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클로에(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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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에에게 돈을 전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봄기운이 완연해 질 무렵. 기레스는 한껏 신이 난 하일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을 괴롭힐 때도 그렇지만 기레스는 하일즈가 참 알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기레스는 따로 클로에를 찾아 가지 않아도 그녀가 어머니의 일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기레스의 도움을 받은 클로에의 삶은 이전의 나날로 돌아왔다. 여전히 어머니는 일을 나가야만 했고, 클로에도 아직 어린 동생을 돌보며 남는 시간은 어머니를 도와야 하는, 빈말로도 편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은 아니었지만 되돌려 받은 그 삶은 분명 그녀에게는 둘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클로에는 그날 이후 기레스가 돈을 빌려준 것을 빌미로 접근하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기레스는 전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안녕. 기레스."
학교 내에서 살짝 마주쳐 인사해도 기레스는 살짝 고개를 꾸벅일 뿐. 클로에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딱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돈을 빌려주기 전의 서로 일면식만 있었던, 클로에의 말을 빌리자면 타인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넘어 며칠이 지나가면서 클로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기레스를 흝고 있었다.
비록 하일즈 때문이었다지만 자신을 구하는 데 3500만 에보나라는 거금을 선뜻 내어주었으면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듯한 기레스의 모습은 역으로 클로에에게 관심이 생기게 만들었다.
'하일즈의 형이기도 하니까..'
클로에는 기레스를 향한 관심을 애써 그렇게 포장했다.
이전까지는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 사람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다.
기레스는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주었지만 클로에라는 여자는 그런 인간이 아닌 것이다. 애초에 클로에가 돈을 받고 입을 싹 닦을 수 있는 요령좋은 여자였다면 기레스의 돈을 그토록이나 고지식하게 거절 했을리가 없다.
'평소에는 뭘하고 사는 걸까?'
괴롭힘을 당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기레스가 전교생에 이어 교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을 단위의 따돌림을 당했다는 사실은 마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창 때는 클로에도 빈번하게 기레스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을 정도로 기레스의 괴롭힘은 마을의 뿌리까지 박혀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갑자기 괴롭힘이 사라져 버렸지. 그러고 보면 엄마가 기레스를 괴롭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꽤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클로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기레스에 대해 물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기레스를 괴롭히지 말라고 당부하셨지.'
클로에는 줄곧 괴롭힘은 당하는 쪽이 한심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다만 괴롭힘을 하는 것은 더더욱 질색을 하는 인간이었기에 어머니에게는 괴롭히지 않는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날을 기점으로 학교에서 기레스가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요즘은 괴롭히는 사람은 없다고 듣기는 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그 진위는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전 같았으면 자신의 눈앞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쿨하게 지나쳤을 클로에지만 제멋대로 빚을 짊어진 지금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아직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는 않겠지?'
기레스가 다니는 학교는 학년의 구분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수업과 선택적으로 배워야 할 수업이 구분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익혀야 할 필수적인 수업으로 일정을 짜게 되지만, 점점 나이를 먹게 되면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는 수업의 종류가 많아지게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선택적인 수업은 딱히 학년의 구애를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클로에는 기레스를 관찰해 보기 위해서 자신의 수업 일정을 기레스에게 맞추어 보았다.
같은 반에 들어 왔음에도 기레스는 클로에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마주쳐도 클로에가 먼저 인사를 하지 않으면 무시하기 일수여서 클로에는 자신에게 돈을 건네 주기 위해 돈을 불태웠던 그 기레스와 이 기레스가 동일인물이 맞나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
'쌍둥이가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머릿속에 품을 정도로,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그 날 보여준 기레스의 모습과 학교에서의 온도차는 극심했다.
"클로에 왜 이런 과목을 듣고 있어?"
쉬는 시간이 되자, 클로에는 자신을 만나러 온 하일즈와 담소를 나누었다.
"응. 조금 이 과목에 관심이 생겨서."
'기레스에게 흥미가 생겨 관찰해 보고 싶어서'라고 남자친구에게 말할 수는 없다. 딱히 기레스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것은 아니기에 떳떳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 미리 말했다면 같이 들었을 텐데.."
"하지만 하일즈는 이런 수업에 관심 없잖아?"
