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02화 (102/238)

〈 102화 〉 클로에(57)

* * *

기레스가 하일즈의 청혼을 들었다는 사실에 클로에의 마음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 졌다.

[으득]

'그 새를 못 참고..'

클로에는 고백을 한 지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자신의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한 하일즈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하일즈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만큼이나 자신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각오를 가족에게 내비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봐 줄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일즈와의 결혼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클로에의 감성은 하일즈에 대한 원망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클로에는 예쁜 눈알을 굴려가면서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평정심을 잃어본 적이 없는 클로에지만, 기레스의 앞에서는 언제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마음이 동해 버리는 클로에였다.

"하일즈도 정말 과감하단 말야. 네가 고백을 많이 받으니까 결혼이라는 칼을 뽑아들 줄이야."

클로에의 속도 모르고 기레스는 천진난만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일즈의 과감한 결단력에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레스는 자신의 말을 듣고 시무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고민하는 클로에의 그 귀여운 모습을 기쁘게 감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클로에는 맞는 것이면 맞고, 아닌 것이면 아니라고, 단호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고지식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로 단순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쾌락에 저속해져 사랑하는 연인의 청혼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기레스에게 극한의 희열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그럼 조금 더 조여볼까?'

맛있게 여문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기레는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조금 아쉬운걸.."

"어어..?"

클로에는 이미 표정관리조차 할 수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클로에는 톡 건드리면 울을음 터트릴 것만 같이 울상을 지은 얼굴로 기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클로에를 보면서 기레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쉽다는 듯 마음에 쐐기를 박아 나갔다.

"이제는 너와 연습하지 못하게 될테니까 말야."

"아...."

전날 밤. 밤새 자위를 해가면서 잊고 싶었던, 기레스에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던 현실에 클로에의 속은 성한 곳 하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헐어 버렸다.

'어쩌지... 어떡해..'

생전 처음으로, 클로에는 눈앞이 깜깜해 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레스와의 연습이 끝이나고, '평생'을 하일즈의 손길을 받으며 살아가야 된다는 사실은 그녀를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나락으로 던져 버렸다.

하일즈와도 평범하게 기쁘고 행복한 나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굳이 횟수로만 따지고 들자면 행복한 나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행복들은 하일즈의 애무, 그리고 기레스의 애무와 비교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너와의 연습들은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게."

그렇게 혼란한 마음을 기레스는 능숙하게 쿡쿡 찌르고 들어와 클로에의 마음을 유린해 나간다.

기레스의 말은 평범하게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벼랑 끝에 몰린 클로에는 좋게 좋게 받아들일 여유는 전혀 없었다.

한번 지나가 버린 한 때의 추억이라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레스와 함께했던 그 행복한 나날들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때의 추억으로 단절되어 버릴 것을 생각하자 클로에는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것만 같은 고독감을 느꼈다.

지금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요구해 오면 은근히 잘난 척 투덜거리면서 애무를 해줄 것 같은 기레스의 모습을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당연한 듯 이어져 왔던 이 나날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를 깨달았다.

'하일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기레스에게 연습의 끝을 통보받은 이 순간, 클로에는 하일즈가 느꼈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레스."

"응?"

"아직 난 하일즈의 청혼을 받지 않았어."

마치 하일즈가 그랬던 것처럼 방금까지 안절부절하지 못했던 클로에의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그랬지. 하일즈의 말을 들어보니까.. 조금 생각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어차피 받을 거잖아?"

"아니.."

"뭐...?"

"미안. 기레스 나는 하일즈와 결혼하지 못하겠어."

"어, 어째서!?"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기레스는 좌절감이 섞인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서, 설마.. 이번에 고백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타인의 '고백' 따위에 무너질 여성이었으면 기레스가 이 고생을 다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기레스는 하일즈도 한번 물었던 질문을 클로에에게 들으란 듯 호들갑 떨며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어째서.."

"그... 예전에 기레스 네가 한번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지?"

