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클로에(6)
* * *
"그런데 기레스. 정말 내가 클로에를 목표로 하지 말라고 한다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소피아는 기레스의 말을 다시 한번 듣고 싶은 마음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
기레스는 툴툴거리면서 대답했다.
"어째서..? 나는 이런 아줌마에 불과한데.."
그런 말을 하는 소피아의 얼굴에는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미소로 가득차 있었다.
"설마 너 자신이 클로에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기레스의 그 말에 소피아는 토끼눈을 하며 놀란다. 명백하게 자신이 클로에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반응인지라 기레스는 기가 차서 물었다.
"소피아 내 얼굴은 어떻게 보여?"
"음... 기레스의 얼굴은 멋있지.."
소피아는 욕정에 푹 잠긴 눈빛으로 그윽하게 기레스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빈정거린다거나 예의상이 아닌 누가봐도 진심이 뚝뚝 묻어져 나오는 표정이다.
"아니! 아니잖아. 못생긴 거잖아."
"못생기다니! 기레스는 조금 쭉 째졌다거나 그런 느낌이긴 하지만 그런 게 더 희소성 있어 보여서 멋있지 않아?"
이미 그녀의 모든 사고는 기레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레스가 '내 자지는 어때?'라고 묻는다면 '작아서 좋아!'라고 소피아는 진심을 담아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그녀에게는 못생긴 얼굴이나 작은 육봉이라는 사실보다 기레스가 우선이었다.
'자기 객관화가 전혀 안되는 수준이구만.'
"그럼 네 얼굴은?"
그렇게 탐탁잖은 눈으로 소피아를 위 아래로 훑어 가늠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기레스를 보면서소피아는 조심스레 항변하듯 말했다.
"나도 그렇게 나 자신을 낮추는 건 아니야. 나름대로 외모에는 자신이 있다구. 그 왜 있잖아. 여행을 갔을 때, 나를 꼬시려 한 사람도 있었고 말야."
"그래도 그 정도 자각은 있는 모양이지?"
소피아가 아무리 자기 자신을 낮추려 해도 소피아의 외모는 그런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클로에한테는 안되지. 응. 응. 그 아이는 앞으로 지금보다도 더욱 아름다워 질테니까."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 혼자 제멋대로 납득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이제 지는 일만 남아 버렸는 걸."
"그래서 내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응."
소피아는 수줍어 하며 대답했다. 기레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까 내가 멋지다고 했었지?"
"그렇지. 기레스는 마음에 안들지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도 나는 기레스의 그 얼굴이 좋아."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기레스는 보기 좋게 소피아의 말을 그대로 돌려 주었다. 필요하다면 거짓말 따위는 얼마든지 말하는 기레스지만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읏."
기레스의 그 말을 들은 소피아의 얼굴을 홍당무처럼 물들었다. 쾌락에 의해 한껏 몸과 정신이 한껏 조교된 소피아는 딱히 몸을 섞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녀는 기레스의 말에 평생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두근거림을 느끼게 되었다.
기레스도 소피아의 그런 소녀같은 반응은 또 처음이었는지라 그녀의 색다른 매력에 섬칫 놀랐다.
'저런 얼굴도 지을 수 있는 건가?'
"쳇."
소피아가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근 들뜬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기레스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새콤달콤한 감각은 자신을 무디게 만든다. 여자는 성욕을 처리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단 한번도 벗어나 본 일이 없는 기레스에게 이런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뭐 그런거야. 걱정할 시간이 있다면 내가 고개를 돌리지 않게 노력이나 하라고."
"응. 그럼 우선은 3천만 에보나부터 준비해야겠네."
"3500만으로 부탁해."
"맡겨만 둬."
난데없이 기레스는 500만 에보나라는 거금을 늘려 버렸지만, 소피아는 반박하나 없이 기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소피아는 돈을 마련해 기레스에게 가져왔다. 깔끔하게 소피아는 지폐로 돈을 쌓아 묶어서 정리해 두었다. 기레스는 그 묶인 돈뭉치를 슬쩍 들어 보았다.
'묵직한데..? 고작해야 3500만 에보나 주제에...'
