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59화 (59/238)

〈 59화 〉 클로에(15)

* * *

"으흐읏.."

"이 이상한 소리 내지 마. 하일즈."

"하지만.. 기분이 너무 좋아서.."

제 아비를 따라 평소에 근엄하면서도 의젓한 모습을 연기하던 하일즈는 그곳에 없었다. 하일즈는 자신의 몸을 클로에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맡겨 헤벌쭉한 얼굴로 그녀의 솜씨를 맛보고 있었다.

언덕에 앉아 클로에에게 안마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로망 그 자체였다. 그 상황 자체만으로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인데, 기레스의 안마 기술까지 전수받은 클로에의 솜씨는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나 다름 없었다.

"자 이걸로 끝."

"으.. 벌써?"

하일즈는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클로에가 들으라는 듯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더 안마를 받고 싶어?"

클로에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일즈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하일즈는 클로에에게 약했지만, 속으로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만큼 하일즈가 클로에한테 이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며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은 흔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든 건가?'

하일즈가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에 클로에의 마음도 살짝 기쁨에 달아올랐다. 클로에는 지금까지 하일즈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아 왔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서툰 클로에는 지금까지 하일즈에게 선물다운 선물을 해준 적이 없었다.

고지식한 클로에는 선물 따위 해주지 않아도 서로가 사랑하고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리 기뻐하는 하일즈의 모습을 보자,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면 앞으로 종종.. 안마해 줄게."

클로에는 수줍어 하면서 자신의 말에 따르면 남사스러운 말을 조심스럽게 하일즈에게 건넸다. 석양의 붉은 빛이 그녀의 얼굴을 칠한다.

하일즈는 석양의 빛인지 클로에의 홍조인지 모를 그 수줍은 아름다움에 살짝 얼이 빠져 버렸다. 웃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감정의 기복을 거의 보이지 않는 클로에이기에 그런 수줍어 하는 모습은 굉장히 희소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클로에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그런 감상을 하면서 새삼스럽지만 하일즈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반해 버렸다.

클로에와의 대련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하일즈는 몸을 씻고 나오면서 클로에를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대련을 한다고 싸울 때를 제외하면 그렇게 클로에의 몸에 밀착을 했던 경험은 거의 없었다.

'향기로웠지...'

풀린 눈으로 그는 클로에와의 꿈만 같았던 안마를 상상했다.

자신의 어깨와 팔을 주무르던 그 가녀린 팔과, 호흡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땀에 살짝 젖은 클로에가 풍기는 단내, 거기에 마지막에 보여준 새콤달콤한 그녀의 수줍은 표정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면 할수록 마치 한여름의 망상같은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또 보고 싶다.'

하지만 하일즈는 단순히 자신이 잘 대해주는 것만으로는 클로에의 그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레스도 참.."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부엌에서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백옥의 피부에 살짝 홍조를 띤 소피아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기레스의 안마를 받고 있었다.

'저녀석이..'

따돌림 사건 이후, 종종 기레스는 집에서 보란 듯이 소피아와 안마를 하면서 시시덕 거리곤 했기에, 안마를 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유페르 가문의 집에서 기레스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젤가는 이미 소피아의 조교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나, 기레스의 추종자라도 된 것처럼 기레스를 대우해 줬고, 기레스에게 잘못을 저지른 하일즈와 티나는 암묵적으로 기레스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기레스와 소피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하일즈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조금이나마 안마를 방해하려고 싶었던 하일즈는 소피아의 눈을 감고 기레스의 안마를 음미하는 모습을 보고 살짝 머뭇거렸다.

'음...?'

"아...♥ 거기야 기레스."

애간장을 녹일 것만 같은 간드러진 소피아의 목소리가 하일즈에게 들려온다. 기레스는 단순히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것 뿐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하일즈의 육봉은 소피아의 요염한 목소리 하나만으로 어느샌가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나 나는 무슨..'

화들짝 놀라면서도 하일즈는 소피아의 표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나 기분이 좋은가...?'

소피아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보고 하일즈는 낮에 자신이 받았던 안마를 떠올렸다. 어디의 친구에게서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클로에의 안마는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내가 그런 안마를 클로에에게 해줄 수 있다면?'

하일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엌의 안으로 들어갔다.

"음? 하일즈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기레스의 안마를 만끽하면서 소피아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띠곤 하일즈를 맞이했다.

"오면서 기레스가 안마를 해주고 있는 것을 봤는데요.."

"응? 그게 왜?"

"왜 저번에 제가 다음에 연마해서 안마를 해드리기로 했었잖아요?"

"아 그랬던 적도 있었지."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한번 해봐도 될까요?"

"오늘? 흐음.."

소피아는 하일즈를 가늠하듯 위 아래로 흘겨 보면서 대답했다.

"알았어. 단,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면 바로 끝내는 걸로 하자."

"네? 어째서.."

"이미 안마는 기레스한테 받을 만큼 받았거든."

'도움 하나 안되는 녀석..'

하일즈는 기레스를 살짝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하일즈는 소피아 모르게 눈알을 굴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노려보는 것을 놓치지 않은 소피아의 말투가 살짝 내리 깔린다.

"하일즈가 연마를 해왔다고 하니 한번 받아보기는 하겠지만.. 이전 같은 같잖은 안마라면.. 그다지 받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가 같잖...?'

어쩐지 냉기가 풀풀 날리는 것같은 신랄한 소피아의 말에 하일즈는 살짝 당황하면서 말했다.

"아.. 아니 저번과는 다를 거에요."

'이번에는 클로에에게 안마를 받은 게 있으니까..'

