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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네토기-48화 (48/238)

〈 48화 〉 클로에(4)

* * *

클로에가 기레스를 데리고 간 곳은 물이 흐르는 개울 근처의 강둑이었다. 이미 밤을 늦은 이런 시간에는 인적이 매우 드문 장소다.

"내가 어째서 술집에서 일을 하느냐고 물었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클로에의 얼굴은 역시나 아름다워서 기레스의 욕정이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다.

"내가 술집에서 일을 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에 기레스는 묵묵 부답으로 클로에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빙빙 말을 돌리고 싶은 건가?'

클로에는 기레스와 큰 접점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귀고 있는 하일즈의 형이라는 점 때문에 종종 기레스를 보아 왔었다.

그녀가 내린 기레스의 평가는 언제나 바보 같이 얼빠진 얼굴을 하면서 자기 주장하나 제대로 못하는 얼간이였다. 물론 그건 젤가와 하일즈 티나의 뒷사정을 모르는 클로에의 속 편한 평가였지만 적어도 지금 기레스를 만나기 직전까지, 클로에에게 기레스는 두 말이 필요 없는 한심한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의 기레스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인데.."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자기 의견 하나 내지 못했던 때와는 다르네."

"그야 이건 하일즈를 위해서니까..."

기레스는 굳이 하일즈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일즈를 위하기는커녕 지옥의 나락에 굴러 떨어트릴 생각으로만 가득한 주제에 기레스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해서 실로 동생에 대한 깊은 우애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자신이 괴롭힘 당하는 건 상관 없어도 동생이 괴로워 하는 것에는 이렇게 나선다는 건가?'

그런 기레스의 모습을 보면서 클로에는 하일즈는 좋은 형을 두었다고 착각하며 멋대로 지금까지 한심하다고만 생각해 왔던 기레스의 평가를 올려버렸다.

"후우.. 아무래도 듣기 전에는 놓아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네."

달빛에 반사되어 살짝 은빛이 감돌아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머릿결을 쓸어 넘기면서 그녀는 기레스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집에는 빚이 있어."

"빚?"

"그래. 우리 아버지는 상습적인 도박중독자였거든."

"아버지는 지금도 같이 살고 있어?"

"아니, 우리 집에 빚만을 남기시고 도망치셨어.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역겨운 인간이지."

"그렇다면 하일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아냐?"

"그야 뭐.. 알고 있지."

클로에는 살짝 말 끝을 흐렸다.

"거기에 그런 빚이 있다면 이전부터 일을 하지 않고 왜 최근에 들어서야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된 거야?"

"본론은 지금부터야."

클로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빚을 지기는 했지만, 돈을 빌려준 사람은 상당히 양심적인 사람이었어. 그래서 아버지....가 도망치셨을때도 우리에게 큰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

'이런 세상에 상당히 드문 인간이로군.'

전생에서도 그런 사람은 흔치 않지만, 이세계는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이 상식처럼 여겨지는 세계다.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이세계에서는 더욱 더 빌린 쪽에게 가혹한 것이다.

빚을 졌다면 갚는 것이 도리이며 갚지 못한다면 무슨 짓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세계에서 사정을 보아 주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인 것이다. 특히나 빚을 진 당사자의 딸이 이런 극상의 미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극단적으로는 돈을 빌려준 사람이 클로에를 성노예로 만들어도 세간의 상식으로는 용납되었을 것이다. 불한당들의 무덤이라고 불리우는 그레이브는 그정도로 약자에게는 한없이 비정한 세상이었다.

'어딜가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천천히 갚아나가기만 하면 재촉은 하지 않는 그런 분이셨어."

"좋은 사람이네."

"응. 그 덕에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어머니가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에 큰 지장은 없었지. 하지만..."

클로에의 무표정의 가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머니가 병에 걸렸어."

'과연..'

기레스는 처음 클로에의 집을 찾아갔을 때, 집을 나서던 클로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심한 병이야?"

필사적으로 표정을 유지하려하는 클로에의 모습을 감상하며 기레스가 말했다.

"응. 2등급 마법이 필요할 정도로..."

"2등급?"

"하긴 하일즈의 집은 완벽하니 이런 것도 모르겠구나."

'소피아를 제외하면 죄다 인간 쓰레기들 뿐이지만 말이지.'

그 대상 안에 자기 자신을 제외하지 않는 것이 기레스라는 인간이다. 설사 젤가와 하일즈 티나가 악이며 자신은 어디까지나 그들에 대한 복수를 한 것 뿐이라해도 악은 악인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타인의 여자를 취하고 싶다는 기레스의 추잡한 욕망에서 비롯된 음행은 시작될 수조차 없다.

