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클로에(9)
* * *
"저... 기레스."
쉬는시간 여느때와 다름 없이 책을 보고 있는 시늉을 하는 기레스에게 클로에는 말을 걸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면 수업이 끝나고 폐교된 구교사 쪽으로 나와줘.."
클로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레스는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통보하듯 말하고는 다시 골똘히 책을 보기 시작했다.
하루의 수업이 모두 끝나고 클로에는 구교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교사는 과거 전쟁이 끝나 지원을 받게 된 소피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임시로 교실로 사용했던 건물이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아 인적이 매우 드문 장소지만, 아직도 건물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클로에는 같이 가기 위해 수업이 끝나자 마자 달려 온 하일즈에게 적당히 둘러대고는 구교사로 향하느라 약간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다. 구교사의 입구에는 책을 펼치고 글자를 쫒고 있는 기레스의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열심히네.'
"기레스."
클로에가 말을 건네자 기레스는 보고 있던 책을 단숨에 접었다. 클로에가 언제 올까 싶어 재미도 없는 책을 훑는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슬슬 보는 척을 하는 것도 지겨우던 참이었다.
"왔나."
"도대체 왜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한 거야?"
클로에는 구교자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당연히 주변에는 단 한명의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본래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란 그런 것이다.
"여긴 사람이 없으니까 말야."
"사람이 있으면 어때?"
"있으면... 곤란하지.."
기레스는 말 끝을 살짝 흐렸다. 일전에 보여주었던 당당함이 느껴지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기레스의 몸은 또래의 남자들에 비해면 빈말로도 크다 할 수 있는 체격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더더욱 왜소해 보인다.
"그보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역시 일부러 나를 피해왔다는 거네?"
"당연하지."
기레스는 당연한 사실을 왜 묻냐는 듯 툴툴 거리며 말했다.
"어째서?"
"나같은 놈에게 네가 말을 걸게 되면 네가 곤란해 질거라 생각했거든.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피했는데도 이렇게 이야기를 걸어 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기레스의 자조 섞인 이야기에 클로에의 눈썹이 찡긋 거렸다. 이전이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을 말이지만, 연일 눈앞의 남자를 관찰해 기레스라는 인간을 알아버린 지금 클로에는 기레스에게 동정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기레스의 말은 정론이었다.
요즘은 같은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기레스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기레스에게 우호적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단언코 아니었다. 처음에는 소피아의 힘으로 괴롭히지 못하게 된 기레스와 친해지려는 시도를 하려는 아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들은 떨어져 나갔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다. 기레스라는 인간은 용모단정한 이세계인에 비하면 독보적으로 추해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고, 모든 성적은 밑바닥을 기고 있는 사람이다. 유페르 가문의 권력에 힘입어 힘을 사용하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못생기고 덜떨어진데다 바보같으며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인간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로 기본적인 첫인상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본디 기레스를 괴롭히던 무리들은 때로는 선생에게 때로는 부모에게 강압적으로 기레스를 괴롭히지 말라는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강제로 교정당한 그들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기레스를 향하고 있었다. 영악할대로 영악한 그들은 요컨대 기레스를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만 않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괴롭히려는 대상을 기레스가 아닌 어중간하게 기레스에게 접근하려 하는 학생들로 바꿔 버렸다. 본래 괴롭히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그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친해지라고해도 딱히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기레스일진대, 힘을 쥐고 흔드는 일진들에게 거역하면서까지 기레스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학교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물론 학교 최고의 권력을 지니고 있는 하일즈는 일련의 모든 일을 알고 있었으며,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을 말릴 생각 따위는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기레스를 괴롭히기 위해 날뛰라고 고사라도 지내주고 싶은 마음으로 하일즈는 그들의 만행을 너그럽게 묵인해 왔다.
그렇게 기레스는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냥 무시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걸 결정하는 건 나야."
"내게도 거부권은 있을텐데?"
"불쾌하다면 말해줘.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줄테니까."
"불쾌할..... 리가 없잖아...."
기레스는 여기서 더 간을 보게 되면 대쪽 같은 성격의 클로에가 관심을 끊어 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치 복받쳐 오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것 같은 어투로 클로에를 붙잡아 당겼다.
'아닌 척해도 역시 많이 힘들었겠지.'
고민을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잘 알고 있다.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한 초인인 자신도 바로 얼마 전에 누구에게도 고민을 말하지 못해 감정이 마모되어가던 경험을 이미 겪은 클로에다.
기레스의 고통은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라는 것을 '이제'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불쾌하지 않다면 나와 친구가 되어줘."
"친구라니?"
"말 그대로야. 기레스 너니까 아마 내가 첫 친구겠지?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기레스가 연기하는 모습을 본 클로에는 기레스도 은근히 고집이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3500만 에보나라는 거금을 강제로 주었다면 보통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정상이다. 정말 사소한 것이라도 좋고, 경우에 따라서는 큰 것을 바랄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레스는 자신에게 무엇 하나 바라지 않았다.
바라고 '싶은' 상황에 바래도 '되는' 입장임에도 그는 자신과 하일즈를 위해 단 한가지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보통의 고집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 고집있는 사람에게는 고집이 약이라는 것을 그는 하일즈와의 연애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뭐야. 친구가 되는 게 싫은 거야?"
클로에는 기레스를 몰아부치는 듯 묻는다.
"싫지는 않지."
기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현 상황에 수긍했다. 여기까지 와서 내뺄 이유 따윈 전혀 없다. 상황을 옭아 매고 엮어서 열심히 만들어 놓은 떡밥을 드디어 클로에가 물었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으랴.