"무슨 이야기?"

짐작가는 게 없다는 듯 의아해 하며 기레스가 반문했다.

"부부 사이에는 궁합도 중요하다는 이야기."

"아... 그런 이야기도 했었지. 하지만 하일즈와는 전혀 문제 없잖아? 하일즈와는 항상 제대로 느끼고 있었던 것 아니었어?"

그것이 지금까지 클로에가 기레스에게 쌓아 온 거짓말이다. 한번 시작된 멈출 수 없는 눈덩이처럼 굴러가 커져버린 거짓말. 기레스는 보란 듯이 그 거짓말에 속아온 친구를 연기해 나갔다.

"사실은... 아니었어."

"아니었다고.. 으음.."

기레스도 호들갑을 떨면서 놀라는 것을 그만두고 진지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클로에의 말을 받아 주었다.

"하지만 항상 나와 연습을 했잖아. 하일즈의 애무가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것 아니었어?"

"사실은 기분이.. 안좋아서 네가 가르쳐 준 하일즈를 기쁘게 만들어 주는 너와 연습한 애무를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 너와 연습을 한 이후에는 그래도 하일즈에게 애무를 할 수 있게 될 정도로 적응을 할 수는 있게 되서.. 이렇게 연습을 해나가면 언젠가 하일즈와도 더 느낄 수 있게 될 수 있을 줄 알았어."

기레스와 연습을 해나가면 하일즈와도 더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음에도 클로에는 마치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그럴싸한 거짓말을 늘여 놓았다.

벼랑 끝까지 몰린 와중에도 클로에는 기레스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을 속여나가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기레스에게 조교당하면서 몸과 마음에 깊히 새겨진 변명은 클로에에게 있어선 이제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자신이 바란대로 달달하게 저속해졌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클로에의 발언에 기레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니었어..."

"잠깐 잠깐.. 하일즈의 애무가 엄청 기분이 좋지는 않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까지 나쁠 수가 있나?"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장본인이 자신임에도, 기레스는 마치 결백한 제3자 같은 반응으로 클로에를 설득하는 시늉을 했다.

"궁합이 중요하다고 말한 건 너잖아. 기레스 너와는... 다르게.. 하일즈는 정말 기분이 나쁘단 말야."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얼굴을 붉히며 클로에는 그렇게 '기레스의 애무는 기분이 좋았다'는 것을 은근히 어필했다.

"그런가.. 궁합이 안좋으면 부부 사이가 깨질 수 있다는 그 말은 사실이었던 건가."

그런 클로에의 은근한 고백에도 기레스는 짐짓 모른 척, 자신이 읽었던 책에 감탄하는 척을 했다.

'칫..'

"미안하다 클로에."

기레스는 뜬금없이 클로에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어..? 뭐, 뭐가?"

"네 마음도 생각하지 못하고 이렇게 주책도 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서 말야. 하일즈에게도 딱 잘라 거절을 하지 못해서 그렇게 둘러댄 거지?"

사실은 좀 더 기레스와 연습을 이어나가고 싶어서 하일즈의 청혼을 보류한 것이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클로에는 기레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우.."

기레스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보란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친구사이 외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진 건가? 아쉽지만 여기서 더 붙잡게 되면 네게 실례가 되겠지."

본인이 원하는 미래가 있음에도, '하일즈와는 달리' 클로에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기레스의 말은 한 단어도 빠짐 없이 클로에의 몸에 스며들었다.

"기, 기레스.."

"응?"

"저기...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기레스는 어여쁜 얼굴에 홍조를 띄고 자신을 살짝 올려다 보는 클로에를 흘끗 거리며 고개를 홱 돌리곤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뭐, 뭐냐? 그 고백같은 질문은.. 어디가서 다른 남자한테는 절대로 그런 질문 하지 마. 내가 아니었으면 백이면 백 고백하는 줄 알 걸?"

'으.....'

