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클로에(29)
* * *
"후우..."
아무도 없는 구교사의 교실 안에서 클로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물어봐야 할까?'
바로 전 날. 하일즈의 안마를 받은 클로에의 어깨는 뻐근하기만 하다. 그녀는 고요하기만 한 구교실의 문 쪽을 보며 기레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의 문이 열렸다. 기레스는 먼저 와 앉아 있는 클로에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별일이네. 클로에 네가 먼저 교실에 와있다니 말야."
"가끔은 이럴 때도 있는거지."
"하긴.. 그나저나 요즘 이곳도 정말 쌀쌀해 졌지?"
기레스는 팔을 부벼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그렇네."
"그래서 이런 걸 준비해 봤지."
기레스는 클로에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들었다. 기레스의 손가락에 걸린 몇장의 마법이 담긴 종이를 보면서 클로에가 말했다.
"마법?"
"자 자.. 클로에 너도 몇 장 가져가."
기레스는 마법이 담긴 종이뭉치를 클로에에게 전해 주었다.
"무슨 마법이야? 이건. 테히드?"
클로에는 종이 끝에 적힌 주문명을 읽으며 기레스에게 물었다.
"한번 사용해 봐. 어차피 나는 사용하기 힘드니까 말이지."
선천적으로 마력의 절대량이 부족한 기레스는 대부분의 마법을 여유롭게 사용하기 힘들었다.
"테히드."
기레스의 말을 듣고 주문을 외자 곧 종이에서는 은은한 빛과 함께 포근한 열기가 새어나왔다. 그에 주변의 쌀쌀한 추위를 싹 날리는 기분 좋은 온기가 순식간에 교실을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기레스의 명령으로 소피아가 구해온 난방마법이다.
"알아보니까 난방 마법도 시중에 파는 게 있더라고, 이제는 날씨가 꽤나 쌀쌀맞아 졌으니까.. 슬슬 대비를 해둘까 싶어서 구해봤지. 본교사의 교실과는 다르게 이곳에는 지원 같은 건 없으니까."
"음 그러면 여기 두고 쓰면 되는 것 아냐? 이걸 왜 나한테 줘?"
"너도 가끔 하일즈를 만날 거 아냐? 어디서 만나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할 때가 있지 않겠나 싶어서.. 필요 없다 해도 그 마법은 옷 같은 곳에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면 너도 사용하고, 하일즈에게 선물로 전해 주기에도 좋다고 생각했거든..."
기레스는 능청스럽게 클로에와 하일즈를 배려하는 척 연기해 나갔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클로에는 기레스의 그 호의가 마냥 고맙기만 할 뿐이다.
"음... 고마워."
성기를 손으로 애무해 연습하는 추잡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를 했음에도, 클로에는 여전히 기레스가 자신과 하일즈의 사이를 순수하게 응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레스의 이런 진심에서 우러난 듯한 배려를 보면 기레스를 향한 믿음은 더 굳건해진다. 클로에는 마음을 다지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기레스."
"응?"
노트를 펼치려던 손을 멈추고 기레스는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어제 하일즈에게 손으로 해줬거든?"
"오오.. 드디어? 어떻게 됐어? 아....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걸 보니 역시 효과가 없었던 거냐?"
기레스는 지레짐작하면서 경망스레 아쉬워 했다.
"아냐. 네 덕분에 연습의 성과는 있었어. 다만.."
클로에는 하일즈의 안마를 떠올리며 살짝 망설였다. 하일즈의 안마가 기분이 나빠서 애무를 하기가 힘들다고 기레스에게 말하기 꺼려진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기레스에게 상담을 받을 때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해결하곤 했지만 이렇게 자신이 아닌, 남자친구인 하일즈의 치부를 자신의 입으로 드러내고자 한 적은 없었기에 그녀가 망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슨 일 있는거야?"
기레스는 클로에의 망설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살살 그녀를 어르는 듯 달래 물었다.
'기레스라면 답을 내어줄 수 있지 않을까?'
남들 앞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기레스라면 다르다.
하일즈를 위해서 였다고는 하나, 이미 스스로의 손으로 기레스의 성기를 애무하는 연습까지 해보았다는 사실은 클로에의 기레스에 대한 저항감을 더더욱 크게 허물어 버렸다.
"음.. 사실 하일즈의 안마 때문에... 말야."
"아! 하일즈 안마 잘하지?"
대뜸, 기레스는 클로에의 말을 막으며 잔뜩 신이 난 말투로 말했다.
"어?"
"집에서도 엄마가 항상 호평하셨거든. 역시 하일즈라고 해야되나.. 그 재능이 부러워 죽겠다니까.. 나도 그 재능의 백분의 1이라도 타고 났으면 좋았을 텐데..."
'으... 기레스는 하일즈의 안마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신이나서 하일즈의 재능을 칭송하면서도, 자신의 재능을 한탄하며 동정심을 유발하는 기레스를 보자 클로에는 이중적인 이유로 기레스에게 그녀가 느끼는 하일즈의 안마의 실상을 말하기 힘들어 졌다.
'아니 혹시 내가 이상한 걸까..?'