"그럼 좋잖아?"
클로에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혹시나 돈을 빌려준 것을 신경 쓰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물론 돈도 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도 없는데 친구가 되자고 내가 말할 것 같아?"
'그런 성격은 아니지.'
기레스는 속으로 미소 지으며 클로에를 옭아 나갔다.
친구가 된다는 결과는 같아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어디까지나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은 '기레스'가 아니라 '클로에'라는 것을 천천히 클로에 본인의 입으로 각인시켜 나가는 것이다.
아주 작은 행위지만 이렇게 하나 하나 쌓인 클로에의 가치관은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끼리는 보통 뭘 하는 거지?"
"응? 그렇네. 그럼 일단..."
눈 깜빡할 사이에 기레스는 자신의 손이 허전해 진 것을 느꼈다. 분명 자신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할 두툼한 책은 어느샌가 클로에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친구가 바라는 것을 도와주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거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작은 구교사의 교실에 기레스 옆에 붙은 클로에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냐. 거기는 이렇게 가는 거지."
여름이 기운이 만연해 져서일까. 소피아와는 또 다른 단내를 풍기는 클로에의 체취를 느끼면서 기레스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아.. 음.. 이건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저 아리따운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아직 갈 길은 멀고 멀었다.
"그거야."
클로에는 정말 기레스가 생각해도 열정이 느껴질 정도로 열심히 기레스를 가르쳐 주었다. 재능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학생을 가르치는 게 본업인 교사보다 클로에의 설명은 훨씬 알아듣기 편했다.
그렇다고 해도 기레스의 머리는 이세계의 평균에 아득하게 못 미치기 때문에 단번에 많은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클로에와 공부를 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런데 클로에 이렇게 시간을 써도 괜찮은 거냐?"
"누구 덕에 밤에 일을 하러 갈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그래도 하일즈도 있고.."
"뭣하면 한동안은 기레스 널 가르친다고 말을 해두지 뭐."
"오늘 하루만 가르치는 게 아니었어?"
오늘 하루만 가르쳐 달라고 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지만 기레스는 짐짓 놀라는 척을 하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하염없이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럼 슬슬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할까?"
"잠깐 클로에. 한가지 부탁이 있어."
"뭔데?"
"친구가 되어준 것도 고맙고, 내게 이렇게 공부를 가르쳐 준 것도 좋지만 난 이 일로 네가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더 나아가서는 하일즈도 말이지."
그녀가 기레스를 관찰할 무렵에는 이미 기레스의 학교 내 고독은 완성되어 있었지만 클로에도 짐작가는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피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하일즈라면 몰라도 네가 렉스에게 맞설 수 있겠어?"
렉스는 일전에 소피아가 담판을 지을때 마지막까지 그녀와 맞서려 했던 데브람의 자식이다.
"그건.."
클로에는 자기 한 몸은 간수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개인으로 한정하고, 혼자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타인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을 때의 이야기었다.
렉스 하나라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렉스의 아버지인 데브람은 소피아에 의해 다소 힘이 꺽인 지금도 마을 내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력자였다. 반면 클로에는 도박중독자에 빚을 남기고 도망친 아버지에, 그 빚을 갚아나가기도 빠듯한 어머니, 그리고 보살펴 줘야 하는 아직 어린 동생으로 구성된 평균 이하의 열악한 가정에서 살고 있었다.
렉스의 곁에서 같이 활동하는 아이들의 가족들마저도 나름대로의 지위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본인의 능력 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클로에는 아예 부담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론 정말 클로에에게 해코지를 하려 든다면 기레스 이전에 하일즈가 가만히 둘 리가 없었지만, 지금으로선 그녀를 몰아세울만한 재료로 사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의 내용인 것이다.
"거기에 하일즈도 네가 나한테 신경을 쓰게 되면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게 될 거야. 운이 나쁘면 하일즈에게 부담을 지울 수도 있게 되겠지."
기레스를 괴롭히지 말라는 명령이 마을에 떨어진 한참 후에도 마지막까지 기레스를 괴롭혔던 것이 렉스였기에 클로에는 기레스의 말이 일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마 렉스가 정말로 그런 행동을 할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혹여 만에 하나라도 자신을 건드리려 한다면 반드시 하일즈는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소중한 사람에게 '빚을 지우는' 행위인 것이다.
"......."
"그래서 말인데 만약 아직도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이 일은 둘만의 비밀로 해주지 않을래?"
"비밀?"
"겉으로 아닌 척 해도 친구라면 친구겠지? 어차피 나야 이제와서 다른 아이들과 친구가 될 일도 없을거고, 혼자 노는 건 익숙하니까.."
할 말을 하면서도 클로에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을 잊지 않는 기레스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티를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난 친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친구흉내를 내지 않아도 서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걸로 좋은 게 아닐까?"
"아니 넌... 그걸로 좋은 거야?"
"이게 아니면 오히려 싫어. 난 너와 하일즈의 사이에 부담을 주느니 그냥 친구가 없는 쪽을 택하고 싶거든."
클로에도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일전 기레스가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에도 괴롭힌다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는 기레스를 딱히 구하려 들지 않았다.
기레스를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전의 문제다.
그녀는 그렇게 멋대로 행동해도 좋을 마음의 여유를 가질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후우.. 알았어."
결국 클로에는 기레스의 말을 받아 주었다. 고집을 꺾는 것은 더 큰 고집이다. 클로에는 기레스에게 보기 좋게 되로 주고 말로 받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기레스는 염원하던 클로에와둘만의 비밀관계를 얻게 된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