클로에가 자신에게 해준대로 한다면 저번보다 못할 리가 없다고 하일즈는 야심차게 생각했다. 하일즈도 클로에 못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미 클로에의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대략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이렇게..'

소피아의 새하얀 목덜미를 보며 하일즈는 군침을 꿀꺽 삼킨다.

'이번만큼은 실수해선 안돼.'

하일즈는 조심스럽게 클로에가 보여준 안마를 흉내 내었다. 이미 30대인데도 소피아의 피부는 앳된 클로에 못지 않게 탱글탱글했다. 그 매끄러운 백설의 피부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음심을 들끓게 만들었다.

"읏.."

살짝 욕정한 그 순간 소피아의 냉랭한 신음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눈으로 소피아는 하일즈를 올려다보았다.

"아.. 아니 어머니."

"뭐 실수할 때도 있는거지. 세번 정도는 견뎌 줄게."

소피아는 언제 차가운 시선을 보였냐는 듯이 곧장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제 젠장 힘이 너무 들어갔던 건가..?'

하일즈는 당황하면서 조금 더 힘을 빼고 부드럽게 소피아의 쫀득쫀득한 어깨를 주물러 나갔다.

'좋아 아직까지는 크게 문제는 없으니까 이 힘으로 적당히 유지해 나가면..'

어느 정도 소피아의 어깨를 주무르는 데 성공한 하일즈가 그렇게 의기양양한 마음이 부풀어 오르려 하는 무렵 소피아의 손가락이 하나 더 꺽여 버렸다.

"어 어째서."

"미안하지만 하일즈. 너무 싱겁단다. 그건 그냥 내 어깨를 만지고 있는 것 뿐이잖니. 기레스는 그렇지 않았는데.~"

소피아는 슬쩍 하일즈를 올려 보며 조롱섞인 어조로 말했다.

'으 으읏!'

그냥 못하는 건 좋지만 기레스와 비교를 당했다는 수치심만은 참기가 힘들었다.

'아직 한번 한번이 남았..'

하일즈는 클로에가 자신의 위에서 체중을 실어 어깨를 꾹 눌러주는 것을 떠올렸다.

"아윽..!"

그리고 하일즈가 체중을 싣자마자 소피아는 신음을 내뱉으며 곧장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체중으로 누르던 소피아의 몸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버리자 하일즈는 꼴사납게 체중이동을 하지 못해 그대로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으윽."

"어머 괜찮니? 하일즈?"

소피아의 걱정하는 목소리는 영락없는 어머니의 온화한 목소리다.

"괜찮아요."

바닥에 손을 집고 넘어진 하일즈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미안해 하일즈. 아파서 몸을 움직인 건데.."

그런 말을 하는 소피아의 입가에는 어딘지 재밌다는 듯한 장난스러운 미소가 살짝 올라가 있었지만, 그저 자책하고 있는 하일즈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에요. 제가 미숙한 탓이죠. 뭐.. 다 다음번에는 꼭... 제대로 해드릴게요."

하일즈는 이를 악 물고 소피아에게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흐음..? 다음 번에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일즈 누구에게나 못하는 건 있을 수도 있는 법이란다."

소피아는 살살 하일즈의 자존심을 긁는다.

"아.. 아니 다음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할게요."

"젤가를 닮아서 고집하고는.... 알았어. 하지만 다음번에는 엄마를 실망시키지 말아주렴."

소피아는 하일즈를 차갑게 내려다 보면서 실망을 넘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치욕의 안마가 지나고 하일즈는 2층으로 올라왔다. 자신의 방문 앞에서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소피아에게 화난 것이 아니라, 미숙한 자신에게 화가 나 버린 것이다. 안마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피아를 너머 클로에까지 안마해서 기분 좋은 표정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목표는 이미 그의 머릿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대로 내 명예가 실추된 채로 끝날 순 없어.'

소피아의 실망한 표정을 떠올리며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2층에서 대기했다. 곧 기레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2층으로 올라왔다.

"기레스."

"하일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속편히 얼빠진 소리를 하는 얄미운 기레스에게 하일즈는 질투심을 느껴 당장이라도 한대 쥐어 박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뭐.. 뭔가 내가 또 잘못한 거야?"

기레스는 그 표정을 읽고 두려움에 떠는 척 과장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병신새끼.'

'표정에 다 보인다. 하일즈.'

모든 것이 하일즈에게 뒤떨어지는 기레스지만 이 순간 만큼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네가 나한테 부탁을 할 게 있어?"

'방금 부엌의 일을 봐놓고도... 이 눈치 없는 새끼..'

하일즈도 사실은 기레스에게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레스에게 비교를 당하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기레스에게 무언가 부탁을 하다니, 평소의 하일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들부들 거리면서 하일즈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내게 안마를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그 부탁에 기레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안마를?"

아무리 클로에에게 제대로 된 안마를 해줄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하일즈가 기레스에게 안마의 가르침을 요청할 일은 죽을때까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소피아의 저 실망의 표정을 본 지금은 다르다.

그에게는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가장 존경하며 사랑하고 있는 어머니, 소피아에게 실망스러운 아이로 남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꼭 좀 부탁할게. 내가 괴롭힌 것은 알지만.."

"알았어 가르쳐 줄게. 대.. 대신 손찌검은 좀 하지 말아줘."

기레스는 비굴하게 하일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병신같은 놈. 너 따위 안마의 기술만 빼내면 볼일 없다고.'

저렇게 비굴한 기레스가 사실 자신의 행동을 여기까지 유도한 원흉이라고 하일즈가 생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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