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클로에(58)
* * *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니..?"
"아니지. 모두가 불행해지지 않는 방법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기레스는 망설이는 척 머뭇거리며 뜸을 들였다.
"그게 뭔데..?"
기레스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클로에는 뜸을 들이는 기레스의 대답을 촉구했다.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해 보면 결국 네가 하일즈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는 궁합이 좋지 않아서라는 이야기지?"
"응..."
"그럼 그 궁합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어때?"
"다른 부분..?"
"하일즈의 다른 행실에도 실망한 부분이 있어?"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순수한 의미의 대답이지만, 만약 하일즈가 들었다면 그것만큼 잔혹한 말은 없었을 것이다.
클로에의 그 말은 다른 행실에서 실망한 적이 없음에도, 순수히 하일즈와 살을 섞는 행위가 불쾌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일즈의 청혼을 거부했다는 뜻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직도 하일즈가 싫은 건 아니겠네.."
"그거야 당연하지."
클로에는 수년 간 함께 지내온 정 때문에라도 하일즈가 싫지 않았다. 하일즈가 자신과 육체의 궁합이 잘 맞았다면, 기레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을 붙힌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결혼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하일즈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다행이네 아직 하일즈를 사랑하기는 한 모양이어서.."
'어?'
질문은 분명 하일즈가 싫은지를 물은 것이었지만, 기레스는 클로에의 싫지 않다는 대답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로 곡해해 버렸다.
'사랑...'
하일즈가 싫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좋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냐 묻는다면 딱 잘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망설이고 있는 시점에서 그녀의 본심이 무엇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으...'
클로에는 방금 수줍음을 무릅쓰고 고백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불만어린 시선으로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기레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람.'
"그렇다는 건 궁합의 문제만 해결되면 결혼을 해도 상관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네."
"뭐!?"
기레스의 말에 클로에는 화들짝 놀랐다.
"하일즈와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야?"
예의상 묻기는 했지만 클로에의 표정은 마치 썩은 구정물을 들이킨 것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설사 하일즈와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이제와서는 그다지 듣고 싶은 생각은 일지 않았다. 이미 그녀에게 있어 하일즈라는 존재는 기레스와의 애무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한 양념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아마 무리겠지."
기레스는 애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기레스가 마음먹고 하일즈의 애무가 기분이 좋게 만들어 줄 생각을 품는다면 불가능 할 것도 없지만, 죽었다 깨어나는 한이 있어도 하일즈 좋으라고 기레스가 그런 도움을 줄 일은 없었다.
반면 하일즈와의 애무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기레스로부터 통보받은 클로에는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띠며 은근히 기쁜 기색을 풍겨 나갔다.
"저번에 내가 하일즈의 애무가 기분이 좋게 만들어 준답시고, 안마해 준 적이 있잖아."
"아.. 그때도 기분 나빴었지.."
이제 숨길 것도 없겠다. 클로에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기레스가 들으란 듯이 자신의 연인의 애무가 불쾌했다는 혼잣말을 툭하고 내뱉었다.
"그걸로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면 내 실력으로는 하일즈의 애무를 기분 좋게 만드는 건 불가능해."
마음이 편해진 클로에는 의아해 하면서 기레스에게 물었다.
"? 그럼 방법이 없는 것 아냐?"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음?"
"하일즈가 몸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면, 그것을 대신 해줄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
"무... 무무.. 무슨 소릴 하는거야!"
클로에는 홍당무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허공에 팔을 휘저으면서 당황해 했다. 그것은 언제나 기품있고 절도있는 클로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레스 밖에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하일즈와 결혼하면서 나와 육체관계를 맺자는 말 그대로의 의미야. 네가 허락한다면 이야기지만..."
"하.. 하지만 그건.... 하일즈를 배신한다는 이야기잖아."
클로에도 그런 생각을 아주 안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설마 그렇게 하일즈를 끔찍히 위하는 기레스의 입에서 저런 제안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 하지만 이거라면...."
기레스는 살짝 숨을 고르고 굳은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
일년 전의 클로에였다면 기레스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라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클로에에게 기레스의 말은 악마의 속삭임처럼 너무나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자신과 맺어질 수 있어서' 행복할 하일즈와, 기레스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어' 행복한 자신, 그리고 하일즈와 자신을 통해 원하는 것을 이룬 기레스까지.. 삼각대가 절묘하게 지탱하는 것처럼 모두가 적절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최고의 행복이라고는 빈말로도 말 할 수 없지만 기레스가 말한 것처럼 모두가 파멸로 치닺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미 마음의 정리를 한번은 끝낸 클로에는 마음 같아서는 하일즈가 아닌, 기레스와 맺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기레스의 말마따나 하일즈와 헤어지면서 기레스와 맺어지는 건 하일즈가 청혼한 그 순간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 와중에 기레스가 제시한 차선책의 샛길은 그녀에겐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기레스의 제안은 너무나도 감미롭고 매력적이었지만 한가지, 하일즈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것은 클로에도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미숙한 하일즈를 위한' 연습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통해 죄책감 없이 마음껏 기레스와 몸을 섞어올 수 있었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남편인 하일즈를 앞에 두고도 기레스를 요구하는 것은 어떤 말을 가져다 붙혀도 배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망설이는 클로에에게 기레스는 악마의 말을 속삭여 온다.
"배신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은 하일즈를 위해서 '헤어지지 않기 위해' 내게 안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꿀꺽]
기레스의 말에 클로에는 목 안에 고인 군침을 삼켰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제 삼자가 되어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헛소리지만, 거기에 각자 개인의 사정이 개입되면 생각하기를 포기한 백치가 되어 흐물흐물 녹아 마음껏 속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레스의 말은 달콤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배신은 배신이니까, 클로에 네가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설득은 해도 강요는 하지 않는 기레스기에 선택은 언제나 클로에의 몫이다.
"너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잖아?"
"아...."
언젠가 자신이 기레스에게 했던 말이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주 별 것 아닌 사소한 일로, 하일즈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클로에는 '기레스가' 그만큼 자신을 똑바로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이 달달히 들끓기 시작했다.
'그래... 난 책임질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지..'
무책임하게 일을 벌려 빚을 잔뜩 만들어 놓고 야반도주해버린 아버지 덕분에 클로에는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 왔다.
죄를 범하지 않고, 받은 게 있다면 갚아내고, 누구에게도 손을 빌리지 않고, 흠이 잡히지 않게,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야 말로 그녀가 추구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추구하던 삶은 기레스에 의해 보기 좋게 일그러져 버렸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클로에에게 후회나 아쉬움 따위는 전혀 없다.
기레스의 거미줄에 걸려 잔뜩 희롱당한 그녀는 완벽함을 추구하던 지난 날의 자신이 얼마만큼이나 불완전 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완벽함만을 추구하던 때에는 알지 못했지만, 세상에는 일그러져 있기에 더욱 감미로운 것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아버지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괜찮아. 기레스. 나는 이미 각오했으니까."
클로에는 입가에 살포시 음사한 미소를 머금고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각오를 다짐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결과에 대한 제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돌려 말하면 그 책임을 질 각오를 다질 수 있다면 책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레스와 계속해서 인연을 쌓아나가기 위해서라면.. 해서는 안되는 죄를 범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 하일즈에게 들켜서 자신이 파멸에 치닺게 되어도 좋다고 클로에는 얼마든지 각오해 나갈 수 있다.
길고 긴 시간동안 기레스가 한땀 한땀 정성들여 클로에의 마음에 새겨 온 스스로에 대한 타협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봉오리를 활짝 펴 만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일즈를 위해' 내 몸을 달래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