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계네토기-57화 (57/238)

〈 57화 〉 클로에(13)

* * *

기레스의 비밀의 안마를 받았던 그 날 이후 기레스는 딱히 클로에에게 안마를 요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딱히 기레스와 만나지 않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방과 후에 남들 몰래 구교사에서 만나 기레스의 공부를 봐주는 비밀의 만남은 계속되고 있음에도 기레스는 안마의 연습을 종용해 오지는 않았다.

"고마워 클로에."

구교실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기레스는 클로에가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곧장 감사를 표했다.

"뭐가?"

뜬금없는 기레스의 감사에 클로에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기레스는 클로에의 앞에 놓인 책상에 한 장의 종이를 놓았다. 클로에는 그 낯익은 종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반에서 21등!? 많이 올랐잖아!?"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기레스의 성적은 그렇게 칭찬할 만한 성적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기레스를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위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성적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네 덕이지."

놀라고 있는 건 클로에 뿐만이 아니었다. 기레스도 자신의 성적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클로에가 집어 준 요점정리의 덕도 많이 봤지만, 그것보다 더욱 도움이 된 것은 기레스의 수준에 맞추어 준 클로에의 가르침이었다. 클로에의 설명을 통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었다면 기레스는 결코 그 성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이 천직인 것 아냐?"

"그럴지도.."

클로에는 살짝 미소를 띠며 시원하게 긍정해 버린다. 냉정하게 대답하는 듯한 어조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그 구제할 길 없는 기레스를 이렇게 성장시켰다는 흡족함과 자랑스러움이 은근히 묻어 있었다.

"네가 안마를 해줄 때 했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아."

"소중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서 기뻤다는 거?"

"그 그래. 그렇게 입 밖으로 내면 안 부끄러워?"

"아.. 부끄러워야 하는 거야? 친구끼리는 이런 정도의 대화는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이상한 발언이었나.."

기레스는 힘없이 살짝 어깨를 늘어 트리며 말했다. 클로에 이전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 친구에 무지하다는 점을 기레스는 절묘하게 이용해 버린다.

"아니 사람마다 개인 차가 있어서 한 말이야. 나는 그런 말을 못하니까.."

"하일즈랑은 할 거아냐. 사귀는 사이니까."

"아니. 난 그런 성격은 아니라서.."

'도대체 이녀석은 하일즈랑 만나서 뭘 하는 거지?'

문득 궁금해진 기레스는 클로에에게 물었다.

"그런데 하일즈는 자주 너와 만나는데 둘이서는 보통 뭘 하는 거야?"

"보통은 산책을 가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거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또 대련을 하곤 하지."

"대련?"

"기레스는 모르겠지만 말야. 나와 하일즈는 황립 사관학교를 노리고 있거든. 그래서 학교 성적을 가지고 경쟁하거나. 무술 같은 대련을 같이 하고 있어."

"잠깐 그러면 나를 가르칠 시간은 없어야 하는 것 아냐?"

"그건 2등이 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지 않을까?"

'하일즈 녀석..'

하일즈의 여자친구를 노리고 있는 만큼 기레스는 하일즈의 동향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밖에서 무엇을 하는지까지는 알기 힘들지만, 집에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소피아가 있었기 때문에 하일즈의 일거수 일투족은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이유가 그거였나.'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하일즈는 클로에를 만나는 것조차도 잊고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한다. 그렇게 토나오는 노력을 했음에도 하일즈는 기레스의 공부를 돌봐주면서 요점정리까지 만들어 준 클로에를 꺾지 못한 것이다.

'과연..'

기레스는 과거 하일즈가 시험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저기압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의 몸에 쑤셔진 고통으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험이 끝나면 언제나 기레스는 하일즈의 평소보다 배는 심한 폭력을 견뎌야만 했다.

'그 이유가 이거라는 건가.'

"연인 사이에도 경쟁 같은 걸 하다니 역시 수재들은 다르구만."

"경쟁이래봐야 그냥 점수를 비교해 보는 것 뿐이야. 선의의 경쟁이라는 거지."

클로에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그것은 가진 사람의 여유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일 걸?'

기레스는 또 다시 좋은 정보를 얻었다 생각했다.

'하일즈 녀석은 클로에한테 엄청난 열등감을 가지고 있겠지.'

기레스는 하일즈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다. 분명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클로에 앞에서는 대범한 남자를 연기했겠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서 이글거릴 것이라는 것은 직접 하일즈에게 매운 맛을 본 기레스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건 감정이 실렸었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하일즈의 폭력을 일부러 떠올리면서 기레스는 최근 다소 잠잠하게 가라앉았던 자신의 분노의 칼날을 갈았다.

"그래도 진 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테니까.. 시험이 끝나면 더 잘 대해주려고 살짝 노력하는 편이야."

"그래? 하일즈도 네가 여자친구라 정말 좋겠네."

기레스는 속 편한 얼굴로 클로에에게 말했다.