고지식한 마음을 쥐어 짜고 짜낸 회심의 고백을 그렇게 퉁겨버리자 클로에는 절로 안달이 나버렸다.

"대답하자면 좋아하지. 가족으로 삼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레스의 그 말에 클로에의 마음은 화산이 폭발해 버린 것처럼 화끈 달아 올라버렸다. 마치 단숨에 술을 몇병 들이킨 것처럼 후끈 거리는 기운에 클로에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싸늘하게 아리고 시리고 쓸쓸해서 속이 썩어 문드러졌던 몇분 전과는 달리 클로에의 온몸은 기레스에게 정성어린 애무를 받는 것처럼 따뜻함과 푸근함, 달콤함을 잔뜩 머금어 활기차게 맥동하고 있었다.

"뭐 이제는 무리겠지만.."

"네.. 네가.."

"뭐?"

"네가 나를 가족으로 삼으면 되잖아."

필사적으로 쥐어 짜낸 클로에의 고백을 들은 기레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클로에는 기레스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우물 거렸다.

"고백이 맞다구.."

"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네가 어때서? 자기 비하는 그만해."

클로에는 마치 제 연인을 챙기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 궁합으로 깨지는 부부가 있다면... 궁합으로 만들어지는 부부도 있지 않을까? 난 네게 애무를 받을 때는 기분이 정말로 좋았단 말야."

달콤한 향기로 벌레를 유혹하는 꽃처럼 클로에는 스스로의 귀까지 빨갛게 물들여 아름다움을 뽐내며 기레스를 부추겨 나갔다.

"으음.."

고민하는 기레스를 보고 클로에의 천천히 클로에의 안색은 서서히 창백하게 일그러 졌다.

"혹시 기레스 넌 내가 싫은 거야?"

"싫을 리가 있겠냐?"

기레스의 말에 클로에의 화색은 단숨에 빛을 되찾았다.

"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어."

"뭐!?"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줄로만 아는 학생들이 본다면 클로에가 맞냐고 의심할 정도로, 클로에의 표정은 기레스의 말에 따라 롤러코스터처럼 정신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 그거지? 바로 결혼은 할 수 없다거나.."

최근들어 온갖 남성들의 마음을 후려, 수도없이 고백을 받아 온 클로에는 아무리 기본적으로 담백한 기레스라도 자신이 고백한다면 기레스가 받아주지 않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사귀는 것도 무리라는 이야기야."

"어째서.."

기레스의 대답에 클로에의 표정이 무너져 내린다.

"넌 하일즈와 사귀고 있었으니까."

"아..."

"생각해 봐라. 너와 내가 사귀게 되면 하일즈가 어떻게 생각할 지.."

기레스의 말에 이성을 되찾은 클로에는 영원토록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감까지 내비치며, 모든 것을 자신에게 걸었던 하일즈를 떠올렸다.

하일즈의 성격상 다른 사람이라해도 용서할 수 있을 리 없었겠지만, 기레스라면 더더욱 용서하지 못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형이 사귀고 있던 연인을 가로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분개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나 클로에 하나에 자신을 전부 집어 던질 각오를 다진 하일즈라면 미래의 파국은 이미 정해진 결말이나 다름 없었다.

"거기에 하일즈의 청혼은 어떻게 거절할 생각이야?"

"뭐?"

"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궁합이 좋지 않아서.. 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벌써 수년 간 사귄 관계잖아. 이제와서 갑자기 어중간한 변명을 해봐야 하일즈한테는 통하지 않을거라고.. 물론 네가 결혼하기 싫다면야 하일즈가 뭐라 하겠냐마는.."

너무나도 혼란한 마음에 조금도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기레스의 말처럼 확실히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나와 사귀는 건 물론이고, 결혼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잖아."

"아으....."

기레스의 말은 항상 정론이고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고, 몸도 마음도 세뇌되어 버린 클로에지만 이번만큼은 기레스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기레스와 헤어져야 한다니.. 싫어!'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클로에를 보면서 기레스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가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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