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클로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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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여름 방학의 시기가 찾아왔다. 학기의 마지막 날에도 기레스와 클로에는 구교실에서 은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관계도 일단은 이걸로 끝이군."
클로에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기레스가 말했다.
"무슨 소릴 하고 있어? 일전에 말했을 텐데? 졸업할 때까지 널 가르쳐 주겠다고."
클로에는 기레스의 말을 듣자마자 받아쳤다.
"그건 고맙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단 방학 때는 만나지 못하니까 말이지."
클로에와 기레스가 만나는 것은 언제나 방과 후의 이 짧은 시간 뿐이다. 그 외에는 교실이든 밖에서든 기레스는 단순한 잡담 하나 클로에에게 건네지 않았다.
'인사 정도는 해도 될텐데.'
물론 클로에는 기레스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있다. 기레스는 자신에게 따로 피해가 가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기레스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뿐인데도, 전에는 한심하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배려는 클로에의 마음 안에 촉촉히 스며든다. 기레스가 자신을 위해 애써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면 클로에도 빚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레스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진다.
"어째서?"
"어째서는 방학 때는 딱히 배우는 게 없잖아. 배우고 말고 할 게 있나?"
기레스의 당연한 말에 클로에는 살짝 멈칫 거렸다.
"안마가... 있잖아?"
평소의 클로에였다면 절대로 먼저 새어나오지 않았어야 할 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클로에 자신도 자신이 그런 말을 꺼냈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응?"
"그 그.. 얼마 전에 하일즈에게 해줬을 때, 하일즈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네 연습 뿐 아니라, 나도 조금 관심이 생겼거든."
속에서 쑥스러워서 흔들리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다잡아 클로에는 냉정을 가장하며 기레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모든 전말을 알고 있는 기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어리숙한 부끄러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지라 그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되려 더 귀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말로는 '하일즈가 기뻐하게 만들고 싶어서'라는 명분을 내뱉지만, 기레스는 그녀도 모르는 진정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방학 때도, 조금 더.. 연습해 보지 않을래?"
"나야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기만 하지."
툭 하고 내던진 말처럼 보이지만 기레스의 표정은 하일즈를 연상시킬 정도로 기쁨이 흘러 넘쳐 보였다. 클로에 못지 않게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자신의 감정을 보이지 않기 일수인 기레스가 그런 얼굴을 하자 클로에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친구가 기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 하는 건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겠지? 기레스'도' 그러고 있으니까.'
자신이 들뜬 마음을 자각한 클로에는 눈앞의 잘못된 견본을 보고 수긍해 나갔다.
그런 그녀를 기레스는 사냥감을 눈앞에 둔 뱀의 눈으로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물처럼 흘러간다. 별다른 이변 없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슬슬 서늘한 가을이 올 무렵이 되자, 만삭이 된 소피아는 드디어 기레스의 아이를 낳았다.
"끝났습니다."
법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안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끝냈다는 듯 그대로 총총걸음으로 유페르 가문의 집을 뒤로했다.
'마법사 인건가? 이세계란 것은 정말 별 게 다 있구만.'
기레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젤가는 곰의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소 소피아!"
"어머니!'
하일즈와 티나도 젤가를 따라 소피아가 누워 있는 안방으로 달려갔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너무 호들갑이에요. 젤가. 아이들이 걱정하잖아요?"
방 안에는 온화한 웃음을 흘리며 아이를 감싸들고 있는 소피아의 모습이 보였다. 소피아의 얼굴은 누가봐도 이상적인 어머니로 보일 정도로 자애가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하 하지만, 그래도 1000명 중에 한명 꼴로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다고.."
'그런 건가?'
확률로 따지면 0.1%지만, 소피아라는 여성이 그 정도의 확률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젤가의 호들갑도 이해를 못할 것은 없다고 기레스는 생각했다.
"요즘은 마법이 발전해서 그런 일은 없어요. 봐요. 아이도 건강하잖아요?"
기레스는 소피아가 품고 있는 아이에게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아이는.."
"딸이에요."
"오오.."
자신의 친자식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젤가는 아들이면 아들이어서 좋고, 딸이면 딸이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입가에 화색을 숨기지 않고 좋아라 했다.
그런 젤가를 보면서 소피아와 기레스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귀엽다."
갓난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소피아의 아이는 확실히 귀여웠다. 젤가는 당연하고, 하일즈나 티나마저도 아빠와 엄마의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동생의 이름은 뭐에요?"
"응. 이 아빠가 몇달 간 고민을 해봤는데..."
"셀린이란다."
젤가가 거드름을 피우면서 티나에게 아이의 이름을 말하려는 찰나 소피아는 그의 말을 끊고 정해둔 아이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아니 소피아. 아이의 이름은..."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거에요?"
소피아가 실망한 듯 목소리를 내리깔자 젤가는 황급히 손서리를 치며 말했다.
"아냐. 아냐. 그럴리가 있겠어? 예쁜 이름이잖아. 셀린, 셀린.. 음 좋은 이름이야."
젤가는 이미 소피아에게 송곳니를 들어낼 힘 따위는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친자식의 이름을 짓고자 수없이 많은 밤을 뒤적인 젤가의 노력은 소피아의 한마디에 의해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제게도 동생이 생기는 거네요?"
