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90화 (90/238)

〈 90화 〉 클로에(45)

* * *

만날 약속을 잡지도 않았지만, 클로에는 습관처럼 발을 부지런히 놀려 구교사로 향했다. 그곳에는 당연한 듯이 자리에 앉아 있는 기레스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다.

"응? 클로에잖아. 시험도 끝났는데 여긴 무슨 일이냐?"

기레스는 허겁지겁 보고 있던 무언가를 가방 안으로 집어 넣으면서 말했다.

'응? 뭘 보고 있었던 거지? 성적표를 보고 있었나? 그런 걸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클로에는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면서 기레스에게 되물었다.

"너야말로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슬슬 나도 장래를 준비해야 될 나이니까 집에 돌아가기 전에 조금 혼자서 생각을 할까 해서 잠시 와본거야."

'기레스의 장래라.'

클로에는 순수하게 기레스가 이후 무엇을 해나갈지 궁금해 졌다. 본인에게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클로에 덕에 성적이 오른 지금도 기레스는 너무나도 열등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뭘 하고 싶은데?"

"글세.. 안마사나 되어볼까?"

기레스의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 열게 되면... 내가 제일 단골이 되지 않을까..'

"라는 건 농담이고.."

"뭐? 농담이라고?"

"정 안되면 그런 쪽도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지금 목표는 조금 달라서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클로에 이왕 여기 온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예전에 너 황립 리움 사관학교를 노린다고 했었지?"

클로에는 기레스가 용케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응. 하일즈도 그렇고.."

"그 사관학교라는 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거야?"

"음.. 들어도 기레스의 실력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텐데.. 아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뭔가 다른 방법도 있는 건가?'

클로에의 말은 무언가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들려 기레스에게 기대를 심어 주었다.

"리움 사관학교는 5년에 한번씩 제국 전역을 돌면서 시험을 통해 걸맞는 사람을 뽑는 걸로 알고 있어."

"윽... 시험이라고..?"

클로에를 함락시키기 위해 고작해야 1년을 노력했을 뿐인데도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쳤던 기레스는 시험이라는 말에 머리를 부여잡고 탄식했다.

"5년에 한번이라면 기회도 얼마 없네.."

"그렇지. 뭐니뭐니 해도, 제국에서도 제일가는 명문이니까.."

힘이 곧 정의인 이세계에서 군인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특히나 사방팔방에 적국을 두고 있는 대제국 세프람의 경우는 더더욱 고위층 군인의 권력은 막강해서 자연히 리움 사관학교는 제국에 있는 많은 학교들 중에서도 정점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움 사관학교에 관심이 있는거야?"

클로에는 기레스가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학교를 노린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설렜다.

'기레스도 갈 수 있다면 좋기는 할텐데.. 그... 가끔 안마도 그리워 질 것 같고..'

벌써 며칠동안이나 기레스의 애무를 받은 적이 없었던 클로에의 몸은 잠깐의 상상으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뭐.. 그렇지. 우리 어머니도 그쪽 출신이어서 조금 관심이 있었거든. 그런데 5년에 한번이면 다음 시험은 언제야?"

"내년에 있어. 노리고 싶다면 부지런히 준비해야겠지."

'내년..'

"아니. 난 이미 성적은 다 망친 상태니까 무리잖아."

그나마 클로에의 도움 덕에 이번 한 해의 성적은 무난하게 끝이 났지만 지금껏 기레스가 받아온 성적은 리움 사관학교는커녕 다른 학교를 지원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말했잖아. 시험을 통해 뽑는다고, 여기서 받은 성적은 관계 없어. 나같이 1등만 해왔든, 너처럼 꼴찌만 해왔든, 시험만 잘 치르면 된다는 이야기지."

"아까 전에는 내 실력으로 들어갈 수 없다며..?"

"그건 무리지만, 사실 다른 방법이 한가지 더 있기는 하거든."

기레스는 눈을 번뜩이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

"각 마을 별로 시험을 치를 때, 최고점을 받은 사람은 한명 원하는 사람을 조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는데.."

클로에는 기레스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그거라면 기레스 너도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근데 왜 눈치를 보는 거야?"

"말은 조수지만.. 사실 하인이나 다름 없는 신분으로 가는 거라서.. 알아본 바로는 학생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현지에서도 상당히 무시를 받는다는 모양이라.."

'형식적으로는 평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예 같은 느낌인가..?'

"별 것 아니잖아?"

이세계에 전생하고 거의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기레스가 그렇게 말하니 그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조금 뜬구름 잡는 소리 아니냐? 누가 나를 하인으로 데리고 가겠어?"

기레스는 클로에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알면서도, 일부러 궁시렁 거리며 투덜거렸다.

"기레스 네가 하인이라는 신분이라해도.. 가고 싶으면.."

클로에는 망설임 없이 기레스에게 말했다.

"내가 데려가 줄게."

"1등이 아니면 안된다면서..?"

"되면 되잖아?"

클로에는 너무나도 가벼운 말투로 기레스에게 말했다.

'쉽게 말하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레스는 클로에의 그 말이 오만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레스가 무시를 당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듯이, 클로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1등을 하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1등이야 그렇다 치고.. 제국에서 제일가는 학교라는데 시험을 합격한다는 보장은 있는거야? 그 조수라는 건, 혹시나 하일즈나 너 둘 중 하나가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놔야 하는 것 아냐?"