"괜찮아? 기레스?"
"어. 조금 무겁긴 하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니까."
'좀 더 비싼 화폐를 사용해도 되었을텐데 어째서 1만 에보나로 달라고 했을까?'
그런 의문을 품었지만 소피아는 기레스가 특별히 요구했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말해야 하는 일이라면 기레스가 알아서 말을 해주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레스 그런 돈을 클로에가 있는 곳에 들고 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가방에 넣어갈 거니까 문제 없어. 설마 내 가방에 3500만 에보나가 들었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까."
"음.. 기레스가 그렇다면야."
"그보다도 소피아. 그 항상 사용하는 마법에 대해 알고 싶은데. 나도 사용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한번 사용해 볼래?"
소피아는 언제 준비했는지 기대에 찬 시선으로 잽싸게 피임 마법이 담긴 종이를 어딘가에서 꺼내 들었다.
"이건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 거야?"
기레스는 소피아의 가는 손가락에 걸린 종이를 건네 받으며 물었다.
"각 마법에는 명칭이라는 게 있거든. 그게 마법의 시동어야. 예를들어 일전의 가이아스 같은 경우는 가이아스라고 말하면 마법이 발동 되겠지? 속으로 해도 되긴 하지만 보통은 입 밖으로 내는 게 효과가 좋아."
"이건.."
기레스는 피임 마법의 상단에 '포룬'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포룬."
마법의 이름을 말하자 기레스는 자신의 몸 안에서 종이로 무언가가 빨려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정액을 한 사발 쏟아낸 것처럼 나른한 느낌을 받으며 기레스는 반짝이는 피임마법이 발동될 것을 확인했다.
"후우.. 지치는걸. 용케도 이런 걸 연달아 사용했네."
"응? 으응."
소피아가 말 끝을 흐리는 것을 보고 기레스는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소피아는 별로 안 지치는 모양이지?"
"사실... 그런 마법으로 지치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되나.."
기레스가 상처는 받지 않을까 소피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소피아가 기레스 위주의 사고를 하고 삶의 중심처럼 생각한다고 해도 이런 객관적인 사실마저 콩깍지를 씌울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불한당들의 무덤이라 불릴만 한 세상이구만.'
이제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기레스는 가볍게 자신의 빌어먹을 재능을 한탄했다.
'어쨋든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기레스는 돈뭉치를 바라보며 야심찬 미소를 지었다.
"후우..."
술집의 일을 마치고 클로에는 축 처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확실히 벌어들이는 돈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터지는 성희롱에 그녀의 심신은 상당히 피곤해져 있었다.
'일을 바꿔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남성 손님들은 많아져 갔다. 클로에는 그저 종업원일 뿐이지만, 그녀의 외모는 단순히 일개 종업원 수준이 아닌 것이다. 성희롱도 문제지만 마을 내에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기에 클로에는 향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을 바꾸게 되면 생활비와 마법을 구할수가...'
그런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이제는 살짝 낯익은 목소리가 클로에의 집쪽 방향에서 들려온다.
"이제야 왔구만."
"기레스?"
"오랜만이네."
"이제 내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텐데?"
"그랬지."
"그런데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가뜩이나 일 때문에 걱정인 그녀는 가시 돋친 말투로 기레스를 쏘아 붙혔다.
"아니아니. 잘 생각해 봐. 나는 그때 신경 쓰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그냥 하일즈에게는 비밀로 해두겠다고 했지."
클로에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딱히 네 의견을 물은 게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어."
"아 그랬구나. 내가 조금 눈치가 없어서.. 거기까지는 몰랐어."
기레스는 헤실거리면서 어벙해 보이는 연기를 하며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서? 여기 온 이유가 뭐야?"
"아.. 그건 말이지. 네게 이걸 줄까 해서.."
그제야 클로에는 기레스가 등 뒤에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밤중에 뭘 들고 온 걸까?'
기레스는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돈 뭉치를 하나 둘 꺼내 바닥에 조심스럽게 놓아 두었다.
"뭣..."
