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12화 (112/238)

〈 112화 〉 티나(4)

* * *

"쓰레기 같은 새끼들.."

티나는 기레스와 클로에를 역겨운 오물을 보는 듯한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티나가 하일즈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와는 별론으로 동생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특히 원래부터 싫어했던 기레스와는 달리 하일즈와의 결혼을 인정할 정도로 좋아했던 클로에에 대한 배신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역겨워.."

"야박한데? 티나."

기레스는 능글맞게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닥쳐!"

"클로에도 불쌍하기도 하지. 시누이가 될 여자가 저리도 박정하게 나오다니 말야."

"박정?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도 하일즈 오빠와 결혼을 내가 허락할 것 같아?"

"이런 일이라니? 내가 일방적으로 클로에를 범한 것 말인가?"

'기레스..'

이미 옛적부터 강간이 아닌 화간이었던 사실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클로에는 굳이 범행을 자백하며 티나를 도발하는 기레스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으득]

클로에만 없었다면, 기레스가 형식적으로 가족이 아니었다면 곧장 목을 따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티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일방적으로 범했다고? 언... 클로에는 저항도 하지 않고 있었잖아!"

티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히지 못해, 클로에를 언니로 대우해 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클로에가 마음만 먹으면 기레스 같은 남자는 떼를 지어 달려 들어도 모조리 도륙당할 정도로 양자간의 실력 차이는 명백했다. 그런데도 저항하나 않았던 클로에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이유가 있으니까."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클로에가 나같은 놈에게 범해지는 걸 동조할 리가 없잖냐."

아직도 머리 끝까지 치솟은 화가 가시진 않았지만, 기레스의 그 말은 티나의 이글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머릿속에 소화제를 끼얹었다.

"아니면 그런거냐? 클로에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하일즈를 내팽겨 치고 나같은 녀석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읏."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말로 말이 안되는 일이다. 티나는 클로에의 가족이나 하일즈 다음으로 클로에라는 여자를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클로에가 원래 문란하고 난잡한 삶을 사는 여자였다면 몰라도, 그녀가 아는 클로에는 그런 쪽에서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순결하며 고지식한 여성이었다.

잘못된 일이 있다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클로에라는 인간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몸을 팔 인간이 아니었다.

"웃기지마..."

"뭐?"

"이유가 있다고? 곧 결혼할 사람을 배신하면서 세.. 세... 저런 짓을 저지를 이유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에 기레스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면서 넉살좋게 말했다.

"있을 수도 있지. 경우에 따라서는 말야."

'뭐지... 이녀석 평소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

티나가 기억하고 있는 기레스는 자신감 없이 와들와들 떨면서 언제나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기레스에게선 마치 딴 사람을 보는 것만 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예전에 클로에의 어머니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거든."

"병이라니..?"

"왜 티나 너도 알걸? 그 당시에 하일즈가 꽤나 마음고생을 했었으니까."

"아..."

당시 하일즈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기레스조차도 쉽게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정도의 저기압을 하일즈라면 껌벅 죽는 티나가 모를 리 없었다.

당시에는 하일즈와 클로에의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생각해 티나는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설마하니 클로에의 어머니, 라임의 병이라는 이야기가 기레스의 입에서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거든. 그 돈을 내가 내어준거지."

"돈!?"

"치료마법 하나에 3천만이었던가? 그 돈을 내가 대신 클로에에게 내어줬거든."

"그 그런 돈을 네가 어디서.."

이미 티나는 오빠의 취급조차하지 않고 있었지만 기레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며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클로에에게 3천만 에보나를 빌려 주었다는 거고, 나는 그 대신 클로에의 몸을 요구했다는 것 뿐이다."

"크읏.. 비열한 놈. 그렇다 해도 클로에가 더럽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잖아."

"매정한 걸? 너는 어머니가 병에 걸려서 네가 몸을 팔지 않으면 돌아가신다고 한다면 어머니를 버릴 생각인가 보지?"

"뭐..?"

"우리 집이라면 3천만 에보나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10억이나 20억 아니 50억이었다면 어땠을까? 클로에의 집은 마법 외에도 갚아야 할 빚이 존재해서 도저히 3천만을 준비할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포기하면 어머니는 죽게되는 상황이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티나 너는 클로에와 같은 상황이라면 내게 몸을 파는 게 아니라 어머니를 포기하겠다 이 말인거지?"

