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클로에(11)
* * *
"안마라니 그 안마?"
클로에는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래 그 안마."
그 대답에 클로에는 기레스가 어째서 머뭇거리며 대답했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안마라는 건 말야. 성적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아니잖아?"
기레스는 안마를 잘한다고 말했지만, 마사지를 하는 과목 따위는 없다. 당연히 성적을 메길 수도 없으며, 실력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 그래서 나도 긴가민가한 건 사실이야."
"긴가민가라니.. 그런 것 치고는 잘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잖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뭘 해서 인정을 받은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거든. 그러니 나는 이쪽으로는 그나마 재능이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인정은 부모님에게 받은 거겠지?'
클로에는 기레스가 혹시나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기레스의 인간관계를 고려해 보면 가족들 이외에는 딱히 안마를 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이 마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일즈가 기레스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형제가 살갑게 안마를 해주는 그림도 상상하기 힘들다. 남은 것은 부모와 티나 뿐이지만, 보통 안마라는 특성을 생각해 보면 남매 보다는 부모에게 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클로에 본인도 종종 일에 지친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주곤 했으니 말이다.
클로에는 젤가나 소피아가 예의상으로 해준 말에 기레스가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으...'
만약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정말로 비참한 촌극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기레스 나름대로는 찾고 찾아서 재능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사실은 겉치레에 불과한 말이었다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일까. 태어나서 재능의 부족 따위는 느껴본 적이 없는 클로에는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이 대화는 적당히 넘겨 버릴까.'
클로에는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기레스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말인데."
기레스는 망설임과 진지함이 어지럽게 뒤섞인 듯한 표정으로 클로에에게 말했다.
"클로에 네게 내 안마를 한번 해봐도 될까?"
"아니. 그건 조금.."
아무리 마음의 빚을 갚고자 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클로에는 기레스의 그 제안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이며 기레스를 믿는다고 해도 고지식한 그녀의 성격은 외간남자에게 자신의 살을 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난 하일즈도 있고.."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네 몸을 희롱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레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오히려 자신이 정색하고 화를 내가면서 뻔뻔하게 내뱉었다.
"그렇지는 않지만.."
"거기에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 치고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너는 얼마든지 나를 제압할 수 있잖아."
현실에 빗대 본다면 격투기 챔피언과 4살난 꼬마의 매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클로에와 기레스의 신체 능력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기레스가 무슨 짓을 해도 클로에는 가볍게 기레스를 제압할 수 있었다.
만약 하일즈 정도의 실력을 가진 남자가 안마를 권유해 온다면, 클로에는 그 사람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든, 경각심을 가지고 그의 손길을 한사코 거절했을 것이지만, 기레스는 다르다. 만의 하나의 경우가 닥쳤다고 해도 열등하기 짝이 없는 기레스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제압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기레스가 약하다는 사실은 차라리 강했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았을 그녀의 견고한 마음의 자물쇠를 느슨하게 풀어버린다. 자신의 열등함 조차도 태연하게 무기로 삼아버리는 것이 기레스라는 인간이었다.
"그렇긴 하지."
"거기에 내가 하일즈가... 아니 네가 싫어할 일을 할 리가 있겠냐. 그랬을 거라면 진작에 했겠지. 네게 3000만 에보나를 주었을 때부터 말야."
확실히 기레스의 말은 정론이다. 3000만 에보나라는 거금을 건네준 기레스는 크든 작든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클로에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녀에게 받을 것은 무엇 하나 없다는 듯이 도리어 거리를 두었다.
기레스가 정말로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기레스가 '먼저' 접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지만, 정작 기레스 본인은 클로에 보기를 마치 돌같이 했던 것이다.
기레스에게 접근한 것은 어디까지나 '클로에 자신'이라는 점은 이런 부분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기레스가 클로에에게 보여준 모든 것들은 그녀가 '기레스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도록 교묘히 유도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정말로 이 방면에 소질이 있는 건지 알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안마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으니까.."
"기레스..."
친구 사이라 해도 특히나 남녀사이라하면 더더욱 안마는 쉽사리 권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주변에 클로에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기레스는 실례를 무릅쓰고 '권하는 것 조차' 물리적으로 할 수 없다.
"친구라 생각했던 건 나뿐이었던 것 같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널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날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잖아? 나는 이런 나같은 놈한테 스스로 친구가 되고자 다가온 널 믿고 있어서.. 친구라 생각해서 이런 쪽팔린 말까지 한건데.."
