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19화 (119/238)

〈 119화 〉 티나(11)

* * *

"후우.."

기레스가 오두막을 나가고 티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차례 숨을 고르자 무언가 갈증이 난 것처럼 허전한 느낌도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였던 걸까? 방금 껀..'

눈을 위로 살짝 굴리면서 티나는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득 떠오르는 기레스의 소름끼치는 손길을 티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휘저으며 독백했다.

"에이.. 너무 불쾌해서 그런 거겠지."

분명 기레스의 애무는 물리적으로는 기분이 좋았지만, 티나 본인이 기레스를 징그럽게 생각할 정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불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분이 좋은 것과는 관계 없을거야. 절정 따위 자위로도 몇번이고 느껴본 적이 있는걸. 그녀석의 애무 따위, 자위할 때 가버리는 느낌에 비하면야 애들 장난 같은 거였고.. 맞아. 기레스에게 능욕 당하는 바람에 기분이 팍 죽었던 탓일거야. 응..'

그렇게 어딘지 찝찝한 마음을 몇번이고 되뇌이면서 티나는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자 기레스! 조금만 더 가면 돼!"

'으윽.. 아직인가..'

잔뜩 신이 난 소피아의 목소리를 쫓아 기레스는 천근 같은 다리를 꾸역꾸역 움직여 나갔다. 클로에의 공백을 메꿀 소피아와의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기레스는 다시 사람의 발걸음이 끊긴 구교사에서 소피아와 함께 현재 배우는 수업을 공부하고, 이후에는 클로에와 했던 것처럼 기초적인 체력단련을 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끝마쳤다.

"후아아.."

간신히 기초적인 체력단련을 끝낸 기레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벌러덩 누우려 들었다. 몸을 뒤로 젖히던 기레스는 구름을 베는 것처럼 폭신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

눈을 떠보면 아리따운 미소를 띄며 자신을 내려다 보는 소피아의 자애로운 얼굴이 보인다. 어느샌가 기레스는 매끈하며 말랑거리는 소피아의 무릎을 베고 있었던 것이다.

"수고했어."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더 힘든 것 같네.'

기레스는 매끄러운 소피아의 다리에 얼굴을 요리조리 부비면서 생각했다. 한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피아의 다리는 식어 있는 유리처럼 서늘해서 기레스의 전신을 달구고 있는 열기를 가라앉게 만들어 주었다.

"어땠어? 내 수업은?"

사근사근한 어조로 소피아는 기레스에게 수업의 감상을 물었다.

"정말 좋았기는 한데."

소피아의 수업은 클로에한테 받고 있다고 착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수준이었다.

"한데?"

"뭔가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라 해야되나.."

클로에한테 받고 있다고 착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가르침이지만, 그건 역으로 말하면 클로에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피아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뭔가 김이 새는 것도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

'뭐지? 어째 기뻐 보이는 표정인데.'

기레스의 실망 했다는 말에도 소피아는 싱글싱글 거리면서 가녀린 손길로 기레스의 앞 머리를 살짝 쓸어 내리며 기레스의 볼을 살살 어루만 졌다.

"기대한 만큼, 단련하고 싶어?"

"응?"

"기레스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니면 게으름뱅이잖아?"

"뭐.. 그렇지."

"그런 기레스에겐 이쪽이 좋을까 싶어서 나름대로 몸이 적응하고 있는 클로에의 수업을 최대한 참고해 본건데..."

기레스는 그제야 소피아가 기쁜 기색을 풍긴 이유를 알아차렸다.

'사실은 본 실력을 숨기고 있으셨다 이건가..'

기레스가 그 클로에보다도 자신을 더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피아가 기뻐하지 않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본심을 알고 소피아를 유심히 살펴보면 일견 행복으로 자애로워 보이는 소피아의 눈빛 안에 욕망의 빛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더 가르치고 싶은가 본데..'

하지만 소피아가 그것을 나서서 말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 말은 더 효율좋게 가르칠 수 있다는 이야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사실 기레스는 그.... 조금 둔한 편이잖아?"

이 행복한 한 때에 기레스의 기분을 잡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소피아는 살짝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뭘 새삼스레 말을 뱅뱅 돌리는 거야? 그냥 재능이 없다고 말해."

"그러니까.. 그런 기레스에겐 클로에의 방식은 굉장히 효율적이거든. 여기서 더 효과적인 수업을 억지로 짜낸다고 해봐야 크게 떠오르는 게 없을 정도로 말야."

"그럼 결국 소피아 너도 이게 한계라는 거잖아?"

"그건 아니고.. 더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는 이야기지."

"?? 무슨 차이야? 그게."

소피아는 살짝 우물 거리고는 말했다.

"기레스가 좀 더 무리를 해주면 좀 더 여러가지로 가르쳐 줄 수 있다는 이야기."

"무 무리라니..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여기서 더?"

기레스는 질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억지로 권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아마 클로에도 같았을걸? 성장은 하지만 기레스도 어찌어찌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의 한계까지 바짝 쪼여서 기레스를 가르쳐 준거니까.."

'그런건가.. 하긴..'

그 말에는 기레스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힘들고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이고, 클로에의 수업은 기레스의 저질이하의 체력으로도 어떻게든 '할 만은 했다.'

목적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기레스조차도 어찌어찌 이정도라면 해볼만은 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클로에의 수업은 최적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적과 최선은 다르다. 어디까지나 클로에는 기레스의 몸과 마음의 수준에 맞춰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레스가 좀 더 음... 재능이 있었다면 더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지금은 좀 더 무리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이야기지."

