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클로에(32)
* * *
그로부터 며칠 뒤, 랄크는 기레스가 부탁한 물건을 가져다 주었다. 한 권도 아니고 몇 권이나 준비해 온 책자를 기레스는 조심스레 집으로 가져와 펼쳐 보았다.
"끝내주는구만.."
랄크가 건네준 책자에는 남녀 간의 음탕한 성행위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듯한 실사 같은 그림이지만, 그 안에는 장인의 솜씨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림에는 특유의 색감에서 오는 음탕한 퇴폐미가 잘 살아 있었다.
이세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미남 미녀들 투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그대로 그리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그림이 되지만,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과 보정까지 더해진 이 작품들은 물건들을 다소 담백하게 생각하는 기레스조차 탐나서 버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질을 자랑했다.
소피아와 비교해도 확 꿀리지 않을 정도의 미녀가 조각 같은 남성과 다양한 체위로 살을 섞고 있는 그림은 자연스럽게 기레스를 발정하게 만들었다.
"역시 센스 있어.."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부터 기레스는 랄크가 수완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똑같은 부탁을 젤가에게 했다면 들어 줬을 리도 없거니와 설사 들어줬다고 해도, 어딘가에서 안보느니 못한 삼류의 작품들만 구해왔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기레스는 자신이 믿어 마지 않는 소피아라 해도 딱히 젤가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뒤가 구린 그림은 권력 하나 없이 깨끗한 삶만을 살아왔던 사람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연한 사고로, 수완 좋고, 적당히 어둠에도 발을 담가 연줄을 가지고 있는 랄크였기에 이런 명품을 구해올 수 있었다는 것을 기레스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린애의 헛소리로 치부해도 좋았을텐데도 제법이군.'
기레스에게 다소 실망을 했음에도 랄크는 한권도 아닌 여러권을 기레스에게 권해 환심을 사려 들었다. 매사 겉으로는 털털하니 허술한 것처럼 보여도 랄크는 생각이상으로 꼼꼼했다.
"조금 아쉽지만 그럼 정리해 볼까?"
기레스는 가위를 들고 다음 함정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음?'
어느 날, 클로에와 한탕 즐기고 돌아온 하일즈는 계단 근처에서 기레스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 뭔 짓거리를 하는 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있다면, 잘못을 찾아가면서라도 까고 싶은 게 인간이라는 생물이다. 사실 기레스가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하일즈는 기레스의 그 답답한 행동거지만으로도 괜시리 부아가 치밀었다.
"형 뭐하고 있어?"
"으앗! 하 하일즈?"
하일즈가 말을 걸자, 기레스는 한창 하일즈가 괴롭힐 때보다 더욱 놀라며 품에 들고 있었던 무언가를 떨어 트렸다. 팔랑거리면서 떨어지는 몇 장의 종이를 기레스는 재빨리 몸을 날려 감추었다.
"뭐하는 거야?"
"아 아니 별 거 아냐."
기레스는 어쩔 줄 몰라하며 흘린 무언가를 빠르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 모았다. 의심쩍은 기레스의 행동에 하일즈는 재빨리 시선으로 기레스가 흘린 종이를 눈으로 훑어 나갔다.
'종이..? 뭔가 그려져 있는 것 같은데..'
평소의 굼뜬 기레스 답지 않게 재빠르게 종이를 수습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하일즈는 그것이 무언가의 그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그럼 나는 들어가 볼테니까.. 하일즈도 쉬어."
기레스는 종이뭉치를 끌어 안고 허둥지둥 거리며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뭐야 저녀석.. 음?'
하일즈는 기레스가 사라진 자리에 종이가 두 장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병신 같은 새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할 거면서 숨기는 척은...'
그렇게 기레스를 매도하며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 이건..."