'정말 이녀석은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그런 남사스러운 소리를..'

클로에가 쑥스러워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레스는 불현듯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하일즈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는 건 어떨까?"

"특별한 선물?"

"어차피 클로에 너니까 잘 대해준다고 해봐야 그다지 티도 안났겠지?"

"실례야. 하일즈는 분명 만족했을거야."

기레스의 짐작에 클로에는 콧방귀를 끼면서 말했다.

"뭘 해줬는데?"

"그러니까.. 다음번에는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위로의 말을 해준다거나.. 당시에 부족했던 점에 대해 지적을 해준다거나.."

'내 매타작의 지분의 반은 이녀석한테 있는 거 아냐? 그나저나 저런 말을 들어도 감정을 추스를 정도면 하일즈도 어지간히도 클로에를 좋아하나보군'

그 편이 기레스는 더욱 신이 난다. 헤어져도 그만인 여성을 타락시키는 것만큼 재미 없는 일은 없는 것이다.

'더욱 더 열애의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마. 하일즈.'

서로가 사랑을 하면 할수록 그 끝에 있는 배신의 배덕감은 더욱더 진하고 감미로워 진다. 사랑의 무게가 크면 클수록 배신의 가치는 더욱 드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배려에 지나지 않잖아."

"그런가?"

"그러니까 이번에는 클로에 네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하일즈에게 선물을 주는 건 어떨까?"

"선물? 하지만 이런 걸로 일일히 뭔가를 사주는 건.."

클로에 가정의 가계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거기에 앞으로도 매번 보게 될 시험에서 클로에는 높은 확률로 하일즈를 이겨 나갈 것이었기에 클로에의 말에는 망설임이 서려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일즈가 그런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선물이라고 꼭 물건만 있는 건 아니지."

"?"

클로에는 짐작가는 게 없는지 고개를 갸웃 거린다. 일면 완벽해 보이는 클로에지만 그 껍데기를 벗겨보면 아직 순진하기 짝이 없는 앳된 소녀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내 특기가 뭐지?"

"안마?"

기레스에게 그것 외에 다른 특기는 없었기에 클로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너는 내게 공부를 가르쳐 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네게 안마를 가르쳐 줄게."

"뭐..?"

"잘 생각해 봐. 네 안마를 받고 하일즈가 즐거워 할 모습을 말야. 아마 시험에 밀려서 아쉬워 하는 마음 따위는 단번에 날아가 버릴 걸?"

하일즈는 쉽게 화를 내지만 그만큼 한없이 가벼운 남자다. 사랑하는 클로에가 안마를 해주게 되면 시험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히 지워질 것이라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덧붙여서 클로에를 향한 그의 애정도 한없이 진해질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클로에와 하일즈를 이어주는 사랑전도사 같은 느낌이지만, 그 이면에는 기레스의 추잡한 욕망으로 그득햇다.

"그런가.. 확실히 신선한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네."

"그렇지?"

"그런데 안마는 어떻게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내가 네게 연습하는 것처럼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음.. 그건..?"

클로에의 몸이 흠칫 놀란다. 기레스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까닭이다.

"내가 널 안마하라고?"

"그렇게 되겠지. 하일즈에게 연습을 할 수는 없잖아..? 다른 남자가 있다면 다른 남자를 통해서 연습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겠지.'

클로에가 기레스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기레스도 이미 클로에에 대한 정보수집은 사전부터 완료된 상태였다. 클로에는 친구 부족한 줄 모르는 인기녀였지만, 하일즈라는 존재 때문인지 남자 친구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기레스에게 있어 클로에는 유일한 첫 친구지만 클로에도 기레스라는 존재는 학교 내 유일한 남자사람친구였던 것이다.

"클로에 너니까 그렇게 나올 줄은 알고 있었지. 구두로라도 가르쳐 줄까? 그 경우 하일즈의 만족은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아니.. 하자. 안마해 줄게."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는 자신의 소매를 시원스레 걷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 나를 안마하는 건데?"

"이왕 한다면 하일즈를 정말로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으니까.. 거기에 기레스 널 안마하는 게 뭐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이미 클로에는 기레스에 대한 저항감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다른 남성이었다면 외모나 능력을 불문하고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만, 기레스는 다르다. 이미 클로에는 기레스를 의지할 수 있을만한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클로에는 확실히 기레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존에 자신이 하일즈에게 해왔던 배려보다 이런 선물 쪽이 하일즈가 훨씬 더 기뻐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녀가 하일즈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였기 때문에 '하일즈를 위해서도' 그녀는 건성으로 안마를 배우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지."

기레스는 가는 웃음을 띄우며 클로에의 말에 동조해 주었다.

한발짝 떨어져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일임에도 사랑하는 하일즈를 위해서라는 생각과, 이미 기레스라는 인간을 완전히 믿고 있는 클로에에게는 그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하일즈를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해 보자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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