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클로에(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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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은 힘이다.
기레스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 부족분 만큼의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소피아를 손에 넣은 지금 클로에를 손에 넣기 위한 첫번째 조건인 '돈'의 문제는 가볍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기레스는 그 다음 이 돈을 어떻게 클로에에게 전달할까의 문제에 봉착했다.
기레스는 클로에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클로에라는 여자를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을 통틀은 경험과 지금까지 차곡차곡 기레스에게 쌓아 올려온 정보는 클로에가 어떤 인간인지를 기레스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요 며칠 사이 기레스는 소피아에게 클로에의 어머니가 걸렸다는 병에 대해 조사해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레스는 클로에의 어머니의 병이 시기를 놓쳐, 치료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게 되었지만, 딱히 당장 위급해질 병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인가 아닌가의 차이는 매우 크다. 당장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목숨이 위험하다 한다면, 아무리 고지식한 클로에라도 기레스의 돈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협박을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돈에 얽메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소나마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클로에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인간을 백명 정도 가져다 놓고,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차용증도 필요 없으니 이 돈을 가져가도 좋다고 한다면, 아마 한사람도 남김 없이 돈을 가져갈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이지만, 클로에는 다르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이 해결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타인의 손은 물론 가까운 사람의 손조차도 빌리길 꺼려하는 사람이다.
오늘 클로에를 만나기 전까지, 기레스는 그렇게까지 고지식한 이유가 빚 때문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직 어머니의 상태가 위중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클로에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한 자신의 돈을 빌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어한다. 설사 빚이 아니라고 말해줘도, 자기 자신이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도 빚을 지고 싶지 않다.' 그녀의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함의 근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클로에에게 기레스는 그녀 스스로가 시인했듯 지나가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얼굴만 알고 있을 뿐인 완벽한 타인이라는 게 클로에가 생각하는 기레스의 현 지표였다.
그렇기에 기레스는 생각보다 쉽게 그녀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지만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클로에가 타인인 자신이 주는 돈을 선뜻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클로에기에, 기레스는 돈으로 협박을 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부터 돈을 받을 생각이 없는 클로에에게 그런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풍겼다면 기레스는 그녀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기레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돈에 불길이 붙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기레스의 표정은 추위 속에서 자작자작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 보는 것마냥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클로에는 불이 붙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들어자신의 손으로 불의 근원지를 눌러 불길을 차단해 버렸다..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작은 그을림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무슨 짓을 하는 건데? 나는 필요 없어진 돈을 버린 것 뿐인데.."
"웃기지 마. 이 돈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모르는 거야?"
평정을 가장한 듯 냉랭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려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자신은 당장 이 돈이 없어서 인생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데 기레스는 그 돈의 가치조차 알지 못한 것처럼 피같은 돈을 태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속에서는 분노감 마저 끓어 오를 정도였다.
"알아."
"아는데 태운다고!?"
"그래. 처음부터 이 돈의 용도는 정해 뒀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한정품을 사러 온 수집가는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어. 네가 돈을 받지 않을까봐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한정품이라는 건 한정이면 한정일수록 가치가 있는 거야. 그 수집가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한정품을 모으는 인간이니까 그다지 물건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거지. 다행히 그 수집가 만큼의 애착은 없어서 파는 걸 주저하지는 않았지만 말야. 사실 당장 돈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딱히 돈을 받고 팔 이유도 없었어."
기레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허구의 설정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발라 먹듯 알뜰하게 사용했다.
"나는.... 팔아달라고 한 적 없어.."
클로에는 기레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아 약간 주눅든 말투로 대꾸했다. 팔지 않아도 될 물건을 구태여 '자신 때문에' 팔았다는 이야기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무거운 족쇄가 쌓여 나간다.
"그래. 하지만 나는 이 돈의 사용은 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는데 쓰기로 결정 했었거든."
"뭘 멋대로 정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동의를 구하러 온거잖아? 그리고 클로에 '네가' 거절했으니 이 돈은 가치가 없어졌진거고.. 처음부터 이 돈은 병을 고치는 마법을 사지 못한다면 다른데 사용할 생각은 없었어. 그러니까.."
기레스는 두번째 불꽃을 만들어서 돈을 향해 던졌다.
"사용처가 없어진 돈은 없앤다는 거지."
기레스가 돈뭉치를 향해 던진 불똥은 클로에의 손에 막혀 버렸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이 돈을 날리면 후회하게 될 건 너야."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건 너겠지? 클로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서 저렇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와중에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그냥 준다고 하는 돈도 마다하고 있는 게 누구지?"
"그건..."
