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클로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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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서 개인의 재능이란 재산과도 같을 정도로 중요하다. 기레스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백이면 백 소피아를 지목할 것이다. 그녀의 가치는 마을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절대적인 입지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어른들 사이에서의 이야기지만 이세계에서 재능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이 그만큼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만큼, 아이들 사이에서도 누구의 재능이 제일 뛰어난가는 언제나 좋은 떡밥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니 저러니 누가 제일인가? 하는 떡밥은 갑론을박이 되기 마련이지만, 언제나 손에 꼽히는 사람이 있다면 유페르 가문의 자식인 하일즈와 티나 그리고 클로에였다. 그중에서도 소피아만큼 독보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클로에의 재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중론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재능이 재능이니만큼 클로에의 외모는 굉장히 뛰어났다. 슬슬 앳된 모습을 벗어 던지고 처녀 티를 내기 시작하는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에 반한 아이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성에 눈을 뜨는 나이인 청년들 사이에서 클로에를 반찬 삼아 자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자부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동년배 중에서는 독보적이었다.
푸른 빛이 감도는 머릿결에 탱글거리며 생기가 넘치는 피부결. 아직 여물지 못했음에도 터지기 직전의 꽃봉오리마냥 싱그러운 육체에 날카롭고 이지적인 외모까지.. 그렇게 숨길 수 없는 아름다운 용모를 선보이며 타고난 재능으로 무슨 일이든 철인처럼 해결해 버리는 그녀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좋은 의미로든 추잡한 의미로든 우상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클로에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남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클로에의 다음으로 손꼽히는 재능에 마을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 소피아의 아들인 하일즈와 클로에는 사귀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소꿉친구로 언제나 붙어 다녔던 하일즈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예쁘고 아름다운 클로에를 사랑하게 되었다. 클로에도 젤가와 소피아의 피를 이어받아 조각같은 미남에 문무를 겸비하며 흠 잡을 곳 없어 보이는 하일즈의 호의가 싫을 리가 없었기에 하일즈의 적극적인 구애에 못 이긴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하일즈와 사귀게 된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어른들의 권력이 있지만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보이지 않는 권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외모 때문이든, 행실 때문이든, 클로에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많았지만 감히 하일즈의 앞에서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하일즈의 권력도 권력이지만 어느 누가 보더라도 클로에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의 한 쌍이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주제를 파악해가며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단 한사람 기레스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단합해서 기레스를 괴롭혔던 무렵에 기레스의 편을 들어준 사람은 소피아 뿐이었지만, 얼마 안되는 사람들일지라도 기레스를 괴롭히지 않았던 이들은 분명 존재했다. 그 얼마 안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클로에였다.
괜히 하일즈가 학교에서 나서서 기레스를 괴롭히지 않고 외진 곳까지 나선 게 아닌 것이다.
클로에는 딱히 괴롭힘을 말릴 정도로 정의감이 넘치는 건 아니었지만 약자를 괴롭히는 치사한 행동은 질색했다. 그런 클로에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일즈는 클로에의 시야 안에서는 철저하게 기레스를 괴롭히는 행위를 피해왔다.
기레스는 소피아와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주변의 사람들의 정보를 모으는 것에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나를 괴롭혔다는 이딴 걸로는 약점을 잡을 순 없겠지.'
학교에서 얼빵하게 보이는 와중에도 정보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기레스는 소피아와는 다르게 클로에는 자신을 길가에 지나다니는 돌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클로에에게 하일즈의 치부를 말해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그녀가 하일즈에게 실망해 헤어지는 것 뿐이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쌤통이지만, 자기만족 외에 기레스에게 실질적으로 돌아오는 이득은 없었다.
'일단 한번 가볼까?'
하일즈와 티나는 숱하게 들렀을 클로에의 집을 향해 기레스는 발걸음을 돌렸다.
클로에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틈만 나면 들렀던 하일즈와 티나와는 다르게 기레스는 클로에의 집에는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아직 어렸을 무렵에도 그는 자신의 남매들에게 숱한 괴롭힘을 당해 오고 있었고, 그 괴롭힘이 익숙해져올 무렵, 이미 기레스와 클로에는 남남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에 방문할 명분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엄마. 몸 관리 잘하고 계세요."
때마침 집 밖으로 나오는 클로에를 발견하고 기레스는 슬쩍 자신의 몸을 숨겼다.
'겉모습은 그다지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아 보이는데.. 아프다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지?'