기레스는 뱀처럼 교활한 시선으로 티나를 훑으며 비꼬듯 물었다.

"그럴 리.. 없잖아."

소피아에게 한번 호되게 당해 서운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라고는 하나, 티나는 기레스를 제외하면 가족 모두를 사랑했다.

기레스라면 백번 천번도 더 버리고 팔아버릴 자신이 있지만, 어머니인 소피아를 버린다는 선택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 해도 최대한 몸을 팔지 않는 선택지를 고르려 애쓰겠지만 어쩔 수 없이 양자택일로 선택해야 한다면, 티나는 자신도 어쩔 도리 없이 몸을 파는 선택을 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이곳에 팔아 넘긴게 사랑하는 어머니인 소피아라는 것을 티나는 알 길이 없다.

"그래 그래. 클로에도 그런 마음이었던거야.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게 안겼다 이거지."

기레스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면서 클로에를 변호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걸 곧이 곧대로 이야기해 주는 건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기레스는 구제할 길이 없는 바보라 생각하고 있는 티나는 그저 바보니까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있다고 치부하고 넘겨버릴 뿐, 그가 왜 저렇게 떠벌거리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기레스가 혼자 꼴사납게 허리를 흔드는 꼬라지를 봤을 때도 느끼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생각해 보면 분명 클로에는 이따금씩 기레스가 찌를때 움찔거리기는 해도 마치 목석처럼 거의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지나친 쾌감에 클로에가 몸을 가누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티나는 정말로 클로에는 기레스에게 범해진 순수한 피해자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클로에다. 티나에게 클로에라는 존재는 누군가를 배신할 수 있다는 상상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한 사람이었다.

직접 이렇게 기레스와 몸을 섞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아니 목격한 지금도 역시 클로에가 잘못되었을 리 없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올 정도로 지금까지 쌓아온 클로에의 인망은 두터웠다.

방금까지만해도 클로에에게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던 티나의 적의는 어느샌가 거짓말처럼 기레스 하나만을 향하게 되었다.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범해서 클로에를 안을 수 있다고 기뻐했더니만 설마 티나 네게 '첫 날'에 이렇게 들켜 버릴 줄이야."

"처음이라고..? 분명 언니의 어머니가 병에 걸린 건 1년도 전의 일이잖아."

"곧 하일즈와 결혼을 해버리면 돈으로 협박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지."

하일즈와 클로에가 결혼을 하게 되면 클로에는 가족이 되어 버린다. 유페르 집안에서 클로에를 위해 3천만 따위를 내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혼 소식을 듣고, 빚이 해결되어 버릴까봐 서둘러 이전에 빌려주었던 돈으로 언니를 협박한 건가.. 쓰레기 같은 놈.'

어차피 당사자가 아닌 이상 세부적인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티나는 대략적으로 상상을 해서 끼워 맞출 수밖에 없다.

기레스는 클로에를 협박했고 클로에는 '어쩔 수 없이' 그 협박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는 대략적인 상황의 전말이 드러나면 기레스의 설명에서 부족한 부분은 티나의 뇌가 멋대로 보정을 해버리는 것이다.

'아직 한번.. 그것도 억지로 당한거라고....'

단 한번이라도 쉽사리 용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티나는 상대가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클로에인데다, 가족의 목숨이 걸린 사정이었다면 한 때의 실수라고 생각해 줄 수는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레스.."

클로에는 클로에 나름대로 아주 작게 걱정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듯 기레스의 이름을 읊으며 그의 이런 행동을 멋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티나가 기레스에게 속는 것처럼 클로에는 클로에 나름대로 기레스가 고의로 스스로를 쓰레기로 몰아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막은 전혀 다르다.

'네가 희생할 필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클로에가 나서려는 순간 집중하고 있던 기레스의 손은 클로에의 은밀한 부분을 제지하듯 건드렸다.

'아흑.'

새하얗게 의식이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클로에는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기레스를 바라 보았다.

잠시 기레스는 티나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클로에에게 돌렸다. 살짝 마주친 시선과 애무에서 척하면 척으로 클로에는 기레스의 '나서지 말라'는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어 어째서..'

클로에는 어차피 티나에게 들킨 이상 기레스와의 관계를 은밀히 계속해 나가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티나에게 들켜 하일즈와 결혼해 하일즈에게 묶여 버리느니, 차라리 여기서 기레스를 향한 감정을 밝히고 기레스의 짐을 같이 덜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기레스의 제지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기레스가 틀릴 리 없다.' 이미 뇌리에 박혀 있는 그 대전제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하일즈 오빠는 네 동생이고 가족이잖아."