기레스의 정론에 클로에는 말문이 막혀 반박하지 못했다.
'기레스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애였나?'
"거기에 네가 받지 않은 돈을 내가 어떻게 하든 그건 내 자유야. 그걸 네게 간섭 받아야 할 이유는 없어.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돈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지."
'으읏.'
클로에는 기레스의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기레스의 돈은 확실히 기레스의 것이다. 그가 돈을 가위로 오려서 비행기를 만들든, 태워서 모닥불을 만들든, 어딘가에 시설에 기부를 하든, 아니면 이곳에 버려두고 가든 자신이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알았으면 비켜.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워줄까?"
"정말 태울 생각이야?"
"말했잖아. 받지 않으면 태운다고."
기레스의 말은 억지 투성이다. 하지만 그 억지에 행동이 따른다면 그건 억지보다는 신념처럼 느껴진다. 클로에는 팔짱을 낀 채 설마 하겠어? 하는 표정을 짓고 기레스가 불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기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법을 사용해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돈을 향해 내던진다.
묶여 있는 돈다발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자 클로에의 속도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단순히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젠장.."
작게 클로에는 평소에는 쓰지 않는 말을 중얼 거린다. 기레스는 그런 고뇌하는 클로에를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나 때문에..'
그녀가 후회하고 있는 것은 기레스를 순수하게 타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기레스를 떼어 놓으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한 말이 여기까지 올 것이라고 그녀는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기레스가 3천만을 마련해 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턱이 없었지만, 자신이 가볍게 사연을 말해 버린 것 때문에 생겨버린 이 결과에 그녀는 지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레스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 돈을 건네려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기레스가 자신의 사연을 들었기 때문에 굳이 팔 필요도 없는 한정품을 팔았다는 말을 듣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마련해 온 소중한 돈을 자신이 '거절'했기 때문에 이렇게 태운다는 사실도 알아 버렸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취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행동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만은 명백한 것이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가 아닌 기레스에 의해 강제적으로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쌓여 있던 돈다발 한덩이가 거의 타자 기레스는 재가 되어 가는 지폐의 불의 씨를 살려 다음 돈을 향해 가져갔다. 이대로 자신이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다면 기레스는 저 거금을 전부 태워먹을 게 틀림이 없어 보였다.
"아깝네. 받아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스스로 아깝다고 말하면서도 기레스는 돈을 태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기레스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아 그의 돈을 거절했던 클로에는 그 거절 때문에 역으로 기레스가 벌이는 이 행동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재밌지? 빚을 지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빚이 생기는 건.. 그나저나 진짜 안 받을 건가.'
사실은 기레스도 속으로 상당히 애가 타고 있었다. 돈이 아깝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연기다. 클로에의 말처럼 돈은 다다익선이라고 있어서 나쁠 것이 없는 물건이다.
아무리 소피아를 이용해 유페르 가문을 지갑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보존할 수 있는 돈은 보존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3500만 에보나라는 돈은 클로에를 손에 넣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전혀 아깝지 않은 돈이지만 이렇게 홀라당 태워 먹을 돈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기레스라고 해도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우는 것은 멈출 수 없다. 클로에가 망설이고 있는 지금 기레스는 더욱 더 망설임 없이, 클로에가 받아 주지 않는 이 돈은 자신에게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설사 수중에 있는 돈 전부가 덧없이 재가 되어 흩날리더라도 이 치킨게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기레스는 완전히 돈을 다 태울 작정을 한 사람처럼 불덩이를 준비했다.
"그 그만둬.."
그제야 클로에는 참지 못하고 기레스의 행동을 제지했다.
"하지만 받지는 않을 거잖아?"
기레스는 준비한 불덩이를 보란 듯이 던지며 말했다. 클로에는 돈을 향해 날아드는 그 불덩이를 손으로 낚아 채 그대로 바닥으로 내팽겨 쳐 버렸다. .
"알았어 알았다고.."
"응?"
"받을테니까. 그럼 태우지 않는 거지?"
"정말이야?"
"그래. 어차피 받지 않으면 다 태워 먹을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
기레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보나가 불에 타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날리며 사라지는 것을 본 클로에는 생각했다. 이것은 모두가 손해를 보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자신은 이미 기레스에게 빚을 졌다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기레스가 자신을 돕기 위해 한정품까지 팔아 마련한 그 돈은 아무런 가치 없는 검은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린다. 자신의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소중한 가치를 지닌 돈은 신기루마냥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어머니도.. 기레스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누구하나 만족하지 못하는 최악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그녀는 도저히 바라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받으나 받지 않으나 빚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받는 쪽이 이득이다. 최악보다는 차악이 나은 것이다. 어차피 주겠다고 노래를 부른 것은 기레스쪽이었으며, 돈을 받는다면 자신의 어머니의 병도 쉽사리 해결될 것이다. 남는 것은 그녀의 트라우마로 생긴 빚이라는 족쇄 뿐이지만, 그마저도 기레스는 빚이 아니라 그냥 주는 돈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받아야 할 이유는 넘쳐 나지만 받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 하나 찾을 수가 없는 이 상황에 클로에는 결국 포기하고, 기레스의 돈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받을거면 좀 더 빨리 받지."
