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클로에(19)
* * *
"어머니!"
젤가와 티나가 자리를 비운 어느 날의 휴일. 하일즈는 굳은 의지가 서린 눈으로 소피아를 불렀다.
"무슨 일이니? 하일즈."
"이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약속?"
짐짓 모른 척하면서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안마를 해드리겠다고 전에 약속 드렸잖아요?"
"아.."
하일즈의 그 말에 소피아는 실망의 기색을 숨기지 않고 탄식을 내뱉었다.
"너무 이른 것 아니니?"
"아뇨. 이번에는 확실할 겁니다."
하일즈는 기레스에게 고개를 숙여가면서 안마의 기본을 익혔다. 안마 따위야 그냥 하기만 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던 하일즈였지만, 기레스에게 정식으로 배우게 되자 그는 자신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기레스는 하일즈를 속일 생각으로 만만이었지만, 하일즈의 치명적인 실수 같은 부분은 어느 정도 교정해 주었다. 본래 쌩판 거짓말스러운 거짓말은 금방 들통나기 마련이지만, 그 안에 진실이 섞이게 되면, 거짓말도 진실로 둔갑해 버린다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기레스는 하일즈의 안마를 교정하는 척 살살 먹이를 줘서 길들이고 나서야 하일즈의 기술을 무디고 녹이 슬게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설마 저 병신이 이런 손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하일즈는 부엌에서 자신의 안마를 구경하는 기레스를 흘끗 거리면서 생각했다. 기레스에게 얼마 간 조언을 들은 뒤,인정하기는 싫지만하일즈는 기레스를 나름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일즈는 상대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발전해 나가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클로에와의 대련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소는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소피아에게 잃어버린 신뢰를 복구하기 위해 기레스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여 도움을 받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거기서 잘 보고 있으라고, 네가 유일하게 인정받는 것을 내가 차지하는 순간을 말야.'
하일즈는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기레스를 바라보았다.
하일즈에게 기레스라는 존재는 안마 외에는 아무 것도 잘하는 게 없는 바보이며,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머저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소피아에게 다시 안마를 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안마가 기레스의 손에 의해 근본적으로 망가졌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고, 기레스는 이용을 당하기만 하는 병신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은 하일즈의 안에서는 불변의 진리였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한번 해보렴."
소피아는 못 이긴 척, 하일즈의 요구를 받아 들이곤 숨기지 않고 비웃음을 흘렸다. 하일즈가 보기에는 단순하게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그 아름다운 소피아의 내면은 이미 기레스의 색으로 철저히 물들어 있었다.
"푸훗."
기레스를 이용해서 자신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하일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볼때마다 소피아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덧없는 노력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닿는 날은 평생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이 한때가 감미롭다.
"??"
소피아의 숨김없는 비웃음 소리에 하일즈는 살짝 놀랐지만, 소피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기대되네. 하일즈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말야."
"그럼 갑니다!"
그에 하일즈는 의욕을 불사르며 소피아에게 달려들었다.
"아흐응."
소피아의 입에서 달콤한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하지만 달콤한 소리와는 달리 하일즈가 볼 수 없는 소피아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다.
"기.. 기분 좋아요?"
안마로는 처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하일즈의 목소리에는 기대가 묻어 나온다.
"응.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실력이 좋아진 거야?"
"그야 뭐.. 전 재능이 넘치니까요. 열심히 연습했죠."
바로 눈앞에 자신을 가르쳐 준 기레스가 있는데도 기레스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 하일즈 다운 이기심을 보여준다. 하일즈는 기레스를 향해 보란듯이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상을 아는 소피아와 기레스는 배꼽을 잡고 웃어주고 싶을 정도의 광대짓이다.
"그렇구나. 역시 '젤가'의 아들이라니까.."
굳이 소피아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젤가를 강조해서 말했다.
"어머니의 아들이죠."
소피아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하일즈는 굳이 그 말을 스스로 정정하고 나섰다.
"아니 노력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야. 젤가는 지는 걸 정말 싫어해서 언제나 노력하곤 했거든."
'무의미 했지만 말이지.'
그 노력에 반했던 소피아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일즈는 때로는 천천히 그리고 때로는 과격하게 안마를 해나갔다. 기본적으로는 기레스가 행하는 안마와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이지만 그것을 받는 소피아의 느낌은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마치 건빵을 입안 가득 넣고 1분 안에 먹어야 하는 조건 속에서 쉬지 않고 계속 건빵이 입 안에 들이 부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등 뒤에서 하일즈가 의욕을 불사를 때마다 소피아의 표정은 혐오로 물들어 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피아의 입에서는 남심을 녹이는 간살맞은 목소리를 흘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우으.."
