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티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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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기레스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특훈을 하기 위해 소피아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몸이 좋아졌다라..'
기레스는 학교에서 클로에를 후리며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전생때의 자신에 비해 확실히 힘이 붙었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신체능력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던 기레스는 예상 밖의 클로에의 말에 어디 구석에 쳐박아 놓고 잊었던 목돈을 발견한 것마냥 은근 기분이 좋아졌다.
성적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시험과는 다르게 어지간히 확연한 차이가 나지 않으면 몸의 변화는 스스로가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중이 떠중이도 아닌 다름아닌 클로에의 공인이니만큼 진위 여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랜만에 만난 클로에가 그렇게 자신의 몸이 좋아졌다고 바로 느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런 것이다.
이세계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십 수년, 이미 진즉에 스스로에 대한 능력의 기대 따위는 접었던 기레스지만 클로에의 인정에 기레스는 꽤나 들뜬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노력이 결실을 맺어 보상 받는 것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인 것이다.
소피아나 클로에를 함락 시키기 위해 온갖가지 수단을 동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원래 기레스는 이루지 못할 것을 노력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지. 노력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다.
고문을 받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 싶을 정도로 힘들기만 했던 훈련이었지만 오늘 훈련장을 향하는 기레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소피아. 네가 보기에는 이 훈련이 성과가 있는 것 같아?"
훈련을 시작하기 전 기레스는 소피아에게 넌지시 운을 띄며 물었다.
"흐음. 기레스 답지 않은 질문이네."
"뭐가?"
"기레스는 어딘지 염세적인 느낌이 있으니까 이런 거에 일희일비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거든. 오늘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봐?"
'예리하기는..'
"염세적인 건 맞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일희일비하지 않지는 않아. 하고 싶어도 할만한 게 없을 뿐이지."
"아.. 그런 건가.."
소피아는 자신이나 클로에를 손에 넣고 즐거워하는 기레스를 떠올리면서 손벽을 치며 동조했다.
"그러면 기레스가 더 좋아라 할 수 있을 만한 걸 잔뜩 만들어 줘야겠네?"
소피아는 요염하게 생긋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건 고마운데 일단 질문에 대답하면 어떤데?"
"흠.. 좋은 쪽으로 말해줄까? 아니면 나쁜 쪽으로 말해줄까?"
"훈련의 성과에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어?"
"받아들이기 따라서는?"
기레스는 소피아는 자신에게 빈말이나 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이 상황에서 나쁜 이야기를 거론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둘 다 듣지."
자신의 의도를 읽어준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소피아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살짝 머금었다.
"일단 좋은 쪽으로는.. 이전에 비하면 굉장히 강해졌다는거야. 기레스 너도 느끼고 있지 않아? 굳이 내가 이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이전에는 소화하지 못했던 훈련 강도를 버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실감할 수 있잖아. 어림잡아도 클로에와 훈련을 하기 전보다 전체적으로는 몇 배는 더 강해졌다고 생각해."
'꽤 후한 평가구만.. 아니 아닌가?'
몇배니 뭐니 거창하게 이야기 하기는 했지만 소피아의 저 말은 돌려 말하면 훈련하기 전의 자신이 얼마나 저질이었는가를 은근히 돌려 말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었다. 1점짜리 신체가 5점이 되었다면 그것도 무려 5배나 성장했다 할 수는 있는 것이다. 소피아의 말마따나 염세적인 성격인 기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멋대로 수긍해 버렸다.
'어쨋든..'
"꽤나 좋아졌다는 건데 그럼 나쁜 쪽은 뭐야?"
"기레스는 몇 배나 강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
"음.. 죽어라 노력한 보람은 있다 정도려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윽.."
그제야 기레스는 소피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절대평가와 상대평가인건가..'
백점 만점에서 10점을 면치 못하는 학생이 30점이 된 것은 몇 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지만 타인인 이세계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어떨 것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충 알겠는데. 타인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나는지는 감이 안잡히는데..?"
기레스는 소피아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물론 클로에와 소피아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기레스로서는 그 적나라한 차이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둘이 워낙에 특별한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고,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어느정도나 차이가 나는지는 기레스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걸 수치상으로 알려줄까 싶어서 말야."
"수치? 그런 걸 할 수 있는거야?"
"대충은.."
'어련하시겠어.'
클로에를 만나기 전 십 수년 간 낙제라는 꼬리표를 달고 산 열등종인 기레스에게 있어서 이세계의 채점의 시간은 달가웠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지만, 솔직히 이번만큼은 클로에의 인증도 있겠다, 몇달이라는 시간 동안 죽어라 노력한 성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어느정도나 차이가 나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쁜 쪽이라고 말한 걸 보면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마른 침을 삼키고 기레스는 입을 열었다.