불타버린 돈의 재를 보면서 기레스가 툴툴 거린다.
"한 덩이에 500만 에보나 였으니까 그쯤 날아가 버린 건가."
기레스의 말 하나 하나가 클로에의 가슴을 쿡쿡 찌르고 들어 온다. 클로에가 두 세 달은 열심히 허리띠를 조르고 모아야 할 정도의 거금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아까우면 태우지를 말던가."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말투에는 어딘지 툴툴 거리는 불만의 기색이 깃들어 있다.
"그것도 그렇네."
그렇게 말하고 기레스는 나무 옆에 벗어둔 가방을 향해 걸어가 돈 뭉치를 들고 와서 한데 모았다.
"이걸로 3천만 에보나야."
"무슨 소리야. 방금 3천만 에보나에서 500만을 태웠다고 했으니까 2500인게.."
"사실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한정품을 팔아서 번 돈은 3500만 에보나 였거든. 어차피 마법은 3천만이라고 했으니까 굳이 500만을 줄 필요는 없어서 미리 빼둔 거였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클로에는 마치 기레스가 이렇게 될 줄 계산이라도 한 것만 같은 찝찝함에 미심쩍은 눈으로 기레스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어 버렸다. 기레스가 자신에게 돈을 주면 이득을 보는 것은 기레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뿐인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학교에서 보여주던 기레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가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로에는 낑낑 거리면서 불에 타지 않은 돈을 건져 모으는 기레스를 보면서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면서 내게 돈을 주는 거야? 그 날 만나기 전까지는 완벽한 타인이었는데.."
클로에는 자신이 이미 기레스를 타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타인인가.."
기레스는 재가 끼얹어진 지폐를 흔들어 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클로에 너 하일즈가 얼마나 좋냐?"
"갑자기 하일즈는 왜?"
기레스의 뜬금없는 질문에 클로에는 질문으로 반문했다.
"그냥 장난 삼아 사귀는 거야?"
"그럴 리 없잖아. 어느정도 진지하게 사랑하고 있어."
기레스의 말투에선 다소 도발끼가 느껴졌지만 클로에는 기레스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진지한 얼굴로 그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야?"
"이 돈이 쓸모 없지 않게 되서 말야. 형인 내가 이런 자리에서 말할 내용은 아니지만 하일즈는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거든. 결혼도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지."
"겨 결혼..?"
시원하게 표정변화 없이 문답을 주고 받던 클로에의 얼굴이 순간 홍당무처럼 물들었다.
"뭐야 클로에 넌 아니었던 거야?"
"아니.. 나도 아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세계 사람들의 결혼 적령기는 자유로운 편이다. 빨리 결혼한다고 질타의 시선을 보내지도 않고 반대로 짝이 있다면 늦는다고 한심하게 생각하지도 않아서 성인이 되자마자 식을 올리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서로 그 정도로 좋아하고 있는데 이런 일로 너와 하일즈가 헤어지는 것은 싫었거든. 타인이라니 당치도 않지. 나는 제수 씨가 될지도 모르는 가족을 도운거다 그리 생각하고 있어.."
기레스는 어디까지나 하일즈의 형으로서 클로에를 도왔음을 강조했다. 뜬금없이 자기 자신이 돕겠다고 나서면 흑심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하일즈를 중계삼게 되면 클로에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제수씨라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 받아."
기레스는 가방 안에서 꺼낸 보자기로 돈을 묶어 클로에에게 전해 주었다. 클로에는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돈 무더기를 보며 기레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아.. 늦었지만.. 고마워."
"고마우면 그만큼 하일즈에게 잘 대해줘."
마지막까지 하일즈의 사랑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기레스다.
"상당히 동생을 아끼는 모양이네."
"이래뵈도 형이니까.. 아.. 말하지는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오늘 일은 하일즈에게는 비밀이야."
사실 원수 저리 가라할 정도의 사이였음에도 기레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우애 깊은 형을 연기해 나간다. 클로에도 자신이 술집에서 일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는 간다."
볼일은 끝났다는 듯 기레스는 시원스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뒤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