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클로에(23)
* * *
"젠장 나는 무슨 짓을!?"
어지러움이 슬슬 멎어들어 현자타임이 몰려오자 하일즈는 바닥을 내리치며 분개했다. 클로에의 밀착에 이성이 완전히 날아갔던 하일즈는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고는 후회했다.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을 때는 몰랐지만 진정하고 생각해 보면 과한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시기상조였던 건가..'
그는 자신의 안마가 틀렸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실패라고는 겪어 보지 못한 찬란한 재능과,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인 소피아의 인정을 받은 기술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좋은 분위기였는데..'
클로에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만져주는 안마를 해온다는 것은 정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열심히 여기까지 왔는데 다 말아먹어 버리다니... 너무.. 성급했어!'
하일즈는 자신의 기술을 떠올리면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급하게 클로에를 애무하려 든 자신을 질책했다.
'조금 더 천천히 클로에가 스스로 원할 정도까지 달아오르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런 택도 없는 김칫국을 마시면서 하일즈는 이를 갈았다.
'클로에. 화가 많이 난 것 같던데..'
마치 원수를 보는 것처럼 혐오감이 묻어 나오는 클로에의 내리 깔린 목소리를 떠올리자 하일즈는 덜컥 겁이 났다. 벌써 몇년이라는 시간을 클로에와 어울린 하일즈지만 클로에가 저렇게 진심으로 화내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런 일로 헤어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평소라면 특유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럴 리 없다고 호방하게 생각하며 넘길 하일즈였지만, 어질거리는 시야 속에서도 가슴을 후벼 파는 냉랭한 클로에의 말은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 멤돌아서 하일즈의 마음은 심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일즈는 좀처럼 클로에에게 사과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최근 들어 클로에는 하일즈와 겹치는 과목이 거의 없어진 까닭에 클로에와 얼굴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몇몇 같은 과목을 들을 때 사과를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하일즈는 타인의 시선에 매우 민감했다. 클로에와 단 둘이 있는 자리라면 모를까, 자신의 권위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하일즈가 남들이 다 보는 학교에서 클로에와 트러블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고개를 굽히고 들어갈 리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하일즈는 방과 후에 클로에와 따로 만나려 했지만, 언제나 수업이 끝나면 클로에는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정말 엄청나게 열받은 모양이군.'
그렇게 클로에가 작심하고 숨어 버리면 하일즈로서는 그녀를 찾을 방도가 없었다.
'화가 조금 누그러질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결국 그 날도 하일즈는 클로에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편, 하일즈를 피한 클로에는 구교사에서 기레스를 만나고 있었다.
"후우.."
평소처럼 기레스의 안마를 받으면서 클로에는 신음소리 대신,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집에서 소피아를 이용해 하일즈의 사정을 은근히 알아낸 기레스는 단도직입적으로 클로에에게 물었다.
"요즘 하일즈를 피하는 모양인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냐?"
기레스의 손이 멈추자 클로에는 눈을 아래로 흘기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하일즈와 싸웠어."
"뭐? 무슨 일로.."
"그게...."
이미 기레스를 철썩 같이 믿고 있는 클로에는 하일즈와 있었던 일을 기레스에게 선뜻 이야기 해주었다.
"거기서 내 가슴을 만졌다는 거야."
전에 없이 클로에는 격앙된 감정을 내보이며 기레스에게 투덜거렸다.
기레스는 자신이 그렸던 대로의 전개에 속으로 흡족해 하면서도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으음.. 그래?"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클로에의 고지식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을 듣고 기레스는 불쑥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잠깐 잠깐. 클로에. 결혼을 해야만, 몸을 허락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클로에는 '당연한 거 아냐?' 라는 듯한 눈초리로 기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솔직히 하일즈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데.."
"뭐!?"
"요즘 어린아이들이 너보다는 세상 물정을 잘 알겠다. 우리 나이 정도가 되면 말야. 사귀는 사이에 서로 살을 섞는 것 정도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나이라고. 네 친구들 중에는 그런 애가 없는거냐?"
없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레스는 넌지시 클로에 스스로 자각하도록 말을 건넨다.
