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99화 (99/238)

〈 99화 〉 클로에(54)

* * *

"어라?'"

클로에는 자신의 책상 안에 편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지 근 한달째, 클로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고백의 편지를 받아왔다.

'이전까지는 이런 편지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편지를 손에 들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누구든, 고백을 받아 들일 생각이 전혀 없는 클로에에게 고백은 귀찮은 감정소모에 지나지 않았다.

"하아..."

"무슨 일이냐? 클로에 그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다쉬고.."

무엇을 숨기랴. 클로에는 기다렸다는 듯, 기레스에게 최근들어 많은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어째설까? 지금까지는 이렇게 고백을 해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러게. 너와 하일즈가 사귀고 있다는 걸 모르는 학생은 없을텐데 말야."

클로에의 말에 동조하기는 했지만, 사실 기레스는 그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기레스를 만나기 전의 클로에가 고고하며 아름답다고 인정하지 않는 학생은 단 한사람도 없었을 테지만, 마을 안에서도 손을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해도 수많은 미인들로 즐비한 이세계에서 클로에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정말 아름답다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만, 조금만 눈을 낮추거나 취향이 다르면 매력적인 여자들은 넘쳐나는 게 이세계다.

그렇기에 당연히 교내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하일즈를 거스르면서까지 클로에를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는 이는 매우 드물었다.

냉정하면서도 고고한 클로에의 이미지 때문에 애시당초 고백을 시도해 볼 엄두도 나지 않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클로에는 달라졌다.

항상 무표정에 얼음장 같았던 표정은 어딘지 푸근해져서 남심을 후렸고, 이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진 것은 물론이요, 기레스에게 한껏 유린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의 동작에는 클로에 자신과 클로에를 보는 남성들도 깨닫지 못하는 마성의 매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실로 학교 안의 대다수의 남성들이 앞 뒤 가리지 않고 클로에를 '가지고 싶다'고 미칠듯이 바랄 정도로 클로에의 성적 매력은 물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기레스에게 조교되어 활짝 개화된 클로에의 매력은 이미 하일즈라는 연인의 방패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주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이해타산을 따지기 마련이다.

아름답다고 해도 하일즈를 거역하면서까지 연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이전과 달리 지금, 클로에의 아름다움 앞에서 학생들에게 하일즈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사 하일즈에게 반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클로에를 손에 넣기 위한 시도를 한번쯤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클로에의 물오른 매력은 독보적이었던 것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는 있었어?"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야?"

클로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연상될 정도로 날카롭게 톡 쏘아붙혔다.

"기레스 넌 하일즈와 나를 이어주고 싶은 것 아니었어?"

"그야 그렇지."

"그런데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었냐는 질문은 왜 하는 거야."

클로에는 자신을 뭘로 보냐는 듯,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하일즈와 이어주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를 돕는 노력일 뿐이고, 네 마음까지 내가 강제할 수는 없으니까 말야."

"그럼.. 내가 하일즈 말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클로에는 예쁜 눈으로 슬그머니 기레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어떻게 하긴 어쩔 수 없는거지. 딱히 하일즈가 아닌 다른 남자를 돕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지금처럼 널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하게 되려나? 아니 설마 정말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었던 거야?"

기레스는 당혹감을 숨기지 않고 클로에에게 물었다.

"그럴 리 없잖아. 가정이야 가정. 네가 쓸데없이 다른 남자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거잖아."

클로에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런가.. 다행이네."

안도하는 기레스의 말이 하일즈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클로에의 심장은 주책없이 콩콩 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네가 하일즈와 이어지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나한테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거지. 음음."

바로 몇초 전까지만해도 두근거렸던 클로에의 심장은 기레스의 천진난만한 발언에 살짝 시큰거리는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행복인가..'

클로에는 기레스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래 하일즈도 나도 그리고 기레스도... 행복하니까.. 이대로만 지낼 수 있다면..'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클로에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

"요즘 구교사에 별 움직임이 없길래 펄 선생님에게 물어 봤는데, 구교사 개발이 취소되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시 구교사를 이용해도 된다고 하시더라고."

"어? 아아.. 그렇구나."

