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클로에(60)
* * *
"음.."
클로에는 기레스의 품을 끌어 안고 잠시 동안의 단잠을 만끽했다. 기레스의 물렁물렁한 가슴팍에 그녀는 옥구슬 같은 얼굴을 파묻고 부비며 체취를 탐해나갔다
연인과의 추억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외간남자와 살을 섞는 금기의 행위를 범하고 있음에도 클로에의 얼굴에는 행복으로 그득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속살을 간질이는 클로에의 얼굴에 기레스는 눈을 뜨며 말했다.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
"아..."
이불 안을 꼼지락 거리는 클로에의 표정에는 어느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의 아쉬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건 그렇고.. 클로에 하일즈의 고백은 언제 받을 생각이야?"
"하일즈?"
꿈결 같은 행복에서 현실로 돌아온 클로에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 졌다.
"글세..."
"한번 하일즈와도 섹스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윽.. 어째서?"
클로에는 명백하게 싫은 티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하일즈와의 정사를 좋아하는 척할 필요 없는 클로에는 하일즈를 좋아하고 있음에도 순수한 의미의 혐오의 색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배신하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어도, 클로에는 자신의 그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배신인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혹시 모르잖아? 애무와는 다르게 섹스는 기분이 좋을수도 있고.."
'흐음..'
클로에는 정말로 섹스가 기분이 좋을 지 모른다 해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너는 모를 지 모르겠지만 성기가 크면 클수록 섹스를 할 때 기분이 좋다는 게 통설이거든. 이미 봤겠지만 하일즈의 물건과 내 물건은 꽤 많이 차이 나니까..."
'확실히...'
기레스는 자신보다, 아니 이세계에서도 내로라 할 수 있을 대물을 가진 하일즈를 부러워하는 듯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자연스레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무 커서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괴롭기만 했던 하일즈의 크나큰 육봉은 클로에에게는 재앙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흉물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빨고 싶다.'
클로에는 입 안의 혀를 굴리면서 슬그머니 시선을 기레스의 하복부로 향했다. 적당히 힘을 잃고 늘어져 있는 기레스의 육봉을 보고 클로에는 입에 넉넉히 고인 군침을 삼켰다.
'처녀를 가져간 게 기레스여서 다행이네.'
쾌락에 몸도 마음도 절여진 클로에에게는 기레스의 물건이 작다는 것조차도 장점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라면 누구나가 부러워 할 대물인 하일즈의 애무가 불쾌하면 불쾌할 수록 그와 대비된 기레스의 자지의 호감은 올라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작았던 기레스가 처녀막을 찢었을 때도 순간적으로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는데, 입에 무는 것만으로도 괴롭기 짝이 없는 하일즈의 육봉이 자신의 음부에 찔려 넣어질 것을 생각하자, 클로에는 등골이 오싹해 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까는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지그시 불만스러운 눈으로 클로에는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사랑하고 있어. 믿지 않는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기레스는 어쩐지 진지해 보이지 않는 너스레를 떨면서 대답했다.
"그럼 어째서 하일즈와 섹스하는 것을 그렇게 권하는 거야?"
귀엽게 쏘아붙히는 클로에의 말에 기레스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목소리를 내리 깔면서 말했다.
"너와 이렇게 계속 만나고 싶으니까."
"어..?"
예상치 못한 기레스의 반응에 클로에는 놀란 토끼 눈으로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랑한다는 고백을 입으로 듣기는 했지만, 그녀는 하일즈를 끔직히 위하는 기레스의 성격상 필시 덤덤한 어투로 적당히 넘겨버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와 하일즈가 맺어지지 않으면.. 이렇게 너를 사랑할 기회도 얻기 힘드니까 말이지. 너와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샛서방이어도 좋다는 거야."
샛서방'이어도'가 아니라, 샛서방'이어서'가 취향인 주제에 기레스는 보란듯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클로에의 마음을 요리해 나갔다.
"하일즈에게는 미안한 것도 있으니까.."
이어 기레스는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듯 눈을 내리 깔면서 말 끝을 흐렸다.
'기레스..'
그 하일즈를 끔찍하게 여기는 기레스가 하는 말이다. 기레스의 마지막 말은 기레스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토록이나 사랑하는 동생인 하일즈를 배신했다는 결심처럼 느껴져, 클로에의 마음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일즈에 대한 배신을 입에 담고 되새기고 있으면서도, 클로에의 마음 속에서 하일즈에 대한 미안함과 불쌍함은 이미 먼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너도 진짜로 행복하면 좋겠기도 하고.."
"음?"
"하일즈와 궁합이 의외로 좋아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사실 그것보다 좋을 건 없겠지. 안 그래?"
"아.. 으응.."
하일즈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마음이 있다면, 기레스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이미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클로에는 떨떠름한 어투로 그 말에 답했다.
'그나저나 기레스는 역시 기레스네..'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연인이자, 이제는 남편이 될 하일즈와 기레스를 비교했다. 자기 자신만 아는 하일즈와 달리, 스스로의 사랑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만 '같아 보이는' 기레스의 말은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촉촉히 스며들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포기하면서 하일즈의 행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모순되어 있음에도, 기레스가 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이뻐보이는 클로에의 그 꼴은 꼭 눈에 콩깍지가 씌여버린 순진한 소녀를 연상시킨다.
"오랜만이야. 하일즈."
며칠 후, 클로에는 어젯밤에도 기레스와 광란의 시간을 보내어 이제는 누구와 누구의 보금자리인지 모를 아지트로 하일즈를 불러 들였다.
'읏 이 냄새. 한동안 빨래도 하지 않고 방치해서 그런 건가..?'