친구가 없는 기레스와는 달리 클로에는 너무 많아 문제일 정도로 사방에 알고 지내는 친구들로 가득했다. 그렇기에 클로에는 친구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주워 듣곤 했다.
클로에 못지 않게 순박한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대놓고 발랑 까진 아이들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고지식한 클로에라도 이미 성에 문란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는 것과 그것을 본인이 납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일 뿐.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사귀는 사이에 섹스 정도는 괜찮지 않아?"
마치 하일즈와 클로에를 진심으로 이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레스는 하일즈의 사랑의 전도사 역할을 자청해 나간다.
"세...? 남사스러운 소리 하지 마!"
기레스의 뒤없는 직설적인 물음에 클로에는 허둥거리면서도 마음을 다잡고는 말했다.
"나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
'그렇겠지.'
가족에게 빚을 떠넘기고 야반도주한 아버지의 무책임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클로에는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짐이 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피임에 100%라는 것이 없다면, 책임을 질 수 있는 관계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섹스하지 않는 것이 클로에라는 여성이다.
"그럼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이라면 어때?"
"책임을 질 수 있는 일?"
"사실 말야. 나도 남자라서 하일즈의 심정은 이해가 되거든. 자신이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를 안고 싶다는 건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정상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면 하일즈가 너를 덮치려고 한 건 그만큼 너를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레스의 말을 듣고 보면 일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안고 싶어질리도 없을테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결혼도 하기 전에 그... 걸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 점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기레스의 동조에 클로에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기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삽입의 이야기지."
"뭐?"
"네가 두려워 하는 건 무책임한 행위인 거잖아? 단순히 성기를 집어 넣는 것만이 섹스는 아니라는 이야기야."
"무무무 무슨..."
기레스의 적나라한 말에 클로에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어찌할 줄 몰라했다.
"하일즈와 섹스를 하지 않아도 하일즈를 만족시키는 방법은 있어. 예를들면 손으로 해준다거나.."
"기레스.. 장난이 지나쳐.."
클로에의 표정은 한순간에 싸늘해져 갔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하일즈에게 냉랭한 말을 쏘아 붙히던 그 때의 모습이 될 것만 같은 모습에도 기레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장난으로 이런 소리를 할 것 같아!?"
기레스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진중한 얼굴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남은 이대로 가다가는 하일즈와 네가 진지하게 헤어질 것 같아서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고 있는데,.. 장난이라니? 이런 이야기는 진지하게 하면 안되는 거냐?"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되려 당당하게 받아치는 기레스의 태도에 클로에의 기색이 한 풀 꺾인다.
"거기다가 클로에 결과적으로 네가 내빼는 바람에 너와 하일즈의 사이가 미묘해진 건 사실이잖아.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고..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이런 건.."
다소 야한 발언을 내뱉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기레스의 말은 정론이었다. 물론 보통의 경우 그런 발언을 내뱉는 것 자체가 이미 NG 행위나 다름 없었지만, 기레스에 대한 신뢰도가 쌓일대로 쌓인 클로에에게 이정도의 발언은 허용 범주 안이었다.
"나는 여자를 몰라."
기레스는 한껏 분위기를 잡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클로에에게 지껄였다.
"그러니까 네가 하일즈에게 성욕을 느끼는지 어떤지 같은 건 알 수 없어. 하지만 남자니까 하일즈가 어떤 마음으로 네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있지. 장담하건대 너같은 여자친구를 두고 성욕을 느끼지 않는 남자는 없을거야."
"무.. 무슨..."
클로에는 기레스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 깔았다. 무표정을 자랑하던 얼굴에는 온갖가지 상념으로 가득했다.
"하일즈는 정말 열심히 참아 왔을거야. 남자로서 대변해 주자면, 그 정신력을 칭송해 주고 싶을 정도라고."
'그...런건가?'
남심에 대해 백치처럼 전혀 알지 못하는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기레스의 발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지금까지 기레스의 말을 듣고 후회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것이 아무리 허무맹랑한 억지같은 말이어도, 기레스의 말이라면 일면 일리가 있어 보였다.
이런 일로 기레스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다 실제 하일즈가 자신에게 보여준 행동거지들은 기레스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너도 하일즈와 이런 같잖은 이유로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적당히 타협해서 하일즈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떻게..?"
결국 클로에는 기레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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