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101화 (101/238)

〈 101화 〉 클로에(56)

* * *

"겨... 결혼이라니..?"

"말 그대로의 이야기야. 클로에. 나와 결혼해 주지 않을래?"

하일즈의 고백을 들은 클로에가 처음 떠올린 감정은 기쁨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갑작스럽다고는 하나 사랑하는 연인의 청혼이었음에도, 그녀는 티끌만큼의 기쁨은커녕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지금..'

이 타이밍에 청혼을 해 온 하일즈가 원망스럽다는 생각마저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클로에의 마음은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클로에?"

"음..? 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직 우리는 학생일 뿐인데 결혼의 이야기라니.."

"학생이나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만나지 않는 사이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클로에는 하일즈가 연이은 고백에 결혼이라는 수단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연인과 부부는 서로 사랑이라는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견고함은 차원이 다르다. 연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이 암묵적인 금지라고 한다면, 부부에게는 법적으로 금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온도 차가 큰 것이다.

확실히 결혼을 하게 되면 하루가 멀다하고 우후죽순처럼 쇄도하는 고백의 파도는 잠잠해질 것이 틀림 없었다.

연인에게 고백을 하는 것은 설사 하일즈에게 정의가 있다해도 일일히 보복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렇게 절대다수의 고백으로 고백을 하는 쪽이 다수가 된 상황과, 유페르 가문의 간판인 하일즈의 입장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일일히 보복하기 애매한 것은 어디까지나 연인일때의 이야기고, 그 대상이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고백의 대상이 유부녀라 한다면 누가봐도 고백을 시도하는 쪽이 문제인 것이며, 그런 불한당에게 보복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 되어 버린다. 기존에 싸그리 잡아 족치기에는 미묘했던 하일즈의 입장은 보기좋게 반전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클로에의 매력이 둘도 없을 정도로 농밀하고, 하일즈를 무시할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유부녀, 그것도 하일즈의 유부녀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마을에 많을 리 없었다.

"그.. 고백 때문에 그런거라면..."

클로에는 자신이 나서서 이 상황을 해결해서라도 하일즈의 결혼 이야기만은 막고 싶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하일즈는 고개를 젓고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라내었다.

"그런 면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야."

침착하게 자신의 마음을 정돈하며, 그윽한 시선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는 하일즈는 어느 여성이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마음이 뒤숭숭하기 짝이 없는 클로에에게 그런 조각 같은 외모 따위는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동안 혼자서 많이 생각해 봤어. 그리고 혼자가 되고 나서야, 내가 너를 얼마만큼이나 사랑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지. 나는 네가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어."

"......"

"지금까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너와 함께 할 각오는 없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네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 지금은 내가 내린 이 선택에 대해 영원토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하일즈는 준비해 온 반지를 꺼내 클로에에게 보이며 다시금 감정을 담아 고백을 시작했다.

"클로에 나와 결혼해 주지 않을래?"

하일즈는 클로에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지만, 클로에의 입에서는 하일즈의 기대와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

"뭐...? 그 그게 무슨.."

하일즈의 청혼은 그의 성격을 잘 반영해 주고 있었다. 겉은 번지르르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감정을 자각해 클로에를 손에 넣기 위한 일방적인 통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거기에 클로에에 대한 배려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하일즈는 클로에의 사정은 고려해 보지도 않은 채, 당연히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나 혼자 쉽게 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집안의 문제도 있고.."

평소 시원시원하던 클로에 답지 않은 우물쭈물 거리는 태도에 하일즈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서 설마.. 클로에 잠시 안 본 사이에 다른 남자의 고백을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그보다 더 심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하일즈였다.

"그럴 리 없잖아. 다만.. 결혼은 좀 더 신중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것 뿐이야."

하일즈가 의심을 포함해 불안해 하자, 클로에는 입을 열어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도망친 것 알고 있지?"

"어."

"나는 그렇게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자신의 아버지를 '팔아가면서' 클로에는 그럴듯한 거짓말로 하일즈를 속여 청혼을 보류해 나갔다.

