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소피아(30)
* * *
"그래서 소피아는 3일 정도 기레스와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아침 식사 시간에 젤가는 소피아를 대신해 이야기를 꺼냈다.
"네?"
"어째서 저.. 오빠만?"
이미 소피아에게 구워 삶아진 젤가와는 다르게 하일즈와 티나는 당연히 반발하고 나섰다.
"하일즈와 티나는 작년에 이미 젤가와 함께 다녀 왔잖니."
"하지만 그때는 형이 아파서.."
"이유가 뭐가 되었든지간에 기레스에겐 너와 티나가 겪은 추억은 없잖니. 그러니 이번에는 기레스의 추억을 만들어 주려는 거야."
소피아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일즈와 티나를 속여 나갔다. 겉으로는 자애롭고 온화한 어머니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검고 끈적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희도 데려가 주시면 안되요?"
하일즈와 티나는 젤가를 바라보며 일말의 기대를 품어 보았지만 젤가는 흔들림 없이 그들의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이미 결정된 일이야."
젤가는 하일즈와 티나의 바람보다 자신의 욕망이 더 중요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여행을 다녀온 소피아에게 봉사를 받고 싶다는 욕망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소피아의 음란한 몸뚱이를 떠올리자 젤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정감이 올라왔다.
"하일즈 티나, 떼 쓰지 마렴. 가족 여행은 언제든지 할 수 있잖니. 다음에 다 같이 여행을 하도록 하고, 이번에는 기레스에게 양보하렴."
소피아가 그렇게 타이르듯 말하면 이미 지은 죄가 있는 하일즈와 티나는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소피아는 자애롭게 말했지만 그것이 소통하는 의견이 아닌 일방적인 통보라는 것을 하일즈는 이성으로, 티나는 감성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형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세요."
하일즈는 입가에 공허한 엷은 미소를 띄우며 소피아에게 말했다.
"오빠?"
"이번에는 기레스 형에게 양보하자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형이 부모님과 여행할 기회가 언제 또 있을지 모르잖아. 우리는 이미 이전에 한번 다녀왔으니까."
이미 소피아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하일즈는 재빨리 여기서는 점수를 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전략을 수정했다.
"으으.."
티나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울상 지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소피아와 젤가의 딸 답게 인형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아이가 축 늘어진 모습은 누구라도 동정심이 동할 정도로 가련해 보였지만 소피아도 젤가도 이미 티나는 뒷전이었다.
소피아는 기레스와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젤가는 여행 이후의 소피아의 포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해 이미 그들의 마음에 티나에 대한 동정심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조금도 없었다.
하일즈와 티나는 아쉬워 하면서도 자신들의 가정이 기레스에 의해 일그러 지고 있다는 자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차라리 두뇌회전이 덜 돌아가는 어린아이였다면, 어린아이답게 떼를 쓰고 악을 쓸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머리가 좋아 영악하기에 하일즈는 한껏 포장한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없었다.
소피아는 하일즈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일즈와 티나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평소에 비해 눈에 띄게 따뜻한 행동에 하일즈와 티나는 그 순간만큼은 아쉬움도 잊고 감동해 버렸다.
"다음에는 다 같이 가자."
"네 어머니."
"네 엄마."
감동해 버린 아이들과는 반대로 소피아의 그 자애로워 보이는 언행의 뒤에는 배덕적인 망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소피아는 여행을 분주하게 준비했다. 기레스는 1년 전에도 이랬던 것을 떠올렸다. 이세계는 현대의 지구처럼 교통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문화가 아니었는지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소피아와 기레스가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당일이 되었다.
"그럼 다녀올게!"
"좋은 추억을 만들고 와. 소피아."
젤가는 보기 드물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소피아를 배웅했다.
"다녀오세요.."
젤가를 제외하고는 하일즈도 티나도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힘이 빠져보이는 배웅이었지만 이미 소피아에게 그런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방해꾼' 없이 기레스와 함께 둘만의 여행을 간다는 기대에 소피아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해맑은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럼 기레스 가볼까?"
"네."
반면 기레스도 여행에 대한 기대는 소피아 못지 않았다.
자신의 친부모가 죽고 젤가와 소피아의 양자가 된 이래로 기레스는 마을의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정보도 어느정도 있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마을 밖의 세상을 구경한다는 것에 기레스도 적지 않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야 되는 거죠?"
"일단은 뷔넨까지 갈거야."
"뷔넨.."
기레스도 그 도시가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아무리 마을 밖의 상황에 무지하다고 하더라도 그 도시의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뷔넨은 기레스와 소피아가 살고 있는 세프람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불리우는 도시다.
기레스가 살고 있는 마을과는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마냥 가깝지만도 않은 도시였다. 기레스의 걸음으로는 몇시간을 걸어도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의 거리다.
"그런데 뷔넨은 어떻게 가요?"
"걸어서?"
"네!?"