일면 기레스의 발언은 하일즈와 클로에를 배려하는 듯한 발언처럼 들려서 클로에는 엷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우리 마을은 상대평가와 절대평가를 동시에 하는 모양이야."

'무슨 뜻이지?'

벙찐 기레스의 표정을 읽은 클로에는 말을 이어 나갔다.

"보통은 합격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실력을 시험한다는 것이 리움 사관학교의 기본적인 제도인데, 우리 마을에서는 다소 수준이 미달이 되어도 그 해 성적의 1등부터 3등까지는 무조건적인 합격을 보장하고 있다고 들었어. 어째서 우리 마을은 그런 특혜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총명하다고는 하나,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클로에는 마을의 이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소피아 때문이겠지.'

반면, 나라에서 내려오는 온갖가지의 혜택에 이유가 있다면 소피아로부터 찾는 쪽이 빠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레스는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절대평가로도 나나 하일즈가 떨어질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련하시겠어.'

"이렇게 순위로도 합격할 수 있다면 반석이라 할 수 있겠지."

리움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 수준을 기레스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클로에가 마을 내에서 3위 안에도 들어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학급 내의 누구도 그런 생각을 가지는 이는 없을 것이다. 사실상 마을에서 베스트3을 꼽는다면 클로에나 하일즈의 합격은 기정사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하일즈가 1위를 하게 되면 어쩌려고.. 하일즈한테 나를 조수로 삼아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기레스의 앞에서는 오랜만에 보여주는 클로에의 냉정한 표정은 연인인 하일즈라고 해도 가차 없을 것만 같이 시퍼렇게 날이 서려 있었다.

"아 그렇지!"

클로에는 경쾌하게 손벽을 치며 말했다.

"노력하니 생각났는데.. 기레스 너도 노력해야 해."

"나? 나는 왜?"

"아무리 조수의 자격이라고 해도, 나름대로 자격은 필요하다고 들었거든. 낙제점은 면해야 한다던가.."

그렇게 말하는 클로에의 표정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낙제점... 솔직히 자신 없는데.."

"걱정 마. 내가 '같이' 노력해 줄테니까."

방학 때도 만날 수 있다는 손쉬운 명분을 얻은 탓인지 클로에는 만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면 성적표를 보도록 할까?"

"뭐가 그러면.. 이냐?"

이세계에 환생한 이후는 물론이고, 전생에서조차 겪어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에게 성적표를 검사받는 아들같은 심정으로 기레스는 투덜거리며 가방 안에서 성적표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기레스가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해도 검사받는 기분이라는 것은 썩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 준 클로에에게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 숨겼던 종이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클로에는 기레스의 성적을 순식간에 살펴 보았다.

"딱 기레스 네가 받을 법한 성적이네."

기레스는 클로에가 준비해 준 요점정리의 질을 생각하면 욕을 해도 할말이 없는 성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수긍하고 있었다.

'욕까지는 아니어도 저 말이 칭찬은 아니겠지.'

클로에의 저 말이 저번 시험에 비해 발전이 없는 자신을 은근히 비꼬는 것이라 생각한 기레스는 저자세로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음.. 미안해. 그렇게나 준비해 줬는데 이런 성적이라서."

"어째서 사과하는 거야. 나는 칭찬하고 있었던 건데.."

'칭찬이었냐..?'

"저번 시험에 비해서 성적이 그다지 늘지 않아서 비꼰다고 생각했는데.."

"만년 꼴찌만 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잖아. 기레스 네가 받을 법한 수준의 성적은 받아서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였어."

''네가 받을 법한 성적이네'가 그런 의미였던 거였나..'

기레스 덕분에 많이 유해지긴 했지만 클로에는 용케도 하일즈와 별 탈 없이 지냈구나 싶을 만큼 이따금씩 박정한 느낌의 말을 내뱉곤 했다.

"네 덕분이지. 내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네 도움이 없었다면 이런 성적을 받지는 못했을 거야."

"크흠. 성적을 잘 받아와서, 포상으로 연습이나 한번 시켜줄까 했더니만.."

클로에는 슬쩍 기레스를 흘끔 거리면서 자신의 본심을 툭치고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쪽이 목적이었구만.'

시험을 보기 전까지 며칠 간, 기레스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클로에와의 애무를 철저히 피해가며 공부에 집중해 왔다.

기레스를 보면 클로에의 몸에선 저절로 욕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랐지만, 나중에는 클로에도 클로에 나름대로 온몸에 드글거리는 욕정을 푸는 요령이 생겨서 기레스가 공부하는 틈을 타 기레스의 바로 지근거리에서 외줄이라도 타는 듯한 자위행위를 만끽하곤 했다.

소피아를 따로 시켜서 알아보지 않았다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클로에의 은밀한 장난질은 물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자위는 자위이고 애무는 애무로,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클로에의 몸은 기레스의 손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정말?"

기레스는 클로에의 부끄러움을 중화시키기 위해 되려 자신 쪽에서 과장해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왜 놀라는 거야.?"

"시험이 끝난 직후라 그다지 기대를 하지는 않았거든. 거기에 꽤 오랜만이기도 하고,, 나도 한번은 이제 연습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으니까.. 조금 감회가 새로워서 말이지."

애무의 연습행위에 대한 애착이 느껴지는 기레스의 그 발언에 클로에의 마음은 달달히 들떠 버렸다. 평소 애무에 대한 내색을 거의 하지 않는 기레스기에 그 반응은 클로에에게 더욱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그럼... 할래?"

대답따위는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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