소피아는 머리를 살랑이며 기레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호기심 어린 고양이 같은 눈은 기레스에게 무리를 해줄 것인지 아닌지를 조용히 묻고 있었다.

"소피아 네 생각은 어떤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소피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으로 대답했다.

"기레스야 싫어하겠지만.. 여기서 노력해 둔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거야."

'내가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까지 확신할 정도란 말이지..?'

지극정성으로 기레스만을 생각하는 소피아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남은 것은 자신이 싫어할 게 뻔할 정도의 노력을 감당할지 말지에 대한 각오와 결정 뿐이다.

'그나저나 어쩐지 유도 당하고 있는 기분인데..'

소피아가 먼저 나서서 하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남들을 속여 서서히 구슬려 나가기 일쑤인 기레스는 어쩐지 소피아의 덫에 걸려 온몸이 칭칭 감겨 구속되어 버린 듯한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오싹하다고는해도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온순한 꽃사슴이 떠오를 정도로 순박하기 짝이 없었던 소피아가 그런 여우짓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레스에겐 최고의 취향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딴 게 아니고.. 소피아가 하고자 하는 수업이 얼마나 힘든가인데..'

소피아가 스스로 말을 하지 않을 정도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 힘들면 포기하는 수도 있겠지만, 아예 시작하지 않았으면 않았지 조교하는 자로서 그런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것은 그다지 원치 않는 기레스였다.

"얼마나 힘들길래 그렇게 밑밥을 까는거야?"

"당장은 그렇겐 힘들지 않을거야. 기술을 익히는데 필요한 체력이 붙을때까지는 조금 강도높은 훈련만 할 생각이거든."

"기술?"

"아.. 응. 그 왜 있잖아? 젤가가 하일즈나 티나한테 가르쳐 줬던 그런 기술 말야. 나도 그런 걸 기레스한테 가르쳐 주고 싶어서.."

소피아는 자신의 의도를 내비친 게 쑥스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머뭇거리며 말했다.

'소피아의 기술이라고!?'

기레스는 그런 특별한 기술이라는 것에 은근한 로망을 품고 있었다.

소피아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젤가의 기술조차도 배우고 싶다고 살짝 바랬을 정도인데 소피아가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 주고 싶다는 말은 기레스의 흥미를 돋구어 주었다.

'아니 잠깐만..'

"그 기술이라는 건 하일즈나 티나도 익히고 있는거야?"

"아니."

기레스는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하일즈와 티나는 어려서부터 물리적인 고문 외에도 정신적으로도 기레스가 하지 못하는 것들은 은근히 자랑하며 멸시하곤 했었다.

그런 동생들이 소피아에게 기술을 배웠다면서 자랑한 적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쳐 주지 않은 건가?"

소피아와 젤가 사이에서 태어난 하일즈와 티나의 재능은 마을 내에서도 손을 꼽을 정도로 뛰어났기에 기레스는 자연스럽게 소피아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가르쳐 주기는 했어. 배우지는 못했지만.."

'뭐?'

"잠깐만 하일즈와 티나도 배우지 못한 기술을 나한테 가르치겠다는거야?"

"그런거지."

소피아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피아 알고 있겠지? 나는 쓸데 없는 노력은 안하는 주의라는거."

"물론이지. 내가 모를 리 없잖아?"

마치 실례되는 것을 물었다는 듯한 불만스런 기색을 장난스레 풍기며 소피아는 힘차게 대답했다.

"그런데 젤가의 기술조차도 못 배워 먹어서 매일같이 쳐맞은 나한테 그녀석들도 배우지 못했던 기술을 가르치겠다고?"

상대가 소피아가 아니라 티나였다면 개소리 하지 말라는 비속어가 자연스레 튀어나올 정도로 어이 없는 말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거야 젤가는 가르치는 재능이 없으니까 그런거고.."

소피아는 젤가를 떠올리며 표독스러운 눈으로 매도하듯 말했다. 봄과 겨울을 자유롭게 오가는 그 요사스러운 표정의 간극에 기레스는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일즈와 티나도 가르쳐 줘도 못배웠다면서..?"

"당시에는 그정도 가르쳐 줘서 기술을 익히지 못할 정도라면 아이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젤가가 지도하는 만큼은 가르쳐 줘봤지만 역시 하일즈와 티나의 실력으론 무리였던거지. 지금와서는 가르쳐 주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소피아는 화사스러운 미소로 애교를 부리듯 말했다. 요는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기레스는 자신의 재능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석들이 못한 걸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기레스는 나를 믿어?"

본래라면 이미 밑바닥까지 함락된 여성에게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심술궂게 쏘아댈 기레스였지만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에 소피아의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기가 은근히 쉽지 않았다.

"그야 뭐.. 믿지."

"그렇다면 자신의 재능이 아니라, 가르치는 나를 믿어줘. 익히지 못할 것 같은 것을 익히도록 만드는 게 가르치는 사람이 할 일이잖아? 배우고 싶지 않다면 강요는 하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괴물들이 즐비한 이세계의 인간들 중에서도 단언코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소피아의 말에 기레스는 더 이상 망설이는 것을 그만두었다.

"배우고 싶지 않을 리가 있겠냐? 알았어. 그럼 책임지고 가르쳐 달라고."

'까짓거 못 배운다고 소피아나 클로에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고문이라도 당한다고 생각하지 뭐.'

"응. 내가 반드시 익힐 수 있게 해줄게."

그 말은 누구를 위해서 였을까. 소피아는 어쩐지 욕구불만으로 정욕에 허덕일 때처럼 젖은 눈빛으로 기레스를 그윽히 바라보면서 그렇게 다짐의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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