"병의 정도에 따라서 필요한 마법의 등급이 다르거든"

"2등급이면 비싼 거야?"

기레스의 눈치없는 질문에 클로에는 순간 답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조금만 빨리 병을 눈치챘다면 4등급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있었을텐데... 우리 때문에 무리하시다가.."

감정이 복받쳤는지 구슬 같은 눈물이 클로에의 뺨을 타고 흘러 내린다. 그녀가 이런 자신의 사정을 말한 것은 기레스가 처음이었다.

'암 같은 건가?'

그런 클로에의 눈물을 보면서도 기레스의 마음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도 참 무슨 꼴을.. 어쨋든 그래서 일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거야. 어머니는 병 때문에 쓰러져 일을 하지 못하게 되셨고, 돈을 빌려주신 분도 처음 몇달 간은 사정을 봐주셨지만 이제는 사정을 봐줄 수 없다고 전해왔거든. 빚도 갚으면서 어머니를 치료할 수 있는 마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어."

"그래서.. 술집에서..?"

"그래."

"하지만 어째서 하일즈에게 비밀로 해야 했던 거야? 설마 하일즈가 그런 것도 용납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야?"

넌지시 기레스는 자신이 하일즈를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사를 내리 깔았다. 하일즈라면 어떤 곳에서 일을 하더라도 클로에를 사랑했을 것이라는 형의 믿음을 보여주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그저 하일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이런 일.. 하일즈가 안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까.."

"용케도 나한테는 이야기 했구만."

"그야 말하지 않으면 하일즈에게 이야기 한다고 했고.. 기레스 넌 굳이 따지면 아무래도 좋은 인간이니까.."

'와.. 그걸 본인 앞에서 말하는 건가? 뭐 굳이 따지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 직전까지 클로에에게 기레스는 어디까지나 제3자에 불과한 한심한 남자에 불과했다. 하일즈의 형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지나가는 흐릿한 사람 A일 뿐인 것이다.

지나가며 마주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일일히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은 기레스이기에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자신의 사정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기레스 너도 내 사정 따위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을거 아냐?"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기레스는 가볍게 반론했다.

"그래? 그건 조금 의외네.... 하지만 사정을 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을거고.."

"그런가..?"

'그나저나 유페르 가문에는 좋은 여자들이 꼬이는 구만..'

젤가가 손에 넣은 소피아도 그렇지만, 클로에도 단순히 외모 뿐만 아니라 하일즈를 걱정하는 게 느껴지는 좋은 여자였다. 그야말로 기레스가 먹어 치워 소유하고 싶디는 욕망을 들끓게 만드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멋진 여자인 것이다. 그런 열띤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더럽힐 때, 기레스는 지고의 환희를 느낀다.

'술집에서 일한다는 걸 비밀로 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하일즈의 성격상 이후 들켰을 때의 후폭풍을 생각하면 클로에의 생각은 너무 얕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 의도의 순수함만은 분명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지니고 있는 유페르 가문에 의지하지 않고 하일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에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일즈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겠다는 게 주된 이유겠지만, 설사 자신의 남자친구라고 할지라도 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 보이겠다는 각오에서 그녀의 무식할 정도의 고지식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하일즈한테는 어떻게 말해둔 거야? 나도 이정도로 물어볼 정돈데 하일즈가 쉽사리 물러섰을 것 같지는 않은데.."

"사정을 더 물으면 헤어지겠다고 했어."

'대쪽 같은 여자구만.'

클로에에 대해 조사하면서 이미 기레스는 간접적으로 그녀가 젤가나 하일즈보다도 더 고지식한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면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또다른 신선함이 느껴진다.

"이제 답변은 다 되었지? 당연하겠지만 소문은 내지 말아 줘. 하일즈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

일면 날카로워 보이는 말투지만 그 안에서 잔잔하게 하일즈를 생각하는 마음을 느낀 기레스의 마음은 달짝지근하게 달아 올랐다. 술집에서 일한다는 소문에 대한 불쾌함보다 하일즈를 위하는 그녀의 심성이 돋보인 발언이었기 때문이었다. 달아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기레스는 클로에에게 말했다.

"그건 걱정 마.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물어보고 싶은데.."

"뭔데?"

"그 2등급 마법이라는 건 얼마 정도 하는 거야?"

클로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아까 클로에가 말했잖아.... 시기를 놓쳐서 4등급 마법으로 치료할 수 없었다고.. 나도 혹시나 그런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서... 2등급과 4등급 마법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아두고 싶었거든."

"그런가... 하긴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기레스의 청산유수같은 언변에 클로에도 납득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레스에게 말했다.

"3천만 에보나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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