"좋아. 말해줘."
"평범한 성인의 능력을 10정도로 잡아 보면.. 기레스는 넉넉잡아 보면 2..아니 3정도 되려나?"
"어?"
"왜?"
"3이라니 생각보다는 괜찮은거 같은데?"
비단 소피아나 클로에 같은 이세계 사람들 중에서도 특출난 인간이 아니어도 이세계 사람들은 어딘가 탈이 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지구에 온다면 누구라도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괴물들만 모여 있다. 그것도 현실적인 수준의 괴물이라는 것도 아니다.
아예 종 자체가 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계 신기록 따위는 개나 소나 돌파할 수 있고,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의 괴물들이 즐비한 세계인 것이다. 그런 괴물들의 신체 능력을 3할 가까히 따라갔다는 사실은 기레스에게는 불쾌도 뭣도 아니었다.
"하일즈는 30도 넘을걸?"
"컥.."
자신과 비교하면 열배도 넘는다는 소피아의 말에 기레스는 순간 숨이 퍽하고 막혔다.
'아니, 놀랄 건 없지. 하일즈 녀석도 클로에와 나름 실력을 견준다고 하는 수준이니까..'
자신의 고문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의 극한의 훈련 조차도 여유롭게 놀면서 해내던 것이 클로에다. 그런 클로에와 그래도 엎치락 뒤치락 할 수 있는 하일즈가 30이라는 것은 얼추 납득이 된다.
"그럼 클로에는?"
"글세? 기레스와 훈련하는 걸 보기는 했는데 그런 걸로는 가늠이 안되니까. 하일즈도 전력을 다하는 걸 본 건 아니니까 실제로는 배는 더할수도 있는거라서.. 어디까지나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본 최소치만해도 그렇다는 말이야."
"30에 배? 그녀석이 그렇게 세단 말야?"
강하다거나, 마을에서도 내로라하는 재능이라거나, 말로만 들었지, 아무리 평범한 사람들과의 비교라지만 이세계의 사람들과 비교해도 그정도로 차이가 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기레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뭐.... 그렇지."
자신의 아들의 대단함을 말하면서도 소피아는 어딘지 탐탁치 않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잠깐 잠깐. 그럼 아까 이야기한 평범한 성인의 10이라는 수치도 최소치인거야?"
"음.. 그렇지.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보다 신체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많겠지만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정도는 어지간해서는 다 소화할 수 있을거야."
클로에의 인증에 더해 기대한 것보다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해 들떴던 기레스의 기분은 삽시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자신은 너그럽게 봐줘서 최대치가 3, 평범한 성인은 최소치가 10. 하일즈의 경우는 30도 50도 넘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기레스의 자기 기대치가 낮았다고 해도, 충격이 아주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반인에게 어느정도 밀리는 수준이야 기레스도 익히 예상했던 것이니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하일즈의 재능이 더 뛰어난 건 배 아픈 일이었다.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세계의 평범한 성인들과 비교해 몇배나 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게 인간인데, 원수나 다름 없는 하일즈의 축복받은 재능에 기레스는 은근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두배만 되어도 노력으로 극복하기 힘든 수준인데 열배가 넘는 차이가 난다면 이 노력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상실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후우.."
클로에나 소피아의 동정을 사기 위해 연기로 움츠린 적은 많았지만 이번에는 진심으로 어깨에 힘이 쑥 빠져 버렸다.
아예 기대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괜히 클로에로부터 바람이 넣어져 기대한 만큼 실망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기레스는 진심으로 실망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거구나.'
동정을 유발할 때와는 다르게 눈을 내리 깔고 혀를 차면서 건방진 표정으로 툴툴거리며 실망하는 기레스의 모습을 보면서도 소피아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싱글거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워?"
그런 소피아를 흘끗 흘기며 기레스는 퉁명스럽게 투정처럼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 보통 사람에게는 역겹게 밖에 느껴지지 않을 태도였지만 소피아에게는 마냥 귀엽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야.. 좀처럼 보기 힘든 기레스의 희귀한 본심을 보기도 했고.. 현실을 직시해 낙심한 만큼 그걸 극복 시켜 줬을 때 기쁨도 더할테니까."
"뭔 극복이야?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깟 훈련을 계속 해야 되는지조차 의문인데."
인간이 아무리 죽기 살기로 노력해 봐야 코끼리와 힘싸움을 할 수 없듯, 기레스에게 이세계 사람들은 단순한 능력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가르쳐 준다는 기술조차도 결국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일 게 뻔하잖냐. 내가 배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소피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럼... 확인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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