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클로에(14)
* * *
"그럼 일단 앉아줄래?"
기레스는 친절하게 의자를 빼주면서 클로에에게 말했다.
"어째서? 안마를 가르쳐 주는 것 아니었어?"
"공부를 할때도 일단 먼저 어떻게 푸는지 보여주고 시작하잖아?"
기레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클로에는 곧장 알아 차렸다.
"시범을 보인다는 거구나."
"일단은 내가 어떻게 안마를 해나가는지 집중해서 기억한 다음에, 내게 안마를 해줄 때 문제점을 바로 잡아 준다는 거지."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레스의 말에 납득했다. 기레스를 도와주면서 가르치는 요령이 는 클로에는 확실히 무턱대고 선행 시범 없이 안마를 바로 시작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기레스의 유도에 클로에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안마를 시작하기 전에 클로에는 기레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기레스 안마를 연습하게 해달라고 한 것 치고는 그다지 연습을 요구해 오지는 않네?"
기레스는 클로에의 등 뒤에서 보란 듯이 회심의 미소를 띠고는 물었다.
"혹시 받고 싶었던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그렇게 부탁했으면서 연습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야."
"나도 마음 같아서는 연습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공부가 아니라 안마는 네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기레스는 클로에의 어깨에 자신의 거친 손을 올렸다.
"나름 절충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클로에는 자신이 말이 무슨 결말을 가져올 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게 신경 쓰였다면 하겠다고 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앞으로는 참고하도록 할게. 마침 이렇게 하일즈의 선물을 위해 연습을 하게 된 참이었으니까.. 나도 다음부터는 종종 안마를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어."
단순하게 기레스가 안마를 종용하게 되면 클로에에게 거부감이 생길 수 있지만, 거기에 하일즈가 묻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클로에는 하일즈를 위해, 기레스는 그런 클로에를 위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이 있다면 그만큼 거부감도 덜어지게 된다.
하일즈와 클로에의 사이를 더욱 돈독해 지게 만들고 싶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신용을 쌓는 것은 덤이다.
기레스는 클로에의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를 살짝 쥐고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하일즈를 위해서' 기레스의 손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기억하기 위해 클로에는 눈을 감고 기레스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집중해서 느끼기 시작했다.
'역시 이 녀석의 안마.. 기분이 좋은데..'
눈을 감고 기레스의 손을 따라 의식을 집중하니 이전보다 더더욱 선명한 느낌이 그녀의 몸과 머리에 전해진다.
자신이 주물러 주어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싶은 의문이 들 정도로 기레스의 손은 기분이 좋았다. 마음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피곤한 상태로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운 것처럼 잠에 빠져버릴 것만 같이 머리가 둥실거린다.
그런가 하면 이따금씩 기레스의 안마는 몸 구석구석에 찝찝하게 끼어있는 스트레스를 상쾌하게 날려줘 클로에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클로에가 여기서는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기레스의 손은 여지 없이 그 부분을 비집고 들어온다.
"우하.."
"아팠어?"
그랬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레스는 클로에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기레스는 어디까지나 이건 자신의 연습 겸 하일즈의 안마를 위한 시범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자신의 은근한 미숙함을 연기해 나간다.
"아니.."
"그러면?"
"시 시원해서 그런거야. 적당히 분위기 좀 읽으라고."
클로에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녀 답지 않게 툴툴 거렸다. 그녀 본인은 자각이 없었지만 그 모습은 꼭 남자친구에게 앙탈을 부리는 것만 같아 보인다.
"아! 아아.. 미안해."
기운 빠진 목소리와는 달리 기레스는 입가에 실실거리는 미소를 걸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한차례의 기분 좋은 안마가 끝나고 기레스는 클로에에게 물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정도는.."
마을 내 또래 중에서 제일가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클로에는 기레스가 자신의 어느 부위를 어떻게 주물렀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실력 좀 볼까?"
클로에가 일어선 의자에 기레스는 거리낌 없이 앉았다. 아직 더운 한여름이었음에도 의자에는 클로에가 앉아 있었다는 온기가 선명히 느껴진다.
"그럼 시작한다."