하일즈의 순수한 청혼을 피하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도 있겠다, 원수같은 아버지이기도 하겠다, 클로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확실히..'

하일즈는 한시라도 빨리 클로에를 자신의 손아귀에 두고 싶은 마음에 미처 고려하지는 못했지만,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해보니 클로에의 사정과 성격이라면 충분히 조심스러워 할 법 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무책임이라는 것은 하일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클로에를 알고 지내온 하일즈는 클로에의 사정이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 사랑하는 연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신하는 부분을 찌르고 들어 클로에가 자신을 속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일즈가 아는 클로에라는 여자는 그렇게 요령 좋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아니라 생각한다면 냉정하게 거절을 하면 했지. 거짓말을 할 여자는 아니기에, 하일즈는 너무도 당연히 클로에가 청혼에 주저하는 '진짜 이유'가 따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하여간 고지식해가지고는... 여기선 억지로 물을 수 없겠지.'

"알았어."

클로에의 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 너그러운 표정으로 하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오늘 답을 듣는 건 힘들 것 같네. 마음의 준비가 되면 답을 해줘.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지내도록 하자. 나를 선택하는 것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고의 남자친구가 될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제 딴에는 멋진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한껏 폼을 잡았지만, 클로에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응."

"그럼 화해도 했겠다. 오늘... 어때?"

하일즈는 부드럽게 운을 띄우며 분위기를 잡았지만, 클로에는 덤덤한 어투로 거절의 뜻을 표했다.

"미안.. 고백이 너무 충격적이라 오늘은 역시 조금 기분이 그렇네."

지금까지 클로에가 하일즈와의 애무로 몸을 섞으며 기분이 흥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더더욱 빈말로도 하일즈와 애무하고 싶지 않았다.

클로에는 울상을 짓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어떻게 지었더라..'

기레스와 만나기 전에는 언제나 미동을 보이지 않았던 무표정을 지금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아.. 알았어. 그럼.."

혹여나 클로에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이미 하일즈의 마음 속 깊히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버렸다. 속으로는 못내 아쉬워 하면서도 클로에가 아니라고 한다면 하일즈는 묵묵히 따른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하아아아아아..."

집으로 돌아온 클로에는 침대 위에 엎드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주 짧은 시간에 클로에는 그 좋은 머리로 수십 수백 수천번을 고뇌하며 하일즈와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후회인가..'

멋드러지게 하일즈는 자신과의 결혼을 영원토록 후회하지 않는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말해 주었지만, 클로에는 도저히 하일즈와 결혼을 해서 후회를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기레스와 마음껏 몸을 부둥켜 뒹굴러 온 클로에의 몸은 이제 하일즈의 손이라면 조금만 스쳐도 소름끼치는 불쾌함이 몰려 올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클로에가 하일즈를 싫어하게 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일즈가 그녀에게 안겨주는 그 부정적인 감각은 기레스와의 애무를 맛있게 만들기 위한 양념으로 사용되기에 그녀는 그 근본부터 망가져 버린 사랑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이후로는 '기레스와의 연습'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클로에는 하일즈가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기레스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뭇 남성들이라면 누구라도 발정해 사귀고 싶어서 줄줄이 고백하는 클로에지만, 하일즈와 결혼을 하게 되면 기레스는 분명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을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싫어...'

잠시 생각했을 뿐인데도 클로에의 몸은 하일즈에게 닿는 것 이상으로 불쾌함을 끌어 올려 그 사실을 부정하려 들었다. 육체 뿐만 아니라, 이제는 클로에의 정신도 그것을 부인하려 들지 않는다.

"흐읏.."

온 몸에 벌레가 드글거리는 듯한 불쾌함에 클로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음부를 향해 가져갔다.

"기레스..."

기레스를 떠올리면서 비부를 살살 굴리자 그녀의 육체를 엄습하던 차갑고 쓰디 쓴 불쾌함 대신 따스하고 달콤한 쾌감이 넘실거리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응... 하앗.."

