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티나(6)
* * *
기레스와 클로에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티나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일즈를 지키고 싶다는 감정이 격해져서 클로에를 위해 대신 능욕을 당하겠다고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사색의 시간이 주어지면 자신의 선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티나는 홀로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기레스가 저렇게 배짱을 부리고 있다면 선택지는 간단히 정리된다.
요는 기레스가 클로에에게 저지른 일을 가족에게 말할 것인가.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라도 기레스의 폭로를 막을 것인가의 양자택일인 것이다.
'돈을 갚아봐야 소용 없을테고..'
기레스의 무기는 클로에의 빚이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만들어낸 클로에를 범했다는 사건의 폭로다. 이제와 빚을 지워도 클로에가 더렵혀진 일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으으..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기레스의 오늘 처음 클로에를 범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티나는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 클로에가 범해지기 전에 자신이 현장을 습격할 수 있었다면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것 하나만으로 기레스의 악행은 끝을 고했을 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뒤엎을 수 없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대로 수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늦었지만 엄마한테 보고하면 어떨까..?'
문득 티나는 자신들의 부정에 그렇게 불같이 혼냈던 소피아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는 소피아라면 분명 기레스를 찍 소리도 못할 정도로 혼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그 뒤의 일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혼내도 기레스가 폭로하게 되면 그때는...'
설령 소피아에게 혼이 난다고 해도 그 뒤에 기레스가 하일즈에게 클로에를 범한 일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하일즈와 자신이 기레스에게 저지른 죄와, 그 나약했던 기레스가 클로에를 범한 행동을 실천한 것을 고려해 보면 혼이 난다고 해도 폭로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티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기레스는 분명 나약하기 짝이 없는 열등한 인간이었지만, 그것을 믿고 도박을 하기에는 하일즈의 죄와 클로에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만일 기레스가 소피아에게 혼이 났음에도 복수심을 버리지 못하고 폭로를 하게 될 경우 하일즈가 꿈꾸며 그린 행복은 일단 산산히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스토커처럼 하일즈바라기로 살아왔던 티나는 클로에를 향한 하일즈의 애정이 얼마나 큰 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최근들어 클로에와 약혼을 하고난 뒤에는, 비단 그를 잘 아는 티나 뿐 아니라 하일즈에게 큰 관심이 없던 마을사람들조차도 하일즈가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클로에를 향한 하일즈의 애정이 얼마만큼이나 무거운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도 없다할 수 있었다.
행복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해 행복이 무너져 내렸을 때의 불행의 반동 또한 묵직한 것이다.
클로에와 약혼을 하고 난 뒤, 하일즈는 발정난 원숭이마냥 클로에를 부르며 기뻐해 했다. 그 행복을 가장 가까히에서 지켜본 티나의 마음은 너무나도 착잡했다.
기레스의 강간아닌 강간을 봐 버린 탓에 하일즈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행복과 불행의 행방은 이제 티나의 손에 달려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 어쩔 수 없어.'
배째란 식으로 나오는 기레스를 상대로는 이 자리에서 죽여 입을 막아버리는 게 아니라면 결국 모두가 웃을 수 있을,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하일즈의 행복을 가장 우선으로 두고 있는 티나에게는 기레스에게 자신의 몸을 대가로 들이미는 행동만이 이 사태를 틀어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어차피 기레스고..'
클로에 저리가라할 정도로 타인의 남성에 대해 둔한 티나였지만, 그래도 하일즈를 오빠로 두고 있는 티나는 하일즈와 기레스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성에 무지했던 어린 시절에도 하일즈의 육봉은 거대했고 기레스의 물건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쥐방울만해서 지금와 생각해 봐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클로에 언니도 별 반응이 없었으니까.. 별 것 아닐거야.'
이미 능욕을 당하기로 결심한 이상 그 선택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인 법이다. 티나는 지금까지의 살아온 경험을 살려 필사적으로 희망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동정이었던 기레스가 능욕을 하면 또 얼마나 하겠어?'