기레스의 어깨에 클로에의 서늘한 손이 닿았다. 클로에는 마치 기레스의 움직임을 복사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받았던 안마를 시작했다.
"끄아아.."
클로에의 손이 어깨를 주무르자마자 기레스는 몸을 기괴하게 비틀었다.
"엇?"
"살살..! 살살...! 안마는 힘이 다가 아니란 말야."
"아..! 응. 기레스 네가 온 힘을 다하면서 하는 것 같길래.."
안마를 할 때에는 어느 정도 최소한의 힘이 필요하다. 애무라고 한다면 하염없이 다정다감하게 살을 부비며 문질거려도 상관 없지만 안마는 애무와는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절망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기레스는 당연히 단순한 근력도 형편 없었기 때문에, 클로에를 애무가 아닌 안마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전력을 다해 힘을 가해야만 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체중을 이용해서 눌러야 할 정도로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그런 기레스를 유심히 보고 있었던 클로에는 자신의 힘을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기레스를 힘껏 주물러 버린 것이다.
"미리 나를 통해 연습해서 다행이잖냐. 그대로 하일즈에게 안마 했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어."
"그렇네. 저기.. 이정도면 좋아?"
클로에는 부드러운 손으로 깨지기 쉬운 물건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조심 기레스의 어깨를 주물렀다. 절세의 미녀가 정성껏 어깨를 주무른다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몸은 절로 달아 오른다.
"음.. 조금 더 강해도 좋을 것 같아."
기레스는 그 풋풋한 클로에의 손을 만끽하면서 천천히 그녀에게 안마를 가르쳐 나갔다.
클로에는 침착한 표정으로 기레스에게 받았던 안마를 하나 하나 따라해 나간다.
'으...'
겉으로는 평소의 클로에와 다름 없이 냉정해 보였지만 내심 그녀는 살짝 쑥스러워 하고 있었다. 안마를 받을 때는 기분이 좋기도 하고, 자신의 뒤로 시선을 향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느낌을 제외하면 기레스가 어떻게 안마를 해주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본인이 안마를 직접 해주게 되자 새삼 부끄러운 행위였다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딱히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님에도 뭔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 스멀스멀 그녀의 안에서 머리를 들어 올린다. 순진한 클로에는 그것이 배덕감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좋아 좋아. 이거라면 하일즈도 확실히 만족할 거야."
"그 그럴까?"
마음을 끈적하게 뒤덮어 어딘지 시리게 만드는 느낌은 기레스의 해맑은 목소리에 날아가 버렸다. 기레스는 엄지를 치켜 올리면서 클로에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기레스는 순수하게 안마를 대하고 있는데 나는.. 무슨 생각을..'
그런 기레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클로에는 이 행위를 부끄럽다고 생각한 자신을 질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이 행위 자체가 하일즈를 위한 연습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당연하지. 네게 안마를 받고 싫어할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이거면 하일즈도 확실히 껌벅 넘어갈 거야."
'또 저런 남사스러운 소리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기레스의 말을 듣고 흘려 버렸다. 어느샌가 클로에는 기레스의 그런 여과없는 직설적인 말도 익숙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기레스의 안마를 보고 눈대중으로 익힌 그 기술만으로도 이미 하일즈가 싫어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기본적으로 하일즈는 클로에가 무엇을 하든 싫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술이 어중간해도 좋아라 할게 뻔한데, 지금 기레스에게 안마를 배운 클로에의 실력은 기레스도 솔직하게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로 정교해져 있었다. 고작해야 한시간 만에 그렇게 성장해 버린 클로에의 실력에 기레스는 기가 차면서도 앞으로 하일즈를 이용해 클로에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기대감에 숨김없이 미소를 지었다.
"뭘 그리 히죽이고 있어?"
기레스의 비틀린 미소를 보면서 클로에가 물어온다.
"아니 하일즈가 기뻐할 걸 조금 생각했을 뿐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기레스는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의 말을 술술 내뱉는다.
'흐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사랑을 빌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기레스의 진정한 속내도 모른 채, 클로에는 하일즈에 헌신적인 기레스에 대한 호감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나갔다.