그 클로에가 외간남자를, 그것도 자신의 형인 기레스를 이곳에 불러들여 살을 뒤섞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하일즈는 당연히 방 안을 메우고 있는 꿉꿉한 음취가 오래 전 나누었던 자신과 클로에의 사랑의 결정체라고 생각했다.
"결정은 한거지?"
"응."
클로에는 기레스를 대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클로에. 나와 결혼해 줄래?"
성교의 음취로 가득한 방에서 하일즈는 보기 좋게 무릎을 뚫어 분위기를 잡아, 다시 한번 더 준비해 둔 반지를 꺼내며 클로에에게 청혼했다.
"응. 좋아."
얼굴을 붉히는 기색하나 없이 클로에는 평소의 냉정한 포커페이스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덤덤한 목소리로 하일즈의 청혼을 받아 들였다. 하일즈가 생각했던 언제나와 같은 그녀의 모습이다.
"얏호!"
클로에의 가녀린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준비한 반지를 끼운 하일즈는 자존심이고 격식이고 전부를 집어 던지고는 껑충 날뛰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으..'
좋아할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 고지식한 하일즈가 자신을 버리면서 저렇게 좋아하는 것을 본 클로에의 속은 죄책감으로 썩 편치 않았다. 이제는 남편이 될 사람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싱숭생숭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 저렇게 좋아할 정도면...'
이 결혼은 하일즈를 위해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기레스의 말도 안되는 변명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자신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음을 달랬다.
기레스의 악마의 말마따나, 이 추잡하게 비틀려 버린 관계에서 불행한 사람은 없었다. 기레스도 불완전하나마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하일즈도 그토록이나 원하던 결혼을 할 수 있어 저렇게나 좋아하는데다, 클로에 본인조차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는 하지만 '우정'과 '사랑'을 동시에 챙길 수 있어 불행은커녕 행복을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식은 언제 올리는 게 좋을까?"
"식?"
"그래. 결혼식 말야."
"글세.. 지금 여기서 결정해 버릴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 천천히 가족들과 상의를 해봐야 겠어."
의욕에 가득 찬 하일즈를 보면서 클로에는 보이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클로에.."
"어?"
"저.. 이렇게 청혼을 하고 할 말로는 적절하지 않기는 한데.."
멋스럽운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하일즈는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 이제 우리는 부부가 될 사이잖아."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하일즈의 입에선 흥분을 숨길 수 없는 뜨거운 입김이 클로에에게 전해진다.
"그러니까 이제.. 섹스를 해도 좋지 않을까?"
클로에와 냉전을 겪은 이래로 하일즈는 자위만으로 성욕처리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기레스에게 조교되어, 남자를 후리는 데 최적화 된 클로에의 애무에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진 하일즈가 단순한 자위만으로는 만족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위를 하면 할수록 하일즈는 클로에의 가녀린 손과 녹아내릴 듯한 부드러운 입, 그리고 탱글탱글한 가슴의 감촉만이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라 음심은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끓어올랐다.
처리한다고 처리하는데도 점점 쌓여나가기만 했던 성욕은 집안 그득히 남아있는 음취에 의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섹스..'
기레스에게 듣기도 했겠다. 클로에는 언젠간 터질거라 마음의 준비를 다지고 있었음에도, 하일즈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의외로 궁합이 좋아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얼마 전 기레스에게 들었던 그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하일즈의 육봉에 자신이 느낄 수 있을 리 없다고 쉽게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그녀는 문득 혹시나 하일즈의 애무가 기분이 좋으면 어떻게 될 지 걱정스런 마음이 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기레스가 하는 말이다.
기레스가 틀린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기레스의 말을 들어서 후회를 해본 적은 거의 없는 클로에에게 기레스의 말은 아무리 사소로운 일이라 해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순수히 육체관계 때문에 하일즈와의 결혼을 꺼려하게 되었으면서도 클로에는 결혼을 거부한 원인인 하일즈와의 육체관계가 회복될 지 모른다는 사실에 깊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하일즈와의 성행위가 기분 좋을지도 모른다면 그렇기에 더더욱 하일즈와 몸을 섞고 싶지 않은 클로에다.
"저기 하일즈.."
"응!"
"이전에도 말했지만, 역시 섹스는 결혼을 하고 나서 해야되지 않을까?"
분명 기레스는 하일즈와 한번 안겨보기를 넌지시 권했지만 클로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거절의 의사였다. 기레스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쑬 수 있다고 해도 믿고 따랐을 클로에는 '바로 그렇기에' 더더욱 하일즈와 섹스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기레스의 의도를 거절하는 것이라고 해도, 클로에는 하일즈와의 관계가 봉합될 가능성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으... 아 알겠어."
상대가 클로에만 아니었다면 밤을 새어서라도 설득하고 싶을 정도로 하일즈는 전신의 혈관이 바짝 곤두설 정도로 발정해 있었지만, 클로에의 완고함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순순히 섹스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리 하일즈의 성격이 오만하고 발정해 있다고는 해도, 이 고생을 다해가면서 겨우 이루어 낸 결혼을 섹스 하나로 날려 먹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은 아니었다.
"대신에... 오랜만이니까. 애무라면 어때?"
클로에는 섹스를 거절해 상심해 있는 하일즈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레스에게나 보여주는 애정어린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름다운 손가락을 뱀처럼 요사스럽게 놀리며 하일즈에게 먼저 애무를 권하기 시작했다.
평소 정말로 보기 힘든 희귀한 클로에의 모습과 마음을 녹여 버릴 것만 같은 요염한 자태에 방금까지만해도 못내 아쉬워 했던 하일즈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어!? 나야 좋지!"
하일즈를 배신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레스의 제안마저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배신하는 클로에의 입가에는 너무나도 고혹적인 야릇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