화들짝 놀라는 기레스에게 소피아는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기레스도 그렇게 놀라기도 하는구나."
'뭔가 짓궂어 진 느낌인데..'
젤가와의 조교 때문인지 소피아는 종종 기레스를 놀리는 빈도가 늘어났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번 여행으로 일단 고삐는 잡아두도록 할까?'
준비한 물건을 상상하면서 기레스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여행에서 돈은 아끼지 않기로 했단다.."
소피아는 품 속에서 무언가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시간은 금이니까 말야."
소피아는 종이를 까딱거리면서 요염하게 웃었다.
"음.. 예약자명이 어떻게 되시죠?"
"소피아 유페르에요."
소피아는 점잖게 생긴 초로의 노인에게 티켓을 건네며 말했다. 노인은 티켓과 소피아를 번갈아 보고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새하얀 빛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잠시 이리로 오시죠."
노인은 소피아와 기레스를 살짝 인도한 뒤에 휘파람을 불었다. 곧 그들이 서 있는 땅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뒤덮혔다.
"와.."
'대단한데.'
마음이 탁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기레스였지만 이때만큼은 아이가 된 것처럼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기레스의 안에 남아 있었던 현대상식의 조각을 날려버리는 생물이 눈 앞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훗."
기레스가 놀라는 것을 보고 소피아는 자신도 덩달아 기뻐져 눈웃음 지었다.
"저게 뭐죠?"
"세프람의 명물인 [씨어드]라고 한단다."
씨어드라고 불리우는 괴수는 머리는 우아한 새처럼 생겼고, 새하얀 멋진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몸에는 네개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씨어드의 머리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의 전신에는 말의 갈기같아 보이는 은빛으로 빛나는 고운 털이 여러 줄기 땅까지 늘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멋진 외견이지만 기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기괴한 혼종이었다.
작은 집채만큼이나 거대한 괴수의 키는 거의 3~4미터는 되어 보였으며 그 거대한 몸통의 등에는 가마를 연상시키는 작은 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뷔넨까지의 거리라면 마차를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시간이 아까우니까 말야."
아주 잠시 소피아의 발정난 눈빛이 스치는 것을 보고 기레스는 생각했다.
'어지간히도 기대했나보군.'
"하하 어딜 가시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급하신 모양이군요. 자 그러면 출발해 볼까요? 자 그럼 부인 짐을 제게 주시지요."
"기레스도 짐을 주렴."
기레스는 어깨에 짊어진 작은 가방을 소피아에게 건네 주었다. 노인은 소피아의 짐과 기레스의 짐을 건네 받고는 씨어드의 바닥까지 늘어진 갈기를 잡아 당겼다. 그와 동시에 갈기는 수축해 보기 좋게 노인은 씨어드의 목 위의 안장에 앉을 수 있었다. 한손으로 가볍게 자신의 몸과 짐의 무게를 감당하는 그 모습은 도저히 노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신체능력이었다.
그 생소한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기레스는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올라가지?'
소피아야 걱정할 게 없지만 기레스는 저 갈기같은 털에 안전하게 매달릴 자신이 없었다. 이세계 사람들의 안전기준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이세계인들의 기준으로 맞춰져 있기 때문에 기레스는 어린나이에 상당히 좌절을 맛본 적이 많았다.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 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이 기레스 같은 불한당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게 이세계인 것이다.
"으음.."
'귀여워.'
그런 기레스의 고민을 알았는지 소피아는 다정하게 기레스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자 그럼 내립니다."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거대한 바구니가 내려왔다. 거대한 바구니는 씨어드의 갈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
소피아는 기레스를 가볍게 들어 그 바구니에 넣어주고는 자신도 바구니 안으로 들어왔다. 둘이 바구니에 탑승한 것을 확인한 노인은 갈기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바구니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빨려 들어가듯 올라갔다.
"자 그러면 안에 들어 오시지요. 곧 출발하겠습니다."
노인은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고는 안장으로 이동해 씨어드의 갈기를 잡아 끌었다.
"자 그럼 갑니다."
씨어드의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좁은 가마 정도를 예상했는데 내부는 버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비행기를 타는 느낌이군.'
"기레스 어떠니?"
"멋지네요."
"좋아하니 다행이다."
소피아는 누가봐도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레스의 손이 닿으면 음란하기 짝이 없는 요부가 된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순백의 미소다.
'소피아도 신난 거 같고.. 잠시 즐겨볼까?'
기레스는 은밀하게 손을 소피아에게 움직이려 했으나 소피아는 가볍게 그의 손을 거절했다.
'응?'
"여기선 안돼."
"어째서요?"
"이제 곧 도착이거든."
'아직 날아 오른지 10분도 안되었는데..'
"그러니까 그건 이 뒤에.."
소피아는 자신의 젖은 치부를 살짝 들추어 보여주면서 기대에 찬 음탕한 시선으로 기레스를 바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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