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클로에(5)
* * *
"내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 알겠지?"
클로에는 눈을 내리 깔며 말했다. 3000만 에보나라는 돈은 확실히 큰 돈이다. 물론 유페르 가문 사정상 못 내어줄 정도로 큰 돈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젤가나 소피아의 경우다. 아직 변변찮게 돈을 벌지도 못하는 자식에 불과한 하일즈가 3000만이라는 돈을 융통할 수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부모의 손을 빌린다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200이나 300도 아닌 3천만이라는 돈을 고작해야 사귀는 사람일 뿐인 사람에게 선뜻 내어줄 부모는 흔치 않다.
그녀는 그런 짐을 하일즈에게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국에..'
클로에는 호기 좋게 빚을 갚아가면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약을 구하기 위해 일한다고 했지만 3천만이라는 돈이 그리 쉽게 모일 리는 없었다.
말하는 것을 보면 이미 클로에의 어머니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는 것은 클로에의 가정에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클로에 밖에 없다는 것인데 생활비뿐 아니라 빚을 갚아 나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3천만 에보나를 모으는 게 쉬울 턱이 있을까.
"그러니 이제 상관 하지 말아줘."
'그럴 수는 없지.'
"일단 사정은 알았으니 하일즈에게는 비밀로 해둘게. 위로는 안되겠지만 힘내라."
기레스는 진중한 분위기를 날려버릴 것 같이 가볍게 인사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기레스! 도대체 이 밤중까지 어딜 갔다 오는 거니!"
집에 돌아 오자마자 소피아의 성난 목소리가 벽력같이 기레스의 피부를 때렸다.
"으읏!?"
"이 밤중까지 오지 않아 걱정했잖아!"
기레스가 돌아온 것을 보고 안심했는지 소피아의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져 나왔다. 시간을 보면 이미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다. 평소 별다른 친구도 없어 해가 지기 전에 들어오기 일쑤인 기레스가 이 시간까지 밖에 있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기에 소피아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 봐. 소피아 별 일 없을 거랬잖아. 어이 기레스 일찍일찍좀 다녀라. 소피아가 임신한 몸으로 널 찾으러 나가려 했었다고."
"그러게 저를 보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일즈. 너도 이 시간에 싸돌아 다니는 건 위험하잖니."
하일즈는 톡 쏘아붙히며 질책하는 소피아의 말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았기에 그다지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형. 아직 쌀쌀한데 어딜 갔다 온 거야?"
"가지고 싶었던 한정 물건이 들어온다고 해서 가봤더니 아직 안들어 왔더라고.. 그런데 오늘 늦게나마 들어 온다고 들어서... 그걸 조금 기다리느라.."
하일즈의 질문에 기레스는 특유의 저자세적인 어눌한 말투로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들고 있잖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결국 물건이 도착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거야."
기레스는 이렇게 아무 말이나 적당히 둘러대도 걸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일즈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소피아에게 잘 보이기 위한 척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클로에가 그러했듯이 하일즈에게 기레스라는 존재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거슬리는 돌덩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도 돌덩이가 거슬린다고 해서 돌덩이에 관심을 지니지는 않는 것이다.
'도대체 또 뭔 헛짓거리를 하고 온 거야?'
"늦게 와서 죄송해요."
"무사했다면 그걸로 됐어. 난 별 일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너무 늦게 다니진 말아라. 아무리 우리 마을의 치안이 좋다해도 늦은 시간까지 노는 건 걱정되니까 말야."
'퍽이나 걱정 하셨겠다.'
흘끔 젤가의 눈이 소피아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며 기레스는 속으로 젤가를 비웃었다.
"저.. 그럼 올라가 볼게요."
기레스는 젤가와 소피아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똑 똑
방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기레스의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기레스 아직 식사하지 않았지?"
소피아의 온화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온다.
"네."
"들어갈게."
소피아는 음식을 가지고 기레스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어딜 갔다 온 거니? 어차피 뭘 사려 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뭐 그렇지."
"기레스 네가 하는 일에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정말로 걱정했단 말야."
"그건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이쪽도 어쩔 수 없었다고 설마 이렇게 오래 비울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그나저나 걱정은 했으면서 용케도 젤가와 하일즈를 보내지 않았네."