"응. 오빠로서 동생을 잘 보살펴 주렴."
"맡겨만 주세요. 어머니."
소피아의 말에 하일즈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전적이 있어서 말이지. 엄마는 조금 불안하네. 기레스처럼 괴롭히지는 않을까 하고 말야."
"아 아니.. 그건 혼나기 전의 일이잖아요. 요즘 제가 형과 얼마나 친한데요."
하일즈는 기레스와 괜스리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해왔다.
"푸훗.."
기레스의 명령에 따라 하일즈를 요리하고 있는 소피아에게는 촌극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어머니?"
"기레스와 그렇게 사이좋아 지다니 너무 기뻐서 웃음이 새어나오고 말아 버렸네? 앞으로도 형제 자매 간에 우애있게 행동하렴."
"맡겨만 주세요!"
"저도 장남으로서 열심히 모범을 보일게요!"
하일즈의 말을 받아 기레스도 적당히 바보같은 흉내를 내면서 유페르 가문의 경사에 적당히 호응해 나가며 셀린의 탄생을 축하했다.
여름 방학을 포함해 수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기레스는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클로에를 요리해 나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다. 물안개에 옷이 천천히 습습해지는 것만 같이 클로에는 천천히 기레스에 의해 몸이 개발되어 나갔다.
여름 방학 전과 달라진 점은 거의 없다. 언제나 안마를 하는 것은 어깨와 팔, 그리고 다리 뿐이다. 하지만 그 숱한 시간 속에서도 기레스의 안마는 단 한번도 똑같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새롭게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 주어서 클로에는 지루할 틈도 없이 기레스의 손을 음미하며 배워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기술은 하일즈에게 전해지고, 하일즈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클로에에게 정성껏 안마를 해나가며 쳇바퀴가 도는 듯한 하루 하루가 지나간다.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클로에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한번 칭찬해서 인정을 해준 이상, 다음 번에 하일즈가 안마를 요구해 오면 클로에는 설사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그의 안마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을 하는 순간 처음 했던 말들이 거짓말이며, 사실은 기분이 나빴다고 인정을 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클로에는 하일즈에게 더욱 더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되었고, 그의 손길을 거절할 명분은 옛적에 사라져 버렸다.
정말 천천히 몸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기레스의 다채로운 안마를 맛볼 때마다 하일즈의 형편없는 안마는 점점 불쾌함에서 혐오감으로 바뀌어 나간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주 조금 기분이 나빠지는 안마에 불과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때마다 기레스의 안마가 클로에를 천천히 개발해 나간 것처럼, 클로에의 몸은 하일즈가 주는 불쾌함을 천천히 몸에 새겨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클로에가 하일즈가 싫어졌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 안마를 할때보다 겉으로 보이는 관계는 더욱 친해진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겉과 달리 그녀의 속은 아주 천천히 안쪽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져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 동생이 생겼다면서?"
"그래. 다음 번에 하일즈랑 같이 한번 보러 와. 엄마도 기뻐할 거야."
기레스는 천천히 그녀의 매끈한 다리를 쓸어 내려 나갔다. 주무르는 것 조차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쭉 긁고 지나가는 것 뿐인데도 클로에는 전신에 퍼져 나가는 간질거리는 쾌감에 몸을 움찔 거리며 신음했다.
"으흐읏."
클로에는 입을 살짝 가리며 교성소리에 가까운 신음성을 내었지만 기레스는 덤덤히 안마해 나갔다. 이미 여름 방학의 안마를 통해 간간히 내뱉는 신음 소리정도는 클로에와 기레스의 안마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게 되어 버렸다.
기레스는 클로에의 예쁜 발가락을 살짝 접으며 발목을 주물러 나갔다. 이미 단순한 친구 사이에 해주어야 할 안마가 아닌 것처럼 보임에도 클로에에게 그런 자각 따위는 전혀 없다.
'여기지.'
그보다도 클로에는 이 앞에 주어질 시원한 쾌감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수십번이나 기레스의 손맛을 본 클로에는 여기서 부터 시작될 안마의 결과를 알고 있다. 다리에 모인 불쾌함을 전부 건져 모아 최고조에서 터트리는 것 같은 쾌감이 곧 몰려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침 어제 하일즈의 안마로 조금 답답한 참이었는데..'
하일즈와 어울릴 때면 그녀의 몸에는 이물질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듯한 혐오감으로 불만스러운 상태가 된다. 하지만 클로에 스스로의 손으로는 기레스가 주는 이 안마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일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서 하지 말아달라도 부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언제나 그녀의 이 쌓인 몸의 불만을 풀 수 있는 것은 기레스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클로에는 기레스에게 배운다거나, 연습을 시켜준다거나 하는 명분보다도 은근히 기레스의 안마가 주는 쾌감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아니 엄밀히는 기대라기보다는 의존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클로에는 기레스의 안마에 흠뻑 빠져버렸다.
클로에는 눈을 감고 기레스의 손가락을 따라 맛있게 음미해 나갔다. 조금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 시원한 느낌이 온다고 생각한 순간 기레스의 손가락이 멈추어 버렸다.
'뭐지? 새로운 안마인가?'
한참동안 기레스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자 클로에는 살짝 실눈을 뜨고 기레스의 모습을 살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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