자위를 그만 두면 금방이라도 하일즈의 청혼이 떠올라 클로에의 손가락은 부지런히 음부를 문질러 나갔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 건데 말야. 부부 사이에는 육체적인 궁합도 중요하다 하더라.]

언제 들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을 기레스의 말이 불현듯 클로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궁합..'

일전에도 분명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클로에는 그야말로 뼛속 깊히 사무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하일즈가 싫은 건 아니다. 반쯤 거짓말을 보태면 사랑한다고 우길 수 있을 정도로 정을 느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단순한 육체의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하일즈와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일즈와 헤어지면 해결이 되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때에도 기레스와 연습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일즈의 마음에 못질을 해버리는 것은 덤이다.

실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하일즈와 사귀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기레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민이 들지 않았을 것임에도, 클로에는 본능적으로 하일즈와 애시당초에 사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 아니 그러면 기레스를 만나지 못했을까.. 어머니의 병도 치료하지 못했을 거고..'

지금 그녀가 고민하게 된 모든 원흉은 기레스임에도 그녀는 그 생각만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기레스를 만난 일은 일생을 통틀어 최고의 축복이었기 때문이었다.

'으... 이럴 때 기레스라면..'

평소 같았으면 기레스에게 상담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조차도 없었다. 하일즈가 청혼을 해온 사실을 밝히면 기레스와의 관계는 거기서 끝인 것이다.

"으으응... 앗."

클로에는 하일즈와의 청혼을 듣고 기뻐하는 기레스의 뻔한 모습을 상상하자, 괜시리 부아가 치밀어 좀 더 거칠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애액은 마를 줄 모르고 줄줄 추잡하게 클로에의 손가락에 칠해져 나간다.

'어쩌지..'

하일즈의 고백을 받을 수도 없고, 받지 않을 수도 없으며, 기레스를 의지해 상담조차도 할 수 없다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그녀의 심란한 마음이 의지할 곳은 자위행위 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얼마나 문질거렸을까. 클로에는 마치 소변이라도 지린 것처럼 이불이 축축히 젖을 정도로 밤을 새어 자위를 하고 있었다. 살짝 젖은 땀에 반짝이는 몸의 광택과 녹아내릴 듯한 애틋한 표정, 애액으로 흠뻑 젖은 손가락으로 몸을 배배 꼬며 자위를 즐기는 그 추잡한 모습은 영락없는 자위 중독자 그 자체였지만, 어떤 남자라도 발기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요염하면서도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었다.

'부족해....'

그녀는 기레스의 근처에서 몰래 자위를 하기만 해도 이거보다는 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전의 클로에라면 절대로 떠오르지 못했을 그런 변태적인 플레이조차도 지금의 클로에에게는 그저 한 끼의 쾌락에 불과했다.

'아.. 안돼.'

살짝 손가락을 놀리는 것을 실수한 클로에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오르가즘을 느껴 버렸다. 애액에 질척거려 반들반들한 손가락을 본 클로에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허무하기 짝이 없는 오르가즘이라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살짝 마음이 안정된 클로에는 일단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은 최대한 답을 미루는 수밖에..'

미봉책이기는 하지만 하일즈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행복에 겨운 나날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자위하면서 클로에는 뒤숭숭한 마음을 정리에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여느 때나 다름 없이 클로에는 구교사로 향해 기레스와 만났다. 수업 내내 뒤숭숭한 마음 뿐이었지만, 지금까지 숱한 문제를 해결해 준 기레스의 얼굴을 본 까닭일까, 그녀의 심란했던 마음은 거짓말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안녕! 기레스."

심란했던 마음이 멎어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답지않게 오랜만에 미소까지 띄워가며 기레스에게 인사했다.

"어! 클로에 축하해."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인사에 화답하는 기레스의 말을 들은 클로에의 가슴은 불안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겠지...'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하일즈의 청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거라 생각하며 클로에는 초조한 마음을 부여잡고 되물었다.

"뭐.. 뭐가?"

"하일즈가 어제 청혼했다면서!"

그런 클로에의 기대는 기레스의 해맑은 한마디에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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