"그거야... 젤가의 말처럼 조금 늦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한다면 기레스가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만약 뭔가를 꾸미고 있을때 젤가나 하일즈가 나타나면 혹시나 그 일에 방해가 될까봐서..."
배 안에 아이가 있지 않았다면 소피아 본인이 나서서 기레스를 찾아나서서 불안감을 없앴겠지만 임신한 지금, 가족들 앞에서 그렇게 나설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젤가와 하일즈를 보내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필사적으로 둘을 붙잡아 두어야 했던 것이다.
"잘했어."
기레스는 다소곳하게 침대에 앉아 있는 소피아의 아름다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피아보다 키가 작고 아직 앳되보이는 기레스가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행위는 언밸런스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손길을 받아들이는 소피아의 표정은 경건하게 신자가 신을 받드는 것마냥 황홀하기만 하다.
"정말 노력했단 말야."
"어떻게?"
"젤가의 경우는 살짝 휘청이는 연기를 해서... 찾으러 나가지 못하게 하고.. 하일즈는 아까처럼 어리니 밤길을 걸으면 위험하다고 하면서 기다려 보자고 했지."
소피아에게 단순한 거짓말로 가족들을 속여 나가는 것은 이미 일상이나 다름 없었다.
"정말 잘했어. 하일즈가 나왔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야. 역시 소피아라니까."
"헤헷.."
하일즈가 기레스를 찾아 나서서 클로에가 술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덤으로 기레스와 밀담을 하는 꼴까지 목격하게 되었다면 기레스가 세웠던 계획은 완벽하게 꼬여 버렸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기는 했었나 봐?"
"소피아 지금 준비할 수 있는 돈은 얼마나 있지?"
"용돈이 필요한 건 아닌 모양이네."
소피아는 기레스의 표정을 보고 묘한 흥분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자신을 타락시킬 때 보여주었던 그 표정에 소피아의 속옷은 절로 애액으로 얼룩졌다.
"3천만 준비해 줄 수 있어?"
"기레스가 원한다면..."
소피아는 그윽한 눈으로 기레스를 바라보면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3천만인데도?"
"1억이라도 괜찮아. 조금 더 시간을 들이면 그 열배라도 충분히 가능하고.. 어차피 내 돈은 전부 기레스거니까.."
"그렇게 에보나가 많다고?"
"음.. 그래도 일단 당장 건넬 수 있는 에보나는 5천만 정도려나..?"
"그럼 1억은 어디서 나온 돈이야?"
"기레스도 참.. 내게는 지갑이 있잖아."
소피아는 충분히 젤가라고 표현할 수 있음에도 기레스를 위해 자신의 남편을 돈을 뽑아내는 지갑에 비유했다. 그녀의 남심을 녹여버릴 듯한 간드러진 표정과 눈길을 보고 기레스는 입꼬리를 귀에 걸었다.
"하여간."
기레스는 소피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운 유방을 주물 거리면서 동시에 소피아와 입을 맞추어 혀를 집어 넣었다.
"아앙♪ 음 츄릅... 쯔읍."
소피아는 오랜만의 혀를 섞는 키스에 침 한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기레스의 혀를 탐했다. 게걸스럽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의 추잡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소피아 같이 보고만 있어도 몸이 절로 달아오를 정도의 색기를 가진 여자라면 추잡스러운 것은 역으로 매력으로 다가온다.
방금까지 기레스를 걱정하던 정숙한 어머니였던 여자가 지금은 음탕한 탕녀같이 혀를 탐하는 상황은 더할나위 없는 배덕감을 불러 일으켰다.
"푸하.. 하으으으으읏...!"
기레스는 손가락을 이용해 소피아의 쌓여있던 정욕을 날려버리는 상쾌한 절정을 선사해 주었다. 소피아는 자신의 애액으로 범벅이 된 팬티를 들어 보이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으..."
"뭐야 만족 못했어?"
기레스는 소피아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만족은... 했는데.. 이걸로 끝내자니 아쉬워서.. 벌써 오랫 동안 맛보지 못했는걸.."
"임신 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소피아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기레스의 몸 구석구석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참아."
"네."
동물귀가 있었다면 축 늘어트렸을 것만 같이 그녀는 온몸으로 깊은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런데 돈은 어째서 필요한 거야?"
기레스는 소피아에게 클로에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세하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클로에가 어떤 사정인지를 들은 소피아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다음 목표는 클로에 인거네..."