클로에는 항변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기레스는 클로에에게 3500만 에보나라는 돈을 빚이라고 생각도 않고 순순히 자신에게 양도해 준 것이다.
클로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 친구가 아니었다고 해도 기레스가 하일즈의 여자친구로서의 자신을 믿고 있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하물며 그게 지금처럼 친구가 되기 전의 일이니 친구가 된 지금, 기레스가 클로에를 얼마나 믿고 있을지는 구태여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문득 그렇게 기레스와 이야기를 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클로에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믿고 있는' 기레스의 신뢰를 은근히 배신해 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 해도 나는 널 아직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네가 싫다면 굳이 곤란한 걸 요구하지는 않을게."
기레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클로에는 분한 마음에 어금니를 꽉 물었다. 친구 사이라고는 하나, 남녀사이의 안마는 상식적으로는 어느정도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레스의 말은 하나 하나가 비수가 되어 클로에의 마음을 후벼 파버린다.
기레스는 아무 대가도 없이 자신에게 큰 거금을 건네 주었는데 얼마든지 기레스를 제압할 수 있으면서도 안마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의 비겁함에 고지식한 클로에는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기레스의 행동이, 클로에의 고지식한 성격이, 그리고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이 상황이, 클로에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정말 이상하다면 거부하면 되고..'
만약 말이 먹히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제압하면 된다. 야한 의도는 없는 안마라면 순수하게 기레스의 안마를 감평해 주면 그걸로 좋다. 안전장치의 보험까지 완벽하게 상황은 클로에를 몰아부치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기레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클로에에게 빚을 갚는다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행위였다. 비록 그게 스스로가 멋대로 짊어진 빚이라고 해도 짊어졌다면 자신이 떳떳해지기 위해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다.
고지식한 성격이기에 단순한 안마에도 거부감을 느껴 거절하고 싶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지식하기에' 클로에는 기레스를 거절할 수 없었다.
"오늘은 더 공부할 기분도 아닌 것 같고.. 그럼 난 간다. 이건 고맙게 쓸게."
기레스는 클로에가 만들어 준 요점 정리를 들고 시원스레 흔들면서 일어나 구교실의 문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응?"
"알았어. 네 안마. 받아주도록 할게."
"정말이냐? 딱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기레스는 마치 정말로 클로에의 몸에는 관심이 없는 것만 같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퉁긴다.
"아냐. 이상한 곳 만지면 날려 버리면 그뿐이니까."
클로에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시원스레 말해 버린다.
"그거 참 무서워서 손이 떨려 버릴 것 같네."
기레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심드렁한 얼굴로 클로에에게 다가갔다.
"그럼 일단 정해둘까?"
기레스는 클로에를 의자에 앉히며 그 등 뒤에 서서 말했다.
"정해둬? 뭐를?"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만질 수 있는지. 나중에 딴소리를 들어도 곤란하고, 클로에 너한테 한대라도 얻어맞으면 나는 버틸 수가 없잖아. 이런 건 확실하게 가는 게 너도 좋지?"
"그거야.. 그렇지."
혹시나 기레스가 실수로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만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레스는 그런 걱정을 스스로 나서서 원천 차단해 주었다.
'의외로 철두철미하네.'
기레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자신의 결백의 알리바이를 의도적으로 쌓아 나간다고 클로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가슴 같은 건 안돼. 알고는 있겠지?"
"물론이지 음란하다고 의심살만한 행동은 전부 금지인 걸로 가자고. 허리는 어때?"
"허 허리..? 어째서 안마를 하는데 그런 부분까지.."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설마 어깨만 주물 거릴거라 뭐 그런 걸 생각한 건 아니겠지?"
기레스의 말은 실로 정곡이었기에 클로에는 살짝 말을 멈추고 기레스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정말 흑심은 없는 거 맞지?"
"그런 말을 할거면 하지 말자고.. 네가 싫으면 안해도 된다는데 굳이 붙잡은 건 너잖아."
기레스는 억울함을 한껏 표출하며 툴툴 거렸다.
"아 알았어. 하지만 허리는.."
기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러면 허리는 안하는 걸로.. 팔이나 다리는 괜찮아?"
"그정도라면 뭐.."
"어깨나 주무른다고 생각했을테니까 어깨는 상관 없지?"
"그래."
"목은?"
"목?"
클로에는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좋아. 다시 한번 확인하는데 그러면 목부터 어깨 팔 다리 정도는 허용이라는 거지?"
"그래."
클로에는 살짝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의자에 앉은 채로 대답했다.
"그럼 시작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