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클로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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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스는 사람의 마음을 찌른다. 3500만 에보나라는 돈은 500 에보나 같은 푼돈이 아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혼을 홀리게 만들고, 빌리면 마음을 조이며, 순수하게 받는다 해도 그 무게에 마음이 억눌리는 거금인 것이다. 3500만이라는 돈은 클로에의 잠긴 문을 여는 열쇠이며 자유롭게 물을 노니는 클로에를 낚아채기 위한 떡밥이었다.
그는 클로에의 앞에서 빚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했지만, 이미 돈을 빌려주는데 성공한 그 순간 클로에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리고 돈이라는 굴레에 묶이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 뒤는 자신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클로에가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클로에는 자신의 마음 안에 스스로 빚을 잔뜩 쌓아올려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클로에의 가슴 속에 쌓인 빚더미는 클로에의 양심을 찌른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버젓히 자신의 눈앞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시퍼렇게 날이 선 양심이 클로에의 마음을 찌르게 만든다. 그 괴로움을 덜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짊어진 빚을 갚아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것이다.
비밀의 친구 사이라고 해도 겉으로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무시를 당하기 일쑤이며 클로에도 딱히 기레스와 대놓고 친밀하게 굴지는 않는다.
오로지 이따금씩 기레스의 공부를 보고 가르쳐 주는 방과 후의 시간만이 기레스와 클로에의 사이를 이어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클로에가 기레스를 생각하는 마음은 처음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사람의 인상이란 겉모습만 가지고 결정되는 게 아니다. 기레스를 알고 싶지 않았다면 모를까. 알고 싶게 된 지금 그녀의 안에서 한심하다고만 생각했던 기레스의 인식은 조금씩 호감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겉모습은 첫인상을 남길 뿐이지만, 대화는 사람의 내면의 인상을 남긴다. 얼굴만 스쳐도 인연일 진대, 기레스는 클로에가 싫어하지 않을 말을 골라하는데다, 애초에 막대한 금액을 클로에에게 전해 주었다는 사실 덕에 적당한 대화로 서로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만큼의 호감은 쌓이기 마련이었다.
거창하게 호감이라고 해봐야 뒤늦게 알고 보니 상당히 괜찮은 사람 정도의 감상에 지나지 않지만, 괴롭힘을 당해도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던 과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방과 후 기레스를 만날 약속을 잡아 두었던 클로에는 하일즈에게 시간을 비운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그런데 클로에 요즘 가끔 시간을 따로 비우던데.. 어딜 가는 거야?"
"응? 별 일은 아냐. 친구를 만날 때도 있고, 조금 해결해 둬야 할 일도 있고 해서 말이지."
"해결...? 혹시.. 저번에 말하지 못했던 그 일이야?"
"어? 응. 그거지. 거의 해결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아직도 깊게는 묻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클로에는 툭툭 양심에 찔려 살짝 시큰 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하일즈에게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해 나간다..
하일즈는 클로에가 마법을 사기 위한 막대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술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사실을 숨긴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클로에도 하일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그의 생각을 교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기레스를 만나는 것은 그 일이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었기에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되려 고지식한 클로에가 하일즈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어디까지나 클로에가 기레스와의 수업행위를 하일즈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불필요하게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을 숨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뭐 나도 전부 너한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하일즈도 더 캐물으면 혹여나 저번처럼 클로에가 헤어지자는 것을 빌미로 잡거나, 클로에의 마음이 상할까 싶어 강하게 묻지는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하일즈도 클로에에게는 클로에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아예 헤어지게 되는걸까 싶을 정도로 만나주지조차 않았던 이전과 달리 최근에는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하일즈도 자신의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인 자신에게도 비밀로 하는 것이 뭘까? 싶은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클로에의 뒷조사를 해볼 엄두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클로에의 재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클로에의 눈을 피해 그녀가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확인 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클로에를 믿지 못해서 미행을 했다는 것을 들키게 될 수도 있다. 하일즈는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그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한번 소피아에게 호되게 데인 적이 있었기에 그런 변칙적인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것이다.
거기에 그에게는 클로에와 지내온 수년 간의 시간이 있다. 하일즈와 클로에는 성에 눈을 뜨기도 전의 꼬마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어울려 온 소꿉친구인 것이다. 그렇기에 클로에가 어떤 여성인지 하일즈는 마을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숨기는 게 있더라도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자애로운 소피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 이상으로 그는 클로에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클로에 같은 여자는 집착을 하면 할수록 손에 넣을 수 없는 여자이기에 기본적으로 하일즈의 생각과 행동은 정답이다. 지금 클로에가 만나고 있는 상대가 기레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클로에가 기레스를 가르친 지도 한달이 지난 시간. 기레스는 이제 꼴찌는 면할 정도의 성적을 낼 수 있었지만 여전히 최하위권을 탈출하지는 못했다.
"이건 저번에 말해 줬는데?"
"아 미안 까먹었어."
기레스도 클로에와 지낸 시간이 꽤나 길어서 상당히 부드럽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흐음. 뭐 그럴거라 생각했어."
벌서 몇번이고 들은 변명이지만 클로에는 그다지 싫은 내색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에 기레스는 넌지시 클로에의 속을 떠보듯 물었다.
"가르쳐 주는 건 좋은데 이래서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지?"
"그거야 그렇지."
클로에는 기레스와 같은 과목을 보면서 무언가를 받아 적으며 시원스레 답했다. 마치 인쇄기가 인쇄하는 것처럼 글자가 쓰여나가는 경이적인 능력을 보고 기레스는 내심 이세계 사람들의 능력에 질려 버렸다. 저런 능력은 평생을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이런 노력 따위 형편 좋은 수단일 뿐이지만.'
일련의 행동들은 클로에를 얻기 위한 연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게 좋아."