"어째서? 가족?"

기레스는 실실 쪼개던 미소를 일그러뜨리며 진지한 얼굴로 티나를 바라보았다. 항상 모자른 사람을 취급하기 바빴던 티나였지만, 일순간 그 표정변화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고 있을텐데?"

'아...'

기레스의 입장 따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티나지만 그제야 티나는 기레스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어째서 그런 큰 돈을 클로에에게 빌려주고 이 타이밍에 그것을 빌미로 협박을 했는지.. 그 마지막 퍼즐 조각은 그녀의 머릿속에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던 틈을 정확히 메꿔 버렸다.

'복수...'

머릿속에 떠오른 복수라는 단어는 기레스가 저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티나를 납득시켜 버린다.

기레스는 클로에의 예쁜 목에 팔을 걸면서 어깨동무해 모양좋게 봉긋 솟은 매끄러운 가슴의 밑둥을 움켜 쥐어 음탕하게 주물거렸다.

"아으읏.. 보 보지마 티나."

그에 클로에는 마치 강간이라도 당하는 것같은 울상지은 얼굴을 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기레스의 손길을 받아 들였다.

티나가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와중이었음에도 클로에의 가슴에 가득했던 불안과 초조했던 마음은 기레스의 손길에 의한 쾌감에 태양빛을 받는 눈덩이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그만둬!"

기레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레스의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아 버린 티나에게선 아까와 같은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까지 양심이 없는 건 아냐. 앞으로 두 달만 대주면 빚은 전부 변제하는 걸로 클로에와 이미 약속은 끝내 뒀다고. 알아 들었으면 방해하지 마라. 방해해도 좋지만, 그럼 하일즈에게 말해버리고 다 끝내버릴테니까 말야. 하일즈가 아는 편이 더 좋다면야 뭐 네가 먼저 말해버리던지?"

기레스는 마치 말해도 상관없다는 듯, 아니 오히려 말하고 싶은 기색마저 느껴질 정도로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 능글맞은 말투에선 '하일즈가 그토록이나 사랑해 아내로 삼을 클로에는 이미 내게 더럽혀 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기레스의 저열한 욕망이 드리워져 있었다.

'안돼..'

티나는 하일즈에게 클로에의 일을 알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에도 처녀가 아닌 사람은 얼마든지 있듯이 구태여 들추지 않아 모르는 편이 행복한 진실도 있는 법이다.

클로에가 바래서 한 것도 아니고 강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숨겨서 득 될 것은 있지만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자신의 열등한 형에게 아내가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들추어서 좋은 것은 단 한가지도 없는 것이다.

'한번 뿐인 아직이라면, 실수로 생각해 줄 수 있어.'

'하지만 2달은....'

2달동안 기레스에게 범해진다면 이미 그것은 실수로 치부할 수 없다. 아예 처음부터 몰랐다면 몰라도, 알면서도 모른 척할 정도로 가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오빠에게 말할 수는 없고..'

하일즈가 클로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유페르 가문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하일즈를 사랑하고 있던 티나는 더더욱 그 감정의 깊이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3천만이라는 돈도 없어.. 애초에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자기가 폭로해 버리겠지.'

돈때문에 클로에의 몸을 탐했던 것처럼 보여도 기레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복수이다. 필시 자신이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하려 든다면 기레스는 분명히 하일즈를 망쳐 버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폭로해 버릴 것이 틀림없다고 티나는 생각했다.

'어쩌지..'

그저 남의 일이라고 제3자의 시선에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티나는 가지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은 전신에 넘쳐 흐르는 애욕의 두껑을 닫아가면서 하일즈의 사랑을 기원해 줄 정도로 병적으로 자신의 오빠인 하일즈를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전녀전으로 기레스를 바라보는 소피아를 생각나게 할 정도의 순종적이며 순수한 사랑이었다.

'두 달... 복수...'

'복수!?'

복수의 대상은 하일즈 하나가 아니다. 티나는 마른 침을 꿀걱 삼켰다. 자신만 희생하면 모두가.. 특히 하일즈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떠올린 것이다. 하일즈에 비하면 '자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티나가 마음을 먹는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레스."

"뭐야? 방해하지 말라고 했.."

"그 두 달의 능욕을 내가 받아주면 클로에 언니는 놓아줄 수 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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