."

"뭐라고?"

"그 목검으로 나를 공격해 보라고. 사실 맨손으로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무엇을 상상했는지 검지 손가락을 앵두 같은 입술에 가져가면서 그런 말을 하는 소피아의 표정에는 요염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는 역시 납득하지 못할 것 같아서.."

"목검으로도 납득하지 못하겠는데? 내가 널 어떻게 이겨? 하일즈는커녕 평범한 마을 사람에게 목검을 들고 싸워 보라고 해도 당장 내빼고 싶을 정돈데,"

"나는 기레스가 하일즈와 차이가 나는 만큼 힘을 빼고 싸울거야."

"뭐?"

"쉽게 말하자면 아까 내가 말해주었던 기레스의 신체능력이 3이라면.. 0.3 정도의 힘으로 싸운다는거지."

느릿하게 소피아는 허리를 살랑거리면서 가는 시선으로 도발하듯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0.3..?'

소피아의 말은 농담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허무맹랑해 보였지만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기레스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0.3인지 나발인지가 어떤 움직임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들은 소피아의 말을 떠올려 보면 0.3과 3의 차이라 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열배 이상의 차이는 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중요한 것은 수치가 아니라 소피아가 자신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움직임으로 무기를 든 자신을 상대하려 한다는 것이다.

"흐음.."

솔직한 심정으로 기레스는 이 결과가 상당히 궁금했다. 자신이 이세계 사람들과 대등하다면, 아니 우월하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망상해 온 기레스다.

아무리 소피아라고해도, '나처럼' 열등하기 짝이 없는 능력을 가진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소피아가 저정도로 자신 있어 하는 것을 보면 십중팔구는 아니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귀신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귀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당연하듯, 기레스는 이 기묘한 대결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련이라면 승부는 어떻게 할 건데? 설마 이걸로 항복할 때까지 패라는 건 아니겠지?"

"음.. 그것도 나쁘진 않네. 제압 당해서 못 움직이거나 항복하는 쪽이 지는 걸로 하자."

"난 너나 클로에와는 달라서 적당히라는 건 몰라."

기레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목검을 꼬나잡는다.

'머리만 노리지 않으면 상관 없겠지.'

전생을 포함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은 가볍다. 이전이었다면 분명히 느껴졌어야 할 목검은 자신의 팔이라도 된 것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기분 만으로는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간다!"

전생이었다면 준족이라고 들을 수 있을만큼 빠른 속도로 기레스는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사정거리 안으로 내달렸다. 기본적으로 전생 때도 육체파는 아니었는지라 전문가 수준의 싸움은 해본 적이 없는 기레스지만, 뒷세계에서 타인의 여자를 후리는 구리구리한 일을 했던만큼 아주 주먹을 쓰지 못할 정도로 맹탕도 아니었다.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소피아에게 기레스는 적당히 힘을 빼고 목검을 휘둘렀다. 대각으로 내리친 목검의 궤적은 내리 허공을 갈라 버렸다.

'어?'

"우왁."

그와 동시에 소피아가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기레스의 발을 걸고 등을 가볍게 밀치자 기레스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땅에 곤두박질 쳐버렸다.

"으윽."

바로 기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소피아에게로 몸을 날렸다. 소피아의 움직임은 어린아이가 아장아장거리는 것을 연상시킬 정도로 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크읏!"

하지만 기레스의 검은 소피아의 몸을 스치지 못했다. 기레스의 공격이 어디로 올지 알고 있다는 듯 소피아는 미리 움직여 훌쩍 피해 버린다. 그리고 그 피한 공격을 갈무리 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찌르거나 넘어뜨리는 등 기레스를 한껏 농락해 버리는 것이다.

"하아아!"

제 딴에는 머리를 굴려 소피아의 저 느릿한 움직임으로는 피하지 못할 각도로 필사적으로 휘둘러 봐도,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어떤 공격이든 소피아는 종이 한장 차이로 공격을 훌렁 피하거나 넘기며 기레스를 멋대로 희롱해 버린다.

"읏."

짧게 휘두른 검격 사이로 한걸음 들어와 살짝 기레스의 목덜미를 소피아는 손가락으로 애무라도 하듯 흝어 내고는 그대로 자신의 체중을 이용해 가볍게 기레스를 밀어 버린다.

'침착하자. 분수에 넘치는 공격을 해서 그런 걸수도 있어.'

처음에는 나름대로 소피아가 다칠까봐 힘을 빼고 휘두르고 있었지만, 이미 정신없이 농락당한 지금은 그런 여유 따위는 마음 속에 단 한 조각도 남지 않게 되어 버려서 일격 일격 소피아가 피하지 못할 각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거나 최대한 빠르게 휘두르고 있었다.

'소도 아니고..'