기레스가 그 많은 사진들 중에서도 엄선한 두 장의 그림에 방금까지 기레스를 답답해하며 속으로 욕했던 하일즈는 기레스와 똑같이 눈치를 보며 종이를 주섬주섬 챙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아.. 하.. 기레스 놈... 어디서 이런 물건을.."
하일즈는 기레스가 떨어뜨리고 간 춘화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 남녀 간에 부둥켜서 서로의 성기를 애무해 주는 광경은 클로에 못지 않게 순수했던 하일즈의 성에 대한 식견을 강제로 비틀어 넓혀 버렸다.
'이런 성교가 있다니... 아니 잠깐만..'
하일즈는 기레스가 품 안에 들고 있었던 그림들을 떠올렸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쌓여 있는 그림 뭉치는 한 두장 정도는 아니었다.
'조 좋아...'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하일즈는 은밀하게 기레스의 방을 들렀다. 소피아만큼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재능을 깔고 가는 하일즈는 거의 소리가 새지 않게 기레스의 방에 침입할 수 있었다.
"흠냐...."
기레스는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몸을 뒤척였다. 하일즈는 살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곱게 잠이나 잘 것이지..'
기레스의 행동이라면 하나하나가 전부 눈에 밟히는 하일즈였다. 하일즈는 눈을 어둠에 적응해 기레스의 방을 두리번 거렸다.
'역시 그런 그림들이니까.. 숨겨 놓았을 가능성이 높겠지?'
조심스럽게 그는 기레스의 침대의 밑을 뒤져 보았다. 침대의 안쪽에는 '보란 듯이' 한개의 상자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슬쩍 상자를 열어 본 하일즈는 손에 집히는 그림들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숨긴거라고.. 정말 병신은 곧 죽어도 어쩔 수 없구만..'
하일즈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상자 속의 사진들을 잔뜩 챙겨들고 침대 밑에서 나왔다.
"헤헤.."
기레스의 웃음소리에 흠칫 놀랐지만 곧 하일즈는 그 웃음소리가 기레스의 잠꼬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상 편히도 자는군. 뭐 오늘은 고맙다고 해둘까..'
그렇게 생각하며 하일즈는 조심스레 기레스의 방을 나섰다. 사람이 개미를 보고 경각심을 가지지 않듯이, 하일즈는 너무나도 한심하기 짝이 없어 자신에게 무해한 기레스를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는다.
"정말 단순한 놈이라니까.."
하일즈가 방문을 나가는 꼴을 보며 기레스는 비틀린 웃음으로 그를 배웅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식사에 기레스는 무언가 허둥지둥 거리는 행색을 보였다.
"기레스. 무슨 일 있니?"
그런 기레스를 본 소피아는 상냥한 어투로 기레스에게 물었다.
"아 아뇨.."
그에 기레스는 울상지은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는 척 하는 연기를 그만 두었다.
'벌써 사라진 것을 확인한 건가? 성욕에 미친 원숭이 같은 놈.'
하일즈는 기레스가 그림의 일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부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훔쳐간 그 그림은 그냥 일반적인 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기 하일즈."
식사 후 기레스는 하일즈를 불러 들였다.
"어? 왜 형?"
"혹시 어제 뭔가.. 본 적 없어?"
'설마 나한테 직접적으로 물으러 올 줄이야. 그정도로 그 그림이 소중했나?'
기레스가 괴로워 하는 것을 보자, 이전 그를 괴롭혔던 가학심이 일어난 하일즈는 살짝 즐거워 졌다.
"뭔가.. 라니?"
"아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며 되물어 오면 기레스로서는 할 말이 없다. 소피아의 활약 덕에 하일즈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일즈와 기레스의 입장이 뒤바뀐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레스와 하일즈의 현재 관계는 굳이 따지고 들자면 하일즈가 불쌍한 기레스를 배려해 괴롭히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고로 어디까지나 괴롭히지 않는 것이지 여전히 하일즈의 입장이 위인 것은 변함이 없어서 기레스는 강하게 따지고 들 수가 없다.