아직까지도 처녀인 티나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 진다. 희망회로라 하지만 기본적으로 티나의 생각은 딱 잡아 틀린 것은 아니다.
상대가 여자를 후리고 후리고 또 후려서 그 기술 때문에 전생까지 해버리게 된 기레스만 아니라면 말이다.
'거기에 두 달만 버티면 되는 거니까..'
현실적인 기한이 있다는 것은 티나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어 버린다. 만약 범해지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면 아무리 티나가 하일즈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품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 발 벗고 나설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달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일단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부터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더해주는 것이다.
객관적인 기간만 따지고 보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조금만 생각을 돌려보면 버티지 못할 시간도 아니다.
거기에 더해 고작 2달에 걸려 있는 돈이 3천만 에보나라는 거금이라는 점은 2달이라는 기간의 인식을 좀 더 짧게 바꾸어 버린다.
단순히 두 달이라는 시간과 3천만 에보나를 갚는 두 달이라는 시간은 같은 시간이라고 해도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티나 본인이 빚을 진 것은 아니라곤 하지만, 빚에 의해 한 달의 가치가 1500만 에보나쯤 되면, 그것만으로 두 달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속내를 정리하고 있을 때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사삭]
"엇!"
"티나.. 이야기 다 끝났어."
어째선지 클로에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다가와 티나에게 말했다. 티나는 클로에의 그 물든 얼굴이 수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언니.."
"티나 미안해. 사실 오늘 기레스에게 범해지면서 약혼은 파기하려고 생각했는데.."
따로 기레스가 부탁한 게 없음에도 클로에는 자진해서 기레스의 협박에 살을 붙혀다 주었다. 이미 하일즈를 품 안에 두고 속이는 것은 일상이 된지가 오래인 클로에다.
기레스와 두 달이나 멀어져야 하는 이 상황은 정말로 달갑지 않았지만, 기레스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그녀는 이보다 더한 거짓말이라도 술술 내뱉을 수 있었다.
"언니가 왜 미안해 하는 거야. 미안해야 할 사람은 기레스잖아."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오빠 취급도 안해주네.'
티나의 버릇없는 말투에 클로에는 괜시리 심통이 났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지금 이 순간 클로에는 기레스에게 강간을 당한 피해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설마 기레스가 약혼 소식을 듣고 빚을 꺼내올 줄은 몰랐어."
"그냥 무시하지 그랬어?"
"미안. 계약할 때, 어머니 몰래 집을 담보로 잡아서.."
물론 기레스는 담보는커녕 아예 돈을 갚을 필요도 없다면서 억지로 쥐어 주었지만 클로에는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는 '기레스가 바라는' 피해자의 행세를 위해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술술 티나를 속여 나갔다.
설마하니 그 고지식해서 거짓말 하나 못하는 클로에가 자신을 능숙하게 속여 넘기고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 없는 티나는 클로에의 말에 맞장구 치며 말했다.
"능력도 그렇지만 인성도 정말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네. 그지?"
'으읏..'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개해 주는 티나의 모습에도 클로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아 살짝 이를 악 물었다.
"기레스한테 빚을 어떻게든 갚겠다고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해 봤는데.. 안되더라.."
기레스의 애무에 지금도 스커트의 안쪽을 애액으로 흠뻑 적시고 있는 클로에는 입에 발린 소리로 티나를 옭아매 나간다.
티나가 어째서 자신의 몸을 팔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 드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기레스가 바라는 일이라면.. 그리고 기레스와 함께 할 미래를 위해서라면 클로에는 기꺼이 티나의 마음을 희롱해 나갈 수 있었다.
"괜찮아. 언니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티나가 클로에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 못지 않게, 본래 클로에도 '이런 일만 없었다면' 자신을 잘 따르는 티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순서를 따지고 들자면 기레스, 가족, 하일즈 다음으로 좋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클로에에게 티나는 그저 기레스와 자신의 사이를 찢어놓고 기레스와의 달콤한 정사를 빼앗아간 얄미운 타인에 지나지 않았다.
"고마워 티나."