"후우.. 하아. 젠장."
한여름의 평원에서 하일즈는 땀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 들고 있던 목검을 내던지며 분함을 표현했다.
'이번에도 못이기다니..'
"아쉽게 됐네. 하일즈."
벌러덩 누워 있는 하일즈의 시야에 햇빛에 반사된 클로에의 비단결 같은 청은색 머리카락이 들어온다.
"다음번엔 지지 않을 거야."
하일즈는 열등감으로 속에서는 씩씩 거릴 정도로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클로에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클로에가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면 진작에 폭발하고도 남았을테지만, 그가 클로에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였다.
"몸을 움직이는 게 너무 딱딱한 거 아냐?"
"그런가? 조금 조급하기는 했지만 딱딱했었나?"
평소 하일즈의 부족한 점을 지적해 주는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끌어 나갔다.
"딱딱했어. 경직되었다고 해야되나? 그래서 말인데, 최근에 친구에게 안마를 받은 적이 있는데 말야."
"안마?"
"응. 하일즈도 한번 받아 볼래?"
"그.. 네 친구에게?"
"그럴 리가 없잖아."
클로에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자 가뜩이나 냉정한 표정은 더욱 차갑고 냉랭하게 바뀌었다.
'하기사 클로에에게 안마를 해줬다고 한다면 여자일테니까.'
클로에의 표정에 하일즈는 '다른여자'에게 안마를 받는 광경을 클로에가 좋아라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다른 남자에게 클로에가 안마를 받게 되면 못참을 테니까..'
"잠깐 그렇다는건..."
클로에의 친구가 해주는 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안마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한명 뿐이다. 하일즈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클로에를 바라 보았다.
"응. 내가 해주려고.."
클로에는 고지식한 여자다. 비교하자면 하일즈보다도, 아니 결혼을 한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소피아와 정상위의 섹스만을 고집했던 그 '젤가'보다도 더 고지식하다. 때문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이미 공인된 남자친구인 하일즈와도 살을 부디끼는 행위는 지양하며 사귀어 왔다.
"친구에게 배워왔어. 한번쯤은 이런 선물을 해주고 싶었거든."
클로에는 자신이 고지식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다. 고지식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변할 계기가 없으면 쉽게 변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계기만 있다면 그녀도 이렇게 하지 못할 건 없는 것이다.
'아마 기레스가 없었다면 나는 평생 하일즈에게 안마 같은 것은 해주지 않았을지도...'
클로에는 자신의 변화의 계기가 되어준 기레스에게 남모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고지식하고 냉정하다지만 클로에도 여자는 여자.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단 기레스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은 클로에만은 아니었다. 그 완고한 클로에에게 안마를 받게 될 거라는 사실에 하일즈도 마음이 한껏 들뜬 것이다.
'진짜냐.. 고맙다. 누군지 모를 클로에의 친구야.'
자기가 고마워 하는 대상이 누군지도 모른 채 하일즈는 기대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클로에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는 고저 차가 있는 언덕으로 하일즈를 데리고 갔다. 자연히 하일즈가 아래에 그리고 클로에가 위에 언덕에 걸터 앉아 맞닿은 자세가 되어 버렸다.
상당히 밀착된 자세였지만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는 것이 클로에라는 여자다. 하일즈를 상대하느라 땀으로 촉촉히 젖은 클로에의 체취가 짙게 하일즈의 코를 찌른다. 꿀단지가 연상되는 달짝지근함이 느껴지는 내음이다.
"그럼 시작한다?"
"어! 응!"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늠름해 보이려 애쓰는 하일즈지만, 클로에의 앞에서는 한없이 순진한 청년일 뿐이다.이러니 저러니 기레스에게 한없이 잔혹했던하일즈도 속을 까고 보면 순박한처녀인 클로에처럼풋내나는 동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클로에와 몸이 밀착한 하일즈는 그녀의 땀으로 맨들 거리는 클로에의 피부와 촉촉히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달콤한 잔향에 머리가 아찔해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아직 안마를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하일즈의 머릿속에 클로에를 향한 열등감 따위는 한 알갱이도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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