"뭔데 그래?"
거기에 하필이면 기레스가 몰래 들여온 물건이 음란한 그림이었는지라, 기레스가 소피아에게 고자질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하일즈는 기레스를 살살 약올리듯 되물었다. 기레스는 살짝 불만이 섞인 눈으로 하일즈를 노려 보았지만 하일즈와 시선이 맞자마자 그대로 눈을 내리 깔았다.
'병신새끼. 그래도 내가 범인이라는 심증 정도는 있는 모양이군. 나중에 제대로 숨겨둬야지.'
기레스는 자신이 겨우겨우 얻어온 음란한 그림들을 도둑맞아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힘없이 한번 저항해 보는, 하일즈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한심한 자신을 연기해 보여주었다.
조금의 의심 하나를 보여주는 행위만으로, 기레스는 하일즈가 자신을 의심할 법한 싹을 빠르게 잘라내 나간다. 보여줘야 할 일을 보여줌으로서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는 것은 '기레스'라는 생각을 하일즈에게 심어 나간다.
그렇게 하일즈는 자신이 유도되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울상짓고 있는 기레스를 속으로 비웃었다.
"뭔지 알려주면 같이 찾아 줄게."
살살 하일즈는 기레스를 위하는 척을 하며 약을 올린다.
"아 아냐. 됐어. 붙잡아서 미안해."
그에 기레스는 더 캐물을까 두려워하는 척을 하면서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그리고 며칠 후...
"클로에 부탁이 있어."
비밀기지에서 주변을 은은히 뎁혀주는 마법 앞에서 하일즈는 양손을 모아 클로에에게 사정했다.
"부탁이라니?"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이며 물었다.
"그... 오늘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애무를 해주지 않을래?"
"다른 방식..?"
'처음부터 강하게 나갈 수는 없겠지.'
기레스가 하일즈가 가져가도록 준비해 준 그림들은 전부 '삽입 없는' 행위들의 모음집이었다. 지금까지는 클로에의 손만으로도 황홀한 절정을 맛봐왔던 하일즈였지만 성기를 꽃아 넣지 않고도 그렇게 다양하고 적나라하며 음탕한 성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클로에의 손만 가지고 만족하기는 불가능했다.
"클로에도 이야기 했잖아. 섹스만 아니면 상관 없다고.. 그렇지?"
"뭐.. 그렇지."
"그러니까.. 오늘은 가슴으로... 애무해 주지 않을래?"
"뭐 뭐어어?"
클로에는 예상하지 못한 하일즈의 요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거라면 섹스는 아니니까.. 상관 없지 않겠어!?"
"그렇기는 하지만.."
그녀 스스로가 말했던 논리에 밀려서인지 살짝 약해진 클로에의 분위기를 본 하일즈는 잘만 하면 성공할 수도 있겠다 싶어 기대감에 목이 근질 거렸다.
하지만 단순하게 발정난 원숭이마냥 성행위에 기대만을 하고 있는 하일즈와는 달리 클로에는 자신의 애무에 하일즈의 시원찮았던 반응을 떠올리며 살짝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한번 새롭게 도전해 보는 걸로... 어때?"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당장은 너무 갑작스럽잖아. 오늘은 싫어."
"오늘은.. 이라면 다음에는 괜찮은 거지?"
씩씩 거리는 흥분의 숨을 감추지 못하고 하일즈는 급하게 되물어 왔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내가... 말해줄게."
'기레스와 한번 상의해 봐야지..'
살짝 스치듯 느낀 불안감에 그녀는 하일즈를 눈앞에 두고서도 곧장 기레스를 떠올렸다. 기레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살짝 불안으로 떨렸던 마음은 삽시간에 진정되어갔다.
'부끄러워 하기는.. 보아하니 많이 기다릴 필요는 없겠어.'
그런 전전긍긍하는 클로에를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하일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클로에의 본심을 제멋대로 착각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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