소피아의 그 날숨에 하일즈는 숨이 벅차 오른다. 언제나 안마에서는 퇴짜 맞기 일수였던 자신이 인정받고 또 인정받고 싶었던 어머니의 입에서 저런 소리를 나오게 만들었다는 성취감은 곧 자신감으로 바뀐다.
마치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의 안마는 뛰어나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으응.."
숨소리 하나만으로 소피아는 자신의 아들인 하일즈를 조교해 나갔다. 살살 달콤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목덜미를 움찔 거리는 모습은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것만 같아 절로 하일즈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기레스에 비하면 하일즈의 손길은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 버릴 정도로 기분이 나빴지만, 기분 나쁜 육체와는 달리 정신적으로는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자신의 아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대놓고 바보 취급을 한다는 배덕적인 상황은 소피아에겐 흥분을 위한 맛있는 반찬거리와 다를 바 없었다.
육체가 불쾌해도 정신만으로도 자기 만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소피아는 기레스에 심취해 버린 것이다.
"어머니 어떻습니까?"
하일즈는 겨우 모든 안마를 끝내고 조심스럽게 소피아에게 물었다.
"응. 아주 좋았어. 정말 열심히 노력 했네."
정말로 빈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소피아도 하일즈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었다.
소피아의 그 말 한마디는 하일즈의 자부심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 자신의 기술이 '뛰어나지 않을 리가 없다'고 확신을 가지게 만든다.
'해냈다.. 해냈어! 드디어 어머니에게 인정 받았어!'
주먹을 불끈 쥐고 하일즈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하일즈르 보면서 소피아는 순간 차가운 얼굴을 하고 생각했다.
'정말 역겨워서 혼났네. 나중에 기레스에게 덧칠해 달라고 해야지. 그래도 재밌긴 했어♪ 하일즈.'
화기애애해 보이는 안마 뒤풀이의 이면에는 그렇게 일그러진 동상이몽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기레스에 대한 호감이 올라갔다고 해서 하일즈에 대한 사랑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기레스와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클로에는 하일즈와의 시간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후우.. 졌어."
구석까지 몰린 하일즈는 양 손을 들어 항복의 의사를 전했다. 오랜만의 대련의 결과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클로에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하일즈의 기분은 어째선지 전혀 나빠보이지 않았다.
'안마를 기대하고 있어서일까?'
얼마 전 하일즈가 집에서 겪은 일을 알 턱이 없는 클로에는 싱글벙글한 하일즈의 표정을 멋대로 오해해 버린다.
'그럼 기대에 보답해줘야지.'
하일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좋다. 지금까지는 이런 하일즈를 몰랐을 뿐이었지만,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면 하일즈가 즐거워 할지를 아는 지금은 하일즈를 위해 움직이고 싶어진다.
"하일즈. 오늘도 안마를 해줄까?"
"오랜만이네? 최근에는 안해주더니.."
"사실 친구한테 새로운 안마법을 조금 익혀 왔거든."
"정말이야?"
하일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뻐했다.
'요즘따라 기쁜 일만 생기는데?'
그 한번의 안마 뒤, 클로에는 하일즈에게 종종 안마를 해주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하일즈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벌써 수년 간의 교제로 그는 클로에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있는 클로에는 그런 상냥한 헌신을 자주 보여주는 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하일즈는 어디까지나 그때의 일은 클로에의 단순한 변덕에 의한 선물이며 그 이상을 바라지 말자고 마음 먹고 있었다.
"왜 거기서 놀라는 거야?"
살짝 클로에는 뚱한 얼굴로 하일즈를 빤히 노려보았다.
'어어..'
클로에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는지라 하일즈는 순간 얼굴이 늘어져 버렸다.
'귀여워..!'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해 날카로운 클로에의 표정 때문일까, 그녀의 희소성 있는 표정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아 아니, 사실 저번의 그 안마는 그때만 해주는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거든."
'역시..'
클로에는 하일즈가 자신의 살가운 행동을 낯설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녀는 기레스의 말을 떠올렸다.
[하일즈의 앞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때는 기레스에게 아니라고 잡아 떼었지만, 현실에서 하일즈가 자신을 생각하는 인식이란 저런 것이다.
'으... 좀 더 노력해야지.'
"앞으로는 종종 해준다고 그때도 이야기 했잖아. 조금 자신이 없어서 친구와 더 연습을 하고 싶었던 것 뿐이야."
'좋은 친구네. 언제 한번 소개시켜 달라고 해볼까?'
툴툴거리는 클로에한테서 평소에는 보기 힘들었던 다채로운 분위기가 풍겨온다. 표정은 무표정해 보이지만, 여러가지 감정이 묻어 나오는 것 같은 클로에의 표정에 하일즈의 마음은 새콤달콤하게 저려왔다.
"그럼 여기 발을 펴고 누워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