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클로에(26)
* * *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기레스는 태연한 태도로 말했다. 보통이라고 한다면 그대로 손찌검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발언이었음에도 기레스는 뻔뻔하기만 하다.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한 떳떳한 태도다.
기레스와 만나서 변하기 전의 클로에였다면, 그런 말에 일일히 반응은커녕 그 말을 입에 올린 즉시 기레스를 곧장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노 농담은 그만 둬. 지금이라면 농담으로 넘어가 줄테니까.."
아직도 클로에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시질 않았다. 기레스를 신뢰하고 있는 그녀는 그의 말을 반쯤 짓궂은 장난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클로에를 생각해 보면 괄목상대한 변화가 아니라 할 수 없었다.
"농담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겠냐?"
기레스는 클로에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 눈..'
클로에는 기레스의 그 눈을 알고 있다. 자신에게 돈을 태워서까지 강제로 전해줄 때 보여주었던 그 진심을 머금고 있는 시선이다.
"하일즈에게 하는 애무를 너를 이용해서 연습하라는 게?"
기레스의 이야기가 진심이라는 사실에 삽시간에 머리가 차가워진 클로에는 냉랭한 시선으로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몰라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시선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가운 눈빛에도 기레스는 전혀 물러섬 없이 떳떳히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일단 먼저 한가지는 말해둘게. 나한테 너에 대한 사심은 없어."
자신은 결백하다라고 주장하듯 기레스는 담담히 말했다.
"그런 추잡한 요구를 한 주제에 사심은 없다고?"
클로에의 말은 타당하다. 남자친구와 올바른 성관계를 가지기 위해, 친한 남성의 친구의 몸으로 연습하라니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발언이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내가 네게 비열한 흑심을 품었다고 한다면, 이미 옛적부터 행동으로 보였어야 정상이지 않을까?"
"읏...!"
클로에의 덜컥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기레스와 쌓아 올렸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누비고 지나갔다.
동생인 하일즈와 여자친구라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에게 선뜻 3500만 에보나라는 돈을 주면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친구가 되어 기레스를 돕도자 접근한 것도 '자신이다.'
안마의 연습을 요구한 것은 기레스지만 그 이야기를 물은 것도, 허락한 것도 틀림없는 '자신이다.'
그로부터 벌써 거진 1년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동안 기레스는 단 한번도 자신의 몸을 '탐하지 않았다.'
'확실히...'
어느 순간 편하게 그녀는 기레스를 편히 신뢰하게 되었지만, 기레스는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을 노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강매하듯 돈을 넘기기는 했지만, 그것을 빌미로 삼아 자신을 꾀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게 과하다면 건네준 돈을 미끼로 자신을 향해 알짱거리며 친밀한 관계가 되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도 상식 선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레스는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행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기레스가 마음껏 그렇게 생각하라고 '보여준' 모습을 알고 있는 그녀는 이제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자기 자신 더 나아가 하일즈를 위해 기레스는 자신과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아마 내가 접근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기레스와 이렇게 이야기 할 일은 없었겠지...'
기레스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접근했다는 사실은 클로에의 마음을 조여 나갔다. 기레스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피해다녔을 정도였음에도 지금의 자신은 기레스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할 일이 없었다면 이런 흑심을 운운할 일도 나오지 않았을 거고...'
기레스의 결백은 클로에 본인의 행동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안마를 시작하고 나서도 정말로 흑심을 품었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기레스의 말마따나 돈을 미끼로든, 실수를 가장해서든 음란한 행동은 진작에 나왔어야 정상이었다.
기레스와 비밀의 만남을 가지게 된 건, 1주, 2주 정도의 짧은 시간이 아니다. 벌써 반년도 훌쩍 넘은 긴 시간을 함께 지내온 것이다. 하지만 클로에는 지금까지 기레스가 흑심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만진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만약 내가 사심을 품고 있었다면 말야. 하일즈와 너를 이렇게 이어주려 노력 했겠어?"
"으.."
'내 몸을 가지고 연습해 보는 건 어때?' 라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별론으로 기레스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어 클로에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흑심을 품고 있어 손에 넣고 싶은 여자를 타인에게 이어주기 위해 저기까지 노력하는 인간이 세상에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거기에 더해 기레스의 조언은 항상 적절해서 하일즈와 클로에의 사이는 이전보다 더욱 돈독해진 사이가 되어 있었다.
정말 클로에를 손에 넣기 위한 사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간질을 한다거나 혹은 그게 아니어도 조언을 하지 않았어야 정상이었지만, 기레스는 언제나 클로에의 편이자, 하일즈의 편으로 항상 진심을 다해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기레스가 보여준 노력은 기레스가 클로에에게 흑심을 품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반증이라 할 수 있었다.
'진짜 흑심을 품었다면 하일즈에게 애무하라고 까지는 하지 않았겠지.'