클로에는 하일즈바라기인 기레스 뿐만 아니라 소피아마저 하일즈의 안마를 호평했다는 말에, 넌지시 얼마 전 기레스가 꺼냈던 남녀 간의 '궁합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기서 자신의 몸을 더듬는 하일즈의 애무가 기분이 나쁘다고 이야기를 꺼내게 되면 어쩐지 하일즈와 자신은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시인하게 되는 것만 같아, 클로에는 목구멍까지 넘어왔던 말을 도로 되삼켰다.
"그래서 하일즈의 안마가 뭐?"
"아! 아아.. 내가 애무를 해주게 되면... 하일즈도 내 몸을 안마해 주게 되잖아...? 그러다 보니까 연습했던 애무에 집중하는 게 조금 힘들어 져서 말이지."
클로에는 이전과 달리 다소 능숙하게 사실을 적당히 둘러댔다. 실제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하일즈의 안마는 '기분이 좋지 않다'라는 불필요한 진실만을 숨겼을 뿐이다.
"하일즈의 안마는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야?"
"어? 어.. 뭐 그렇지."
여기까지 와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클로에는 떨떠름한 어투로 대답했다.
기레스는 그런 클로에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며 말을 건넸다.
"그럼.. 조금 부족하지만 내가 도와줄까?"
"어?"
"요약하자면 애무할 때, 신경이 쓰여서 연습한 대로 실력을 내기 힘들다는 이야기잖아?"
"뭐 그렇지."
기분이 나빠서 라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기레스의 말처럼 하일즈의 안마가 주저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이왕 이야기가 여기까지 온 이상 클로에는 하일즈의 안마에 적응해 나가는 방법이라도 기레스와 상담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하일즈 정도로 능숙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안마에 대한 재능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네가 괜찮다면 연습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일즈와 비교해 적당히 자신을 낮추어 가면서 기레스는 클로에에게 권유했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권유에 클로에는 살짝 당황하며 되물었다.
"여 연습이라니?"
"그 평소처럼 연습할 때, 내가 안마를 네게 안마를 해주게 되면 하일즈의 안마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 아니 그건 조금. 곤란해."
"어째서?"
클로에는 급히 고개를 숙여 청은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고운 머리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클로에?"
"하 하일즈는 내.. 가.. 가슴을 주무른단 말야!"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거냐..'
친구에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의 수위는 이미 옛적에 넘어 버렸음에도 클로에는 이 대화가 이상하다는 위화감보다 쑥스러움을 더 느끼고 있었다. 홍당무처럼 얼굴을 물들인 클로에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기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 그건 안마가 아니라 애무 아닌가..? 어쨋든 나는 평소에 하던 안마만 할 거야. 가슴이나 그런 야한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테니까... 당연하잖아?"
"아.. 그 그렇지."
'야한 행동은 없다는 거네..'
지금까지 기레스가 그녀와 한 약속을 어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클로에는 그 말의 진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클로에의 안에서 기레스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다.
'평소에 언제나 받아왔던 안마 정도라면.. 괜찮을지도..?'
이미 기레스와 몇번이고 겪어 꽤나 익숙해진 성기를 애무하는 연습에, 이전부터 종종 받아왔던 기레스의 안마만이 더해질 뿐이라고 생각하자, 어딘지 클로에의 마음은 편안해 졌다.
"그런데 그렇게 애무 도중 안마를 받는 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하일즈에 비해 기레스의 안마는 기분이 좋을텐데..'
클로에가 마지막으로 살짝 의아해 하자, 기레스는 쐐기를 박듯 그녀의 망설임을 지우기 위한 말을 지어나갔다.
"확실히 나는 재능이 없으니까.. 내 안마는 하일즈에 비하면 형편 없을테니까 비교해 보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지만, 다소 부족한 안마라도 적응할 수 있게 된다면 하일즈의 손에도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게 될거라 생각해. 내가 읽었던 안마 서적에는 기분 나쁜 느낌과 좋은 느낌은 종이 한장 차이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효과는 있을거야.."
어차피 기레스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을 그럴 듯하게 내뱉어도 클로에가 그 말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레스는 클로에의 형편에 맞게 아무 말이나 내뱉어 주었다.
"그런가?"
기레스의 말은 돌려서 생각하면,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안마로도 나쁜 안마의 느낌에 적응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기레스가 하는 말이니까.. 이번에도 틀리진 않겠지....'
지금까지 기레스의 상담을 들어오면서 클로에는 단 한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었다. 기레스는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미 그녀의 머리 깊숙한 곳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설사 틀렸다고 해도 기레스라면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레스를 향한 클로에의 굳건한 신뢰는 그녀의 상식을 조금씩 갉아내 무너뜨려 나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이상한 일이지만, 어느샌가 클로에는 기레스와의 이런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느슨해져 있었다. 거부감이 있다고 해도 특유의 부끄러움 뿐이고,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클로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상식보다 기레스에 대한 신뢰를 좀 더 우선시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조 좋아. 그럼 한번 시험이라도 해보도록 하자."
'아니라고 한다면 그때 거절해도 상관 없을테니까.. 이대로 하일즈와 할 때마다 안마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찝찝하고..'
아님 말고, 라는 보험을 일방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선택은 가볍기 마련이다. 그 가벼운 선택이 가져올 결말을 클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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