"그게 좋다고? 네 노력이 바닥에 흘려버린 물처럼 낭비가 되는 건데도?"
"네가 내가 노력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걸로 좋다는 거야. 나도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있고 노력이래봐야 가끔씩 공부를 봐주는 것 뿐이잖아? 필요한 노력 같은 건 이미 다른 곳에서 메꾸고 있으니까.."
"어쩐지 그건 친구 관계라기 보다는 빚을 갚는다는 느낌이구만."
"빚으로 부터 시작된 친구라는 것도 있는 법인 거야.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지."
클로에는 이제 빚도 갚고 있는 것이라는 태도를 숨기지도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글세다? 빚으로 부터 시작된 섹프는 있을지도?'
그렇게 기레스가 속으로 클로에의 말을 더럽히고 있을 때, 클로에는 쓰고 있던 무언가의 작성을 끝마쳤다.
"다 됐다."
"그건 뭐야?"
"이거? 선물이야. 이제 곧 마지막 강의지? 그때를 대비한 요점정리야. 네 경우는 어차피 완벽을 기할 수 없을 테니까 충분히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쉬우면서도 나올 확률이 높은 곳에서 문제를 간추려 봤어. 이것만 달달 숙지해도 지금보다 몇 문제는 더 맞출 수 있을거야."
"흐음. 노력은 고맙지만 말야. 어차피 난 이제 이 강의에 큰 관심은 없는데?"
"뭐?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공부 했잖아. 이 과목에 관심이 있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것 아니었어?"
"딱히 그런 건 아냐."
"그럼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건데?"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거든."
기레스는 한껏 진중한 분위기를 잡아가며 말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미 기레스는 이런 단순한 지식 놀음에는 100년을 쏟아 부어도 이세계 사람들의 10년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잔혹한 현실을 수년 전에 깨닫고 있었다.
"잘할 수 있는 것?"
"너도 알고는 있겠지만 나는 잘하는 게 없잖아? 그래서 혹시나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을 찾아 보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그런 노력을.."
클로에는 말 끝을 흐렸다. 이미 그녀에게 기레스는 타인이 아니다. 일이 잘 풀렸으면 하는 친구인 것이다. 잘 해보고 싶어도 잘 해낼 수가 없다는 심정을 완벽한 그녀는 알지 못한다. 완벽하기에 도리어 그녀는 기레스의 심정에 공감도,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해서 노력하고 그래도 안된다면 미련없이 포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마 이번에도 꽝이었던 모양이야."
너털웃음을 지으며 기레스는 부서질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애처로운 웃음에 클로에도 살짝 표정이 굳어 버렸다.
기레스의 성적은 빈말로도 좋다고 위로할 수가 없는 성적이다. 클로에의 도움에 의해 나름대로 성적이 올라갔음에도 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기레스는 여전히 바닥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바닥을 깔아주는 학생들은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은 학생이어서 위로를 하는 것 자체가 기레스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이렇게 준비까지 해줬는데 미안할 따름이네. 하지만 네 정성을 봐서 이번 시험은 최선을 다하도록 해볼게."
"그럼 앞으로도 네게 맞는 적성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할 거야?"
"그렇게 되겠지? 너도 매번 나와 같은 과목을 맞추기는 힘들테니 아마 이 관계도 곧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걸."
"아쉬울 것 없어. 그때가 되어도 졸업할때까지는 어울려 줄테니까."
무심한 듯한 어조로 그녀는 중요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어 버린다.
"졸업할 때까지라니.. 앞으로 2년은 더 남았잖아? 나야 그리 싫지는 않지만 그런 건 좀.. 네가 들어야 할 수업도 있을거고.."
"하기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 하면 돼. 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 뿐이니까. 이정도 수준의 문제들은 수업을 듣지 않아도 가르치는 데에는 문제도 없고."
'어련하시겠어.'
저런 축복받은 재능을 볼때면 신 따위는 없는 게 맞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치밀어 오른다. 전생에는 무신론자였던 기레스지만 신의 존재를 목격한 지금은 더더욱 이 불평등한 현실에 기가 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그 덕에 나는 환생 특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
살짝 비열한 웃음이 귓가에 걸리려 할 때, 클로에는 의문을 표하며 물었다.
"그런데 기레스 그러면 너는 지금까지 살면서 잘하는 게 단 한가지도 없었던 거야?"
조심스러운 기색도 없이 클로에는 직설적으로 기레스에게 물어온다. 그에 기레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머뭇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뭣?"
그 말에 클로에는 설마하니 기레스가 잘하는 게 있다고 대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언제나 냉정한 그녀 답지 않게 흠칫 놀란다.
"뭐냐? 그 반응은.. 나라고 해도 잘하는 것 한 두... 하나 쯤은 있다고."
"두개는 없는 거구나."
"쳇."
기레스는 눈을 돌리고 혀를 차면서 긍정 해버린다. 그렇게 죽을 맞춘 클로에는 전에 없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만년 열등생인 기레스의 유일한 특기라니 엄청 궁금한데? 기레스 네가 잘한다고 말할 정도니까 그만한 재능이 있다는 거겠지?"
"글세다?"
기레스는 심드렁한 반응을 해버린다.
"뭐야 그 말투는?"
"뭐라 말해야 할까. 일단은 확실히 인정을 받기는 했는데.. 한 사람 뿐이어서 말이지. 확신은 없다고 해야되나."
물론 그 한사람은 이미 기레스가 하라면 무엇이든지 해버릴 육노예가 되어 있다.
"뭐길래 그리 뜸을 들이는 거야? 어서 말해줘."
"내 특기는 말야.."
기레스는 살짝 뜸을 들이다가 클로에의 권유를 못 이긴 척 눈을 내리 깔면서 우물거리며 말했다.
"안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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