기레스는 투우사와 소를 떠올렸다. 소피아는 투우사고 소는 다름아닌 자신이다. 아무리 자기 딴에는 최선의 궤적이라고는 하나 정신없이 휘두른다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달려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피아를 상대로 그런 마구잡이 공격이 통할 리가 없다.

'확실히 소피아는 나보다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어.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하는 폭발적인 돌격은 자제하고 기레스는 천천히 걸음을 좁혀 나갔다. 휘두를 수 있는 거리에서 소피아의 움직임보다 느리게 맞춰 잡아서 빠르게 치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한 것이다.

"제법이네. 기레스."

굼벵이처럼 천천히 검의 사정범위 안으로 들어온 기레스가 검을 들어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 소피아는 한걸음 몸을 쭉 들이 밀고 들어왔다. 기레스라면 훨씬 더 빠르게 들어올 수도 있을 정도로 빈말로도 빠른 건 아니었지만, 허를 찔린데다 검술이라고는 배워본 적이 없는 기레스가 요령 좋게 소피아를 요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큭!"

휘두르지 않을 수 없어서 다급하게 휘두른 공격은 허공을 가른다. 몸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 기레스의 공격을 종이 한장의 차이로 여유롭게 피한 소피아는 휘두른 그 빈틈을 이용해 대련의 시작 때처럼 기레스를 땅에 곤두박질 치게 만들었다. 그 뒤로도 수십 분 되려 기레스가 지쳐버릴 때까지 소피아는 목검에 스칠 기색도 없이 철저히 기레스를 희롱했다.

"항복."

빠르게도, 느리게도 해보고 시행착오를 겪어 자세를 교정해 가면서 온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보았지만 결국 소피아에게 단 한번의 유효타도 내지 못한 기레스는 이것이 헛된 발버둥이라는 것을 자각하곤 양 손을 들고 항복의 의사를 표했다.

"더 안해보고?"

"얼마나 더 농락 당하라고? 더 했다가는 발정해 버릴 것 같아서 그만 할란다."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기레스의 민감한 부분을 요염한 손놀림으로 희롱하면서 즐길 정도였기에 이미 기레스의 전의는 옛적에 꺾인 참이었다.

"확인해 본 결과는 어때?"

"어떠냐고 말해도.."

기술이 무시할 수 없다는 건 뼈저리게 느꼈고, 대단하다고도 생각했지만, 기레스는 어디까지나 소피아가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머리로 자신을 농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단하기는 한데, 어차피 나는 그런 기술을 사용할 수 없을 거 아냐?"

기레스는 미리 상대의 움직임을 읽는 것처럼 어느 자세에서든지 종이 한장 차이로 대응해 버리는 소피아의 기술을 배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

"머리가 좋아야 하니까."

"아..? 혹시 내가 가르쳐 줄 기술이라는 게 이런 저급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음? 아냐?"

기레스는 틀림없이 소피아가 약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기술을 자신에게 전수해 줄거라 생각했기에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이건 그냥 기레스가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이해를 도와주려고 맛보기로 보여준 것 뿐이야. 이런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걸 기레스에게 가르쳐 줄 리가 없잖아."

"어... 아니, 난 그것도 못한다니까?"

"이딴 건 익히지 않아도 상관 없어."

"네가 가르쳐 줄 기술이란 건 그렇게 대단한 거야?"

젤가의 고문기도 그렇지만, 방금 전 소피아가 보여준 기술도 기레스의 입장에서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었기에 기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 안에 고인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전쟁 때.... 살아남기 위해서 고안했던건데.. 나중에 기레스가 배우고 나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내게는 비장의 기술 중 하나야."

기레스에게 전쟁을 상기시켰기 때문인지 살짝 미안해 하면서도 소피아의 얼굴엔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언제나 온화하고 겸손한 소피아가 저정도로 자신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지금도 배우는 거 시작할 수 있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비빌 수 '있다면' 비비는 게 기레스라는 인간이다.

그토록 수련했음에도 이세계 사람들에게 현저하게 떨어지는 신체능력과, 몸으로 뼈저리게 느낀 기술의 위용, 거기에 저 소피아가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레스 안의 남자의 로망의 불길에 기름을 붓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원래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기술을 익히고 싶다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다른 것을 뒷전으로 해서라도 간절히 배우고 싶어져 버린 것이다.

"괜찮겠어? 티나도 조교해야 하는데?"

소피아의 걱정과 도발이 반반씩 섞인 것 같은 말투에 기레스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조교는 내가 알아서 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어도 조교 해낼 테니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가르쳐 주기나 하라고."

티나의 조교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경고 했음에도 자신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기레스의 말에 소피아는 배시시 미소를 숨길 생각도 않고 말했다.

"기레스가 그렇게까지 바란다면 어쩔 수 없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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