바닥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금에는 클로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000만 에보나야. 이거면 어머니의 병을 낫게할 수 있는거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무슨... 이런 거금은....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자신의 눈앞에 놓인 돈뭉치에 클로에는 감정의 동요를 숨길 수 없었다. 클로에의 의문은 당연하다. 3000만 에보나라는 돈은 다 큰 성인들도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아직 학생의 나이에 열등한 인간으로 유명한 기레스가 마련할 수 있는 돈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이야기 하자면 긴데.."
기레스가 운을 띄우며 적당하게 준비해 둔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클로에는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그럼 됐어. 어차피 받지 않을거니까."
클로에는 쌓인 돈을 보면서도 냉랭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기레스는 그녀가 그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의문을 표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 당연하잖아. 그런 큰 돈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받을 수 없다니..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면서.. 돈이 급한 것 아니었어?"
"바로 돌아가시는 병은 아니야 상태가 더 악화될 리도 없을거고.. 내가 노력하기만 하면 해결.... 할 수 있어."
클로에의 머릿속에는 잠시 술집에서의 성희롱이 떠올랐다. 이미 마음은 벼랑 끝까지 몰려 있었음에도, 그녀는 기레스의 돈을 받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왜 받지 않으려는 거지?"
"너도 그냥 돈을 주려는 건 아니잖아? 나는 이 세상에서 빚을 만드는 게 제일 싫어."
'그런가.'
기레스는 그녀가 어째서 그렇게도 고지식하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 하는지 깨달았다. 어렸을 무렵부터 아버지에 의해 남겨진 빚이라는 짐은 그녀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게된 것이다.
"그럼 그냥 줄게."
"농담 하지마."
"농담이 아냐. 어차피 이건 나도 날로 먹은 돈이라서.. 아까 어떻게 구했는지 물어봤지? 실은 나는 한정품을 용돈을 가지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데 말야. 예전에 구해둔 물건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 되었다지 뭐야."
"뭐야 그게?"
클로에는 중간이 생략된 기레스의 두서 없는 말을 꼬집는다.
"무슨 사고가 났다나 뭐라나.. 그래서 다른 수집가가 수소문을 했는지 나를 찾아와서는 거금을 주고 그 물건을 사고 돌아가 버렸던 거야."
기레스는 하일즈에게 둘러댄 변명을 적당하게 각색해서 클로에에게 사용했다. 기레스가 적당히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지만 클로에에게 그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거기에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분명 눈앞에 놓인 돈은 진짜인 것이어서 클로에는 의심쩍어 하면서도 어느샌가 그런 신기한 일도 있는가보다 하며 쿨하게 납득해 버렸다.
"그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라서.. 이 돈은 내게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중요하진 않다는 거지. 딱히 쓸 곳도 없었는데 네가 생각난 거야. 딱히 갚지 않아도 되니까 받아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됐어."
"어째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돈이라는 것은 중요한 거야. 설사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건 분명 세상물정 모르는 네 착각인 거야. 내게 그 돈은 너무 무거워. 아마 그 돈을 받게 되면 설사 네가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네게 그만큼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기레스는 자신의 인생을 감당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클로에가 어딘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클로에라는 인간과 기레스라는 인간은 생각하는 근본적인 자세가 완벽하게 상극이지만 말이다.
"그럼 이 돈은 받지 않는 거지?"
"그래."
편한 길을 내버려 두고 어려운 길을 택할지라도 클로에는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결코 '자신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그녀를 속박하는 저주와도 같았다.
"그럼 이 돈은 쓸모가 없어졌네."
"좋아하는 한정품이라도 모으는데 쓰면 될 거 아냐?"
클로에는 그렇게 기레스의 말을 받아 주었지만 기레스는 그녀의 말을 흘려 듣고는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마법?'
클로에는 기레스의 손가락 사이에 낀 종이가 마법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뭘 하려는 걸까?'
기레스가 시동어를 외우자 기레스의 손가락에는 작은 불덩이가 성냥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피어 올랐다.
'에이 설마..'
클로에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기레스는 일절 망설임 없이 그 불덩이를 쌓여진 돈뭉치를 향해 보기 좋게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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