만약 지금 하일즈가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기레스의 노력은 그야말로 죽 쒀서 개준 꼴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기레스가 하일즈를 위해 자신에게 조언 해주었던 말들은 철새처럼 다시 되돌아와 클로에의 의심을 거두어 나갔다.
같은 발언을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똑같은 옳은 소리를 해도, 평소 개차반 같은 행실을 보여온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한다면 그 말을 신용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똑같이 무례한 소리를 했다고 해도, 평소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 그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면, 한번이라도 더 그 말의 진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인간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는 것처럼 클로에의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 올려진 기레스의 신뢰는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말로도 부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성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척추를 접어버렸겠지만 상대가 기레스라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사심이 없다는 건.. 믿어 주겠어."
눈을 아래로 흘기며 클로에는 작게 시인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나도 너를 믿고 있어."
"뭐?"
갑작스런 기레스의 발언에 클로에는 살짝 놀랐다.
"설사 나같은 놈과 연습한다고 해도 하일즈를 향한 네 마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을 거라는 걸 말야. 어차피 연습을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기레스는 그렇게 세치 혀를 놀려 나간다.
"아니면 이런 일로 흔들릴 정도로 네 하일즈를 사랑하는 마음은 가벼운 거냐?"
"그럴 리 없잖아."
말도 안되는 궤변이지만 일부분만 따지고 들면 완전히 틀리지 않은 교묘한 말로 기레스는 클로에를 구슬렸다. 마치 이런 행위를 하더라도 클로에의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는 없다는 듯이 사고를 유도해 비틀어 나간다.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이딴 일로 하일즈와 네가 헤어지는 꼴을 보고 싶진 않거든. 3500만 에보나라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못하겠어."
직접적인 빚의 이야기가 나오자 클로에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그 돈을 네게 주었고, 지금도 그 돈을 되돌려 받을 생각 따위는 없어. 하지만 돈을 빌려주는 그 때나 지금이나 바라는 것은 있었지. 하일즈와 네가 잘 풀려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나는 선뜻 그 돈을 네게 줄 수 있었던 거야."
깊숙한 마음 안에 숨어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클로에의 빚에 대한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갚을 필요는 없지만, 그 돈을 받은 이상, 하일즈와 문제 없이 행복했으면 했다는 기레스의 말은 클로에의 죄책감을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하일즈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느냐. 없느냐. 단순하게 생각하면 돼."
하일즈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기레스를 애무하며 연습하는 것일 리가 없지만, 이미 기레스의 '의도는 순수할 것'이라고 세뇌된 클로에에게는 그런 의심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네 실력이 향상되서 기분이 좋아진다면 하일즈도 이전처럼.. 아니지. 그 이상으로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남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기분 좋아지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기레스의 조언을 받아 자신의 자존심까지 다 내려놓고 호들갑을 떨면서 좋아했던 하일즈의 모습과 무미건조한 반응만을 보이던 최근의 하일즈를 떠올리며 비교해 보았다.
서로 사랑만 하면 그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미 그 이상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 클로에는 하일즈의 시원찮은 반응에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너는 그렇지 않아?"
아무리 고지식한 클로에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아지고 싶지 않을 리 없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어도 애써 자신의 본심을 숨기며 없는 척을 해나갈 뿐이다.
"딱히 강요하는 건 아냐.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내가 네게 강요할 리 없잖아. 다만, 네 하일즈를 향한 마음이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거라면 아주 살짝 실망할 뿐이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숱한 노력과, 3500만 에보나라는 거금을 클로에에게 선뜻 건네준 기레스에겐 실망할 자격이 있었다.
'실망..'
기레스의 실망한다는 말을 들은 클로에의 가슴이 시큰 거린다. 마치 기레스의 순수한 선의를 자신의 손으로 배신하고 있는 듯,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것만 같은 죄책감이 전신에서 기어 올라온다. 그녀는 빚을 지고도 그것을 가족에게 전가하고 달아난 아버지와 자신을 투영시켰다.
꾸준히 하일즈와 클로에의 관계를 밀어주는 척을 하며 사랑의 전도사를 자처하던 기레스의 노력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확실히 기레스는 내게 사심은.. 없을 거야.'
사실 누구보다도 흑심으로 넘쳐 흐르는 기레스지만, 클로에의 안에 만들어진 기레스라는 존재는 순수하게 그녀와 하일즈의 사이를 응원하는 자신의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신뢰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나도 이런... 연습을 한다고 마음이 흔들릴 리는.. 없을 거야'
천천히 갉아져 유도된 사고는 행위의 잘못보다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해 나간다.
'하일즈도 기분이 좋아지면 좋을거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살짝 머뭇 거리며 그녀는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일즈에 관한 일로 기레스가 조언해 준 말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기레스를 믿으면 이 상황도 해결될 것이라고 클로에는 안일하면서도 맹목적으로 기레스를 믿어 나갔다.
"한번..."
"응?"
"연습해도 효과가 없으면 다음부터는 안 할거야."
"그 말은..?"
클로에는 입을 우물 거리면서 차마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레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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