소피아의 고운 이마가 살짝 일그러 졌다. 그녀는 기레스에게 거역할 수 없다. 기레스가 바란다면 그것을 들어주는 것이야 말로 그녀에게는 지고의 기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레스가 자신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클로에는 예쁘지..'
기레스가 다른 여성을 원한다고 할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던 소피아였지만, 그 다음 대상이 클로에라는 것을 알자 살짝 그녀의 마음 속은 시큰 거리며 불안이 싹텄다.
나이 30을 넘겨 이제 저물 일만 남은 자신과는 달리 아직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지 않은 한창인 나이임에도 사람을 아우르는 매력을 가진 클로에를 떠올리며 그녀는 문득 기레스가 클로에를 손에 넣게 된다면 자신은 뒷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레스가 그러고 싶다면 따라야 해.'
힘없이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그렇게 결심을 다지는 찰나 기레스는 소피아의 손을 잡아 당겼다.
"꺄앗!"
"보아하니 또 바보같은 고민을 하고 있나 보구만."
양아들이랍시고 자신을 실컷 빙 둘러서 고생하게 했던 옛날의 풋풋했던 소피아를 생각하면서 기레스는 기가 찬 듯 툴툴 거렸다.
"기레스!? 으읏!?"
기레스의 손가락이 거칠게 소피아의 음부를 들쑤셨다.
"기레스. 임신은..."
"어차피 안정기잖아? 아니면 하지 말까?"
소피아는 입을 오믈거리면서 거절의 의사를 표하지는 않고, 요망한 눈초리로 말없이 기레스의 전신을 끌어 안아 다리로 기레스의 허리를 휘감았다. 기레스는 삽시간에 뱀에게 돌돌 말려버린 개구리마냥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도 서로 살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소피아는 물론이거니와 기레스도 곧장 사정을 해버릴 정도로 흥분해 버렸다. 오랫동안 몸을 품지 못해 달아오른 것은 소피아 뿐이 아닌 것이다.
옷 위로도 느껴지는 소피아의 부풀어 오른 배의 느낌을 맛보면서 기레스는 살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 소피아는 쾌락에 꿀단지에 빠진 것처럼 몇번이고 절정을 맛보며 자지러졌다.
정사는 너무나도 농후했지만 혹여 가족의 방해가 들어올까 싶어 길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도 수차례나 전신이 쾌락에 절여지는 것 같은 쾌락을 맛봐 몸을 움찔 거리며 절정에 젖어있는 소피아에게 기레스가 말했다.
"후우. 그렇게 클로에를 손에 넣는 게 싫다면 포기해 줄게."
"어 어째서?"
'진짜 어째서냐..'
기레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전생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생애 단 한번도 여자를 위해서 자신의 의견을 접어 본 일이 없었던 기레스다.
하물며 소피아는 해도 좋다고 공인까지 해놓은 상황이다. 원래라면 백명의 여자가 싫다고 반대의 의사를 보이면 백명의 여자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갈 기레스였지만 어째선지 소피아의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본 기레스는 그럴거라면 클로에를 포기하는 게 낫다고 순간 생각해 버린 것이다.
'무슨 순애보도 아니고..'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지만 기레스는 소피아가 거절한다면 이번 한번만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줄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소피아는 이미 기레스가 내로라하는 악당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는 것에 그녀의 불안했던 마음은 흘러 넘칠 정도의 행복으로 가득 차버렸다.
"고마워 기레스."
소피아는 기레스를 뒤에서 살포시 끌어 안았다. 그녀의 원형으로 풍만한 탐스러운 신체의 굴곡은 옷 위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육감적인 신체는 기레스의 본능을 자극해, '꼭 클로에를 얻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치밀어 오르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역시 기레스는 하고 싶은대로 하는 쪽이 멋지니까 말야. 사실 나도 그 편이 더 흥분되고.."
기레스의 애정을 온몸으로 느낀 소피아는 요염한 자태를 풍기며 기레스를 부추기듯 말했다. 기레스가 클로에보다 자신을 더 아낀다는 확신이 생기자마자 그녀는 기레스를 도와 클로에를 타락시키고 싶은 음심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럼 그딴 표정 짓지 말라고."
기레스는 퉁명스레 그리 말하자 소피아는 밝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소피아의 안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