누가 봐도 클로에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표정의 변화가 다양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어지간히 기쁜 일이 아니라면 입가에 미소를 짓는 일도 드물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무표정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기레스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좋아. 일단 따라가 볼까?'
기레스는 조심스럽게 클로에를 미행해 나갔다. 뒷골목을 돌아서는 클로에를 보고 그는 놓칠새라 발을 재촉했다. 골목을 돌아 클로에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그 순간 기레스의 목에는 서늘한 무언가가 닿아 있었다.
"뭐하는 거야?"
청량한 클로에의 목소리가 기레스의 뒤에서 들려온다.
'어느새..'
"잠깐 잠깐. 난 수상한 사람이 아냐."
"미행을 하면서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너무 뻔뻔하지 않아? 음? 기레스?"
기레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녀의 무표정하게 굳어 있던 눈썹이 의외라는 듯 까딱거린다.
'얼굴 확인도 안하고도 미행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건가...?'
기레스는 미행하기는 했지만 딱히 얼굴을 숨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클로에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지도 않고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뒤를 잡은 것이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잴 수 없는 이세계 사람들의 재능에 기레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은 평생을 죽어라 노력해도 누가 미행하는 지 따위는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클로에에게 말했다.
"알았으면 그 칼좀 치워줄래?"
"그래서?"
"응?"
"나를 미행한 이유가 뭐야?"
딱히 적의를 담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클로에의 말투에는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평소에는 대화 하나 섞지 않는 남남 같은 인간이 미행하는 것을 달갑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사실은 말야. 하일즈 때문에 온 거야."
"하일즈?"
하일즈의 이야기가 나오자 클로에의 태도가 살짝 온화하게 변했다.
"최근에 부쩍 힘이 없고, 예민해져 있더라고.. 거기에 언제나 너를 만나러 가던 시간에도 집에 있기 일쑤여서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기레스가 그렇게 하일즈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가?"
"이래뵈도 형이니까 말이지.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소피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일즈는 한동안 기레스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보란듯이 직접 자기 손으로 처리해 준 일이 있었다.
자신의 정의로운 행동을 하일즈가 클로에에게 보여주지 않을 리 없었기 때문에 클로에도 이전 기레스를 구해줬던 하일즈를 떠올리면서 납득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하일즈와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
"어이! 클로에 거기서 뭘 하는 거냐! 출근 시간인데도 아직 안와서 나와봤더니만.."
멀리서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에 클로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지금 갈게요!"
그리고는 탐탁치 않은 눈으로 기레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일은 하일즈에게는 비밀이야. 알았지?"
기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수긍해 주자 그제서야 그녀는 그녀를 부른 건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기레스는 그녀가 달려 들어간 건물의 간판을 보았다.
'술집인가..?'
술집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나오면서 클로에는 그녀 답지 않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그런 녀석에게 들키다니.'
"지금 끝난 거야? 상당히 늦게까지 일하는데?"
이미 밤 9시를 넘겨서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생과는 달리 나이에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 이세계 사람들이라지만 그렇다 해도 클로에 정도의 나이에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클로에는 그닥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등을 돌리면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 보았다.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하일즈의 형으로서 동생의 여자친구인 네가 어째서 저런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지 알아야 겠어."
사실 하일즈와 기레스는 앙숙과도 같은 관계였지만 하일즈가 기레스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모르는 클로에에게 그 의견은 일면 일리가 있어보였다.
"말하지 않겠다면?"
"하일즈에게 네가 여기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뿐이지. 그래도 좋다면 알려주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이유를 말해주고 그 이유가 타당하다면 말하지 않겠어."
기레스는 클로에가 자신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일즈에게 들키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그녀의 말을 받아 쳤다.
클로에의 성격상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면 술집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레스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하일즈를 빌미로 이유를 묻는 것을 강행한 것이다.
하일즈에게 비밀이 발각되느냐, 아니면 여기서 납득할 수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비밀로 하느냐의 선택지에서 그녀가 무엇을 고를지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뭐 대답하지 않는 경우에는 소피아를 시켜서 알아내면 되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여기서 들어 두는 쪽이 모양새가 좋다고 기레스는 생각했다. 소피아가 몰래 알아내는 것과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기레스가 원래 이렇게 뻔뻔했었나?'
클로에가 기억하던 기레스는 언제나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대꾸하나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아이였다. 그런 기레스가 자신의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으면서 클로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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