이미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 온 클로에는 하일즈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하일즈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거야 그렇긴 하지."
클로에에게 인정받아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하는 하일즈의 시선에 기레스가 들어온다. 클로에와 별로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앉아 있는 기레스는 쉬는 시간이었음에도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가면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미 수년 간 기레스와 지내온 하일즈는 기레스의 성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기레스라는 인간은 뭘 해도 실패하는 인간 그 자체로 몸이면 몸, 머리면 머리, 세상에 이런 바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구제할 길이 없는 무능력한 머저리였다.
'재활용도 못하지. 저런 놈은..'
지금은 소피아 때문에 사이좋은 동생을 연기해 주고 있지만 기레스의 낑낑거리는 답답한 모습을 보자 그의 속은 불쾌함으로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쉬는 시간도 곧 끝나가니까 나는 돌아가 볼게."
"하일즈. 기레스에게는 인사 안해?"
지금까지 기레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클로에가 그런 말을 해오자 하일즈의 기분은 착 가라앉았다.
"어차피 집에가면 질리게 볼 얼굴인데 굳이 여기서 인사를 할 필요는 없잖아? 형도 딱히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기레스와 자신이 학교에서 친근하게 인사하는 것을 상상한 하일즈는 속으로 질색을 하며 손서리 쳤다. 소피아의 앞에서 보여주기 위해서 라거나,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 몰라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이런 상황에는 곧 죽어도 하일즈는 기레스에게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하필 클로에와 같은 수업을 들어서는.. 하나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인간이라니까.. 정말 눈앞에서 사라져 주면 소원이 없을텐데.'
'하일즈는 기레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건가?'
클로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기레스를 욕하는 하일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창 하일즈와 사귀고 있을 무렵에도 하일즈는 기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일즈가 이따금씩 기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도 대부분은 기레스를 욕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던 것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기레스를 관찰한 결과, 그녀는 기레스가 현재는 딱히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괴롭힘 이전에 기레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도 없었다.
클로에는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외모와 재능 때문에 은근히 친해지고 싶어하는 이들은 많았다.
클로에 외에도 반에는 많은 학생들이 저마다 끼리끼리 친하게 지내고 즐거운 학창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그 많은 학생들 중에 기레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친구는 없음.'
기레스는 언제나 열심히 공부한다. 수업 중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에도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열성적으로 공부하기 바빴다.
'열심히 공부함.'
기레스는 반의 모든 학생들 중에서도 기레스만큼 공부하는 이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언제나 기레스에게 돌아오는 것은 꼴찌라는 성적표였다.
'그럼에도 성적은 바닥임..'
그렇게 클로에는 기레스가 '흘리고 있는' 정보를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해 나갔다. 그렇게 기레스를 알아가는 사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기레스를 동정하고 있었다. 유페르 가문의 자식이라고 해서 마냥 즐거울 줄만 알았던 기레스의 삶은 빚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보다도 불행하게 보일 정도로 안쓰러웠다.
기레스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얼굴은 누가봐도 빈말로도 잘생겼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 몸을 쓰든 머리를 쓰든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과목이든 꼴찌를 벗어나지 못한다.
딱히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서 밀린 것도 아니다. 아예 수업 시간에 대놓고 퍼질러 자는 아이들이 있는데도 기레스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꼴찌라는 성적표였다. 비단 전생이라고 다를까마는, 재능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 세계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잔혹한 현실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들이 있어 학교에 오는 낙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항상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관심을 보여오는 무리들로 가득해 딱히 친구 부족한 줄 모르고 살았던 클로에는 언제나 혼자인 기레스가 묵묵히 고독을 버텨 나가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여기까지가 '괴롭힘이 사라진 후'의 일이다.
'괴롭힘을 당할 때는 어떻게 버텼던 걸까?'
그녀는 괴롭힘에 저항하지 못한다고 한심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자신은 혼자서도 괴롭힘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기레스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는 현실을 그녀는 기레스를 관찰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저래서 부모한테 괴롭힘을 못 말한 걸지도.....'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클로에가 기레스의 깊은 뒷사정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게 클로에는 몰래 기레스를 관찰해 나갈때마다 하나 하나 멋대로 착각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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