들뜬 기레스와 달리, 클로에는 하일즈와의 비밀기지에서 즐기는 빈도가 줄 것이라 생각해 살짝 기분이 쳐졌다. 하일즈와 만날 때, 기레스의 흔적을 반찬삼아 은밀히 자위를 하는 게 낙이 되어 버린 클로에에게 구교사의 소식은 그다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고백 건 말인데, 아무래도 하일즈에게는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음? 어째서?"

"그런 소문은 아무래도 하일즈에게 숨기기 어려울 것 아냐? 나중에 하일즈가 개별적으로 알았을 때랑, 네가 직접 사실을 말해줄 때랑은 느낌이 다를테니까.."

"음.. 확실히 그럴지도."

클로에는 기레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긁어 부스럼이 될수도 있지만, 하일즈의 성향을 생각하면 괜히 냅둬서 썩어서 곪아버리기 전에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차피 고백을 받고 거절한다는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수십 번의 고백을 받았다고 듣는 것과, 고백을 받고 거절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는 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르듯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일즈가 그런 걸 듣고 가만히 있을까?"

"그 고삐는 네가 잡아 줘야지."

"후우.. 알았어."

기레스의 말에 따르는 것은 이제 클로에에겐 숨을 쉬는 것 만큼이나 편안하고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클로에는 기레스의 말에 따라 하일즈를 만나 최근 고백 받았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개새끼들을.."

아니나 다를까. 하일즈는 곱상한 얼굴을 흉악하다 생각할 정도로 일그러트리면서 분개하기 시작했다. 하일즈의 반응은 당연하다. 결혼한 것은 아니라곤 하지만 클로에와 자신은 누구나가 아는 연인 사이고, 고백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랑하는 사이를 부수고 빼앗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죽여버리겠어."

"진정해. 하일즈."

"진정은 무슨! 남의 여자를 탐하는 개자식들을 상대로 진정하라는 거야?"

"내가 너와 헤어지면서 다른 남자와 사귈 리가 없잖아?"

'기레스와 계속 연습을 하기 위해서라도' 클로에는 상대가 누가 되었든, 티끌만큼도 다른 남자와 사귈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으 으음."

클로에의 매력에 빠져 하일즈를 거역할 각오를 다지고 고백한 다른 학생들 못지 않게, 하일즈 본인도 클로에에게 매료되어 헤롱거리고 있었는지라 클로에의 애정이 느껴지는 말에 하일즈의 마음은 푹 삶은 고기처럼 부드러워졌다.

"고백은 전부 거절했고, 앞으로도 거절할 거니까.. 걱정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어. 이런 일로 일일히 들고 일어서면 너나 유페르 가문의 평판도 안 좋아질거고.."

오랜 시간 하일즈를 알고 지낸 클로에는 하일즈가 주변의 평판을 많이 의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클로에의 그런 자잘한 배려를 느낄때마다 하일즈의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차올랐다.

'하긴.. 클로에가 나를 마다하고, 다른 녀석들의 고백을 받을 리 없지.'

이미 클로에가 자신에게 흠뻑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하일즈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일면 오만해 보였지만, 기레스만 없었다면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얼굴도, 능력도, 권력도, 이 마을에서 하일즈 이상가는 남자는 없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하일즈가 뛰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완벽을 그리며 살아왔기에,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하일즈는 알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고백을 받지 않았던 것도 아니긴 하고..'

매사 냉정하고 무뚝뚝한 클로에와 달리, 하일즈는 젤가처럼 주변의 시선을 즐기는 부류의 인간이다. 자연히 남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일즈도 지금껏 클로에는 모르는 수많은 고백을 받아 왔었다.

물론 자신의 옆에 설 자격이 있는 여자는 클로에 뿐이라는 생각을 가진 하일즈는 그 고백들을 전부 거절해 왔지만, 그 경험이 있기에 아름다운 꽃에 벌레가 꼬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하일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클로에가 소란을 일으키길 원하지 않는다면 하일즈는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밖에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유아독존이지만, 공처가인 젤가 못지 않게 하일즈도 사랑하는 클로에의 바램에는 한없이 약해지는 남자에 불과했다.

"후우 클로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대신 고백을 받으면 내게 꼭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이야기 해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기레스와의 만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클로에는 하일즈의 불안을 꼭 덜어주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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