기레스와 만나기 전의 클로에였다면 목구멍에서 절대로 튀어 나오지 않았을 말은 너무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어라? 언니라면 좀 더 하지 말라고 설득했을 것 같은데.. 의외네.'
오랫동안 클로에를 알고 지내온 티나는 그 순순한 고마움의 표현에 살짝 위화감을 느꼈지만, 근거가 없는 위화감은 위화감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클로에가 이미 하일즈를 옛적에 배신하고 자신마저도 팔아 넘길 정도로 기레스에게 빠졌다고 상상할 수 없다면 아무리 위화감을 느껴봐야 헛일인 것이다.
"언니는 오빠와 행복한 결혼을 할 생각만 하도록 해. 내가 다 해결해 줄테니까.."
클로에는 호기롭게 말하는 티나의 말이 그렇게 가소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부탁할게."
그렇게 클로에는 엷은 미소를 띠며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티나를 은근히 사지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하아.."
클로에를 보내고 난 뒤, 집 앞에서 티나는 한숨을 쉬며 문고리를 잡았다. 클로에에게는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기레스에게 범해지게 될 티나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덜컥]
문을 열자 꿉꿉한 짠내가 티나의 코를 찔렀다. 아까 기레스와 클로에의 치태를 목격했을 때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방 안은 음취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티나는 역겹다는 티를 숨기지도 않고 인상을 구겼다.
"왔냐?"
기레스는 팬티 한 장만을 걸치고 다리를 꼰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티나는 후줄근한 기레스의 그 자세에서 느껴지는 여유가 아니꼽게만 느껴졌다.
"곧 육노예가 될 기분이 어때?"
"유... 뭐?"
"육노예말야 육노예."
범해진다 범해진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기레스의 입에서 저런 상스러운 말이 나올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티나는 당황으로 몸이 굳어 버렸다.
"유 육노예라니.."
"이거 참 골때리네. 티나 설마하니 내가 너를 사랑스럽게 안아줄거라 그런 착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티나는 영리했지만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만 굴러갔던 그녀의 세계는 너무나도 좁았다. 항상 꽃길만을 걸어온 티나는 소피아 이상으로 세상이 얼마만큼이나 잔혹한지 알지 못했다.
기레스의 사랑 따위는 준다고 해도 거절하겠지만, 그녀가 상상했던 기레스의 능욕은 기껏해 봐야 필사적으로 허리를 흔들다가 토끼처럼 혼자서 찍 싸버리는 비참한 섹스 정도가 한계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티나에게는 여지껏 살면서 최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설마하니 티나는 그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네가 내게 한 짓은 이미 머릿속에도 없는 모양이구만.. 기억이라도 나게 해줄까? 티나님 제발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야."
기레스는 무릎을 꿇고 티나의 다리에 매달리는 비굴한 시늉을 했다. 기레스의 그 연기를 보면서 티나는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깨달았다.
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티나는 그 찌질했던 기레스의 복수라고 해봐야 하일즈의 아내가 될 클로에를 더럽히고, 자신을 더럽히는 것 정도면 차고 넘칠 것이라 나이브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육노예는 못하겠냐? 지금이라도 그만둘래?"
이미 티나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레스는 실실 웃음을 흘리면서 도발하듯 물었다.
'으...'
예상했던 것보다 더 추잡하기는 했지만 티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차피 범해지는 것은 각오한 참이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노예 취급 따위야 하일즈의 행복이나 자신의 순결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이다. 아예 몸을 내어주지 않았으면 않았지 순결을 내어주면서 노예 취급은 싫다고 투정부릴 티나가 아니었다.
"개소리 집어 치우고 범하고 싶으면 범하지 그래?"
여기서 기레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티나는 몸이 범해지고 노예 취급을 당하게 될지는 몰라도 기레스처럼 비굴하게 마음이 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럼 사양않고.."
마치 새끼 강아지가 자신의 두려움을 쫓기 위해 왕왕 짖는 것 같은 앙칼진 티나의 말을 기레스는 가는 눈으로 음미하면서 자신의 발